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을 받아들이고서도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나는 모든 증거들이 하나의 결론을 가리키고 있다고 말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논고』를 썼을 때, 그는 다이아몬드와 그녀의 동료들이 거부한 바로 그 관점을 실제로 받아들였다고 말이다. "말로 옮겨질 수 없는 것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것들은 자기 자신을 현시한다. 그것들은 신비적인 것들이다."(『논고』 6.522) 그것들은 말해질 수 없거나, 더 정확히 말해, 생각될 수 없다. (생각 역시 "일종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 그가 이러한 입장의 얼토당토 않음을 마침내 자각하였을 때, 그의 반응은, 그 자신이 유지하길 원하였고 때로 재해석하기 원하였던 『논고』의 철학적 통찰을 버리기보다는, 사다리의 은유를 버리는 것이었다고 보인다.

I suggest that all the evidence points to the conclusion that when he wrote the Tractatus, Wittgenstein did indeed embrace the very view Diamond and her colleagues reject. ‘There are, indeed, things that cannot be put into words. They make themselves manifest. They are what is mystical’ (Tractatus 6.522). They cannot be said or indeed thought (for thought too ‘is a kind of language’) […] [I]t seems that when he did finally realize the untenability of this position, his reaction was to jettison the ladder metaphor, rather than to jettison the philosophical insights of the Tractatus that he wished to preserve and sometimes to reinterpret. (Hacker, P. M. S., “Was He Trying to Whistle It?”, The New Wittgenstein, A. Crary and R. Read(eds.),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00, 381-382.)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비트겐슈타인의 명언 중 하나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것들은 '말할 수 없는 것'들이고, 이런 것들은 언어의 한계 바깥에 존재한다는 점에서 '신비적인 것'들이라는 주장이죠. 우리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것들이 자신을 현시한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는 있지만, 이것들에 대해 우리의 언어로 말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단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어떻게든 말해 보려고 몸부림을 칠 수 있을 뿐이라는 거죠.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해커의) 표준적인 해석은 이런 '말할 수 없는 것'들 혹은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이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 이후에는 폐기된다고 지적하죠. 비트겐슈타인이 『논고』의 논리적 통사론 개념에서 문제를 발견하게 되면서, 『탐구』에서는 더 이상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이분법을 엄격하게 유지하지 않게 되거든요. 물론, 비트겐슈타인은 무의미한 명제들을 치유하려는 『논고』의 철학적 통찰을 『탐구』에서도 유지하지만, 그러한 치유가 굳이 '말할 수 없는 것' 따위를 상정하지 않고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게된 거죠.

2000년대에 유행한 (다이아몬드의) 소위 '단호한 해석'도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부정적이에요. 이 해석은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조차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전혀 상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거든요. 오히려 『논고』는 『탐구』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개념을 비판하기 위해 모든 논의들을 전개하였을 뿐, 결코 '말할 수 없는 것' 따위를 옹호한 적은 없다고 이야기하죠. 쉽게 말해,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도달하기 위한 사다리가 있는 것처럼 꾸며 놓은 다음에, 『논고』 마지막에 이르러 그 사다리를 걷어차 버리는 방식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고 폭로했다는 거죠.

개인적으로, 저는 단순히 주석적으로만 보자면 표준적 해석이 옳다고 평가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전기철학은 '말할 수 없는 것'을 상정하였지만, 후기철학은 '말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였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비트겐슈타인의 텍스트 내부에서만큼은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개념이 초기에는 옹호되다가 후기에는 폐기된다고 보는 거죠.

​그렇지만 저는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을 받아들이면서도 여전히 우리 삶에는 존재하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옹호할 수 있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때 '말할 수 없는 것'이란 언어의 한계 바깥에 있는 신비적인 무엇인가라고 할 수는 없겠죠. 오히려 우리가 일상에서 너무나 자주 직면하게 되는 "아무리 말로 상대방을 이해시켜 보려고 해도 그게 잘 되지 않는다."라는 한탄에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가령, (a) '말해도 소용 없는 것'들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목록 속에 들어갈 수 있겠죠. 정치나 종교에 대한 논쟁에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관점들은 말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이 아니잖아요. 이런 근본적인 관점들은 정말, 상대방에게 현시할 수는 있더라도, 그것들을 현시하는 일이 (적어도) '논쟁'이라는 언어게임에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하죠. 오히려 말을 꺼내는 게 괜히 갈등만 불러 일으키다 보니, 굳이 말을 하지 않게 되면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되죠.

또, (b) '말해도 알 수 없는 것'들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목록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가령,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너무 자잘한 짜증이나 분노나 슬픔 따위가 그렇겠죠. 물론,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상대방에게 하소연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하소연이 우리가 원하는 동정이나 공감과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죠. 한 마디로, 언어게임에서 그 하소연들이 굉장히 무의미한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결국 그런 말들은 말할 수 없는 것들로 남게 되는 거죠.

그 이외에도, (c)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들도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목록에 들어갈 수 있다고 봐요. 가령, 상대방에 대한 사랑, 존경, 감사가 여기에 포함되겠네요. 이 말들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들에 대한 반복이 될 뿐이잖아요. 말을 한다고 해도 뭔가 시원하지가 않은 기분이 들고, 진지함을 담으려 하면 할수록 그 말의 무게가 무거워져서 말하기를 망설이게 될 때가 많죠.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되어버리고요.

그렇지만 저는 이런 '말해도 소용 없는 것', '말해도 알 수 없는 것',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들이라고 생각해요. 일상의 맥락에서 이런 것들을 말할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것들이 순전히 무의미하게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오히려 너무나 중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일상의 맥락에서 이것들에 대해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죠. 말을 꺼내려면, 아무도 굳이 문제 삼지 않던 '일상'이라는 맥락 자체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갱신시켜야 하니까요. 요즘, 이런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삶에는 너무나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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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언어를 통해서 생각을 표현하고 의사소통을 합니다. 거꾸로 사람의 생각이 언어에 의존하기 때문에 언어와 생각이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쌍방적인 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라깡이나 도덕경(노자) 등에 깔려 있는 생각은 언어와 생각은 쌍방을 비추는 대응하지만 가까이 가면 미끄러지는 그런 것이라고 봅니다. 즉 인간의 생각과 세계는 언어를 통해서 드러나고 존재하지만 결코 언어가 그 전모를 드러낼 수는 없다. 비트겐슈타인도 궁극적으로는 도가나 불교철학의 언어관에서 나타난 것과 유사한 생각을 했을 것으로 믿습니다. 어찌 보면 철학도 신비적인 믿음을 비판적으로검토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일부 수용하고 이론적 체계를 세우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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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술자리에서 철칙으로 삼는 것이
종교 얘기/ 정치 얘기 / 젠더갈등 얘기 / 군대 얘기(특히 여성분이 계시면)는 되도록 피하자는 것인데(즐겁자고 모인 자리인데, 괜히 의견 안 맞으면 투닥대다가 분위기 안 좋아지기 십상이니까요)

(a)에 해당되는 느낌이네요…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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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약간 생각이 다릅니다. 물론, 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로 완전히 담아낼 수 없는 실재 같은 것을 상정하였지만,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더 이상 그러한 실재를 상정하지 않는다고 봐서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지지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말할 수 없는 것'조차도 원칙적으로는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봐요. 다만, 그 말이 일상의 언어게임에서 등장할 수는 있다고 하더라도, 일상의 언어게임에서는 우리가 의도한 효과를 내지는 못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가령, 우리는 부모님께 "사랑해요."라는 말로 우리 감정을 얼마든지 표현할 수야 있겠지만, 그 말에 진지한 의미를 담으려 하면 담으려 할수록 평소와 같은 분위기에서는 말을 하기가 어려워지잖아요. 평소에 가정에서 수행하는 언어게임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언어게임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사랑해요."라는 말이 충분한 효과를 발휘하기가 어려운 거죠.

즉,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더욱 정확히 표현하자면) '일상의 맥락에서 말할 수 없다'를 의미한다는 거죠. 언어화하기 불가능한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인 맥락과는 전혀 다른 맥락을 도입해야 하기 때문에 말할 수 없게 되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거죠. (어쩌면 "나는 라틴어를 말할 수 없어."라고 고백해야 하는 상황과도 비슷하겠네요. 라틴어도 분명 '언어'이지만,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인 한국어와는 전혀 다른 언어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언어인 것이잖아요. 즉, 말할 수 없는 것이 반드시 비언어적인 것이어야 할 이유는 없는 거죠. 언어적이면서도 말할 수 없는 것이 이런 방식으로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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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의 맥락이긴 한데, 저는 오히려 우리가 종교 이야기나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져요.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이야기는 하지 못한 채, 그저 쾌활한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잡담'만 하고 있을 뿐인 것 같아서요. 일상에서 쉽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을 어떻게든 말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으까 하고 저는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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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글에는 동감합니다. 우리는 각자가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위한 이슈를 끌고와 잡담 (저는 공회전같은 대화라 표현하는데)을 할때가 많습니다.

저는 이런 태도에 아주 질려버린지 오래입니다.
정치, 종교,삶에 대해 솔직하고 열린 대화가 그립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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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피터 버거의 The Sacred Canopy를 조금 읽으면서, 저도 (b)와 같은 부분에 대한 피터 버거의 성찰이 부족하지 않나라고 생각했는데, 비트겐슈타인과 관련해서 YOUN님이 쓰신 글을 읽어보니 또 다른 각도에서 공감이 되네요. 그나저나 오전에 비트겐슈타인과 관련해서 잡담을 남기려 들어왔는데, 마침 비트겐슈타인 관련 글이 최선두에 있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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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글을 쭉 읽어보았습니다. 굉장히 흥미로운데요. 학부생의 신분상 질문이 조악할 수 있겠으나, 후기 비트겐슈타인과 부정신학과의 유사성이 있을까..?라는 의문이 떠오르네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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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직접적인 유사성이나 연관성을 찾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만, 몇 가지 길을 경유한다면 부정신학과 비트겐슈타인을 어느 정도 연결지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가령,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입장은 데리다와 상당히 유사한 것으로 많은 연구자들이 지적하는데, 데리다는 부정신학과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는 인물이기도 하거든요. 이런 방식을로,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 비트겐슈타인과 부정신학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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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고등학교 때 탐구를 재미있게 본 경험이 있는데, 최근에 부정신학에 관심이 생겨서 여쭈었습니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친절한 답변에 감사드리며, 좋은 하루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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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얘기한 이후 과학의 연구범위가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한정됐다고 한 것을 어디선가 얼핏 들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에 말하기 애매한 것들(ex. 양자역학, 상대성 이론)이 과학계의 주류가 됐죠. 한편으론 과학은 말할 수 있는 것으로 b와 c를 모두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려고 하죠.
그런데 이 세 가지로 구분하신 것은 비트겐슈타인 이후에 누군가가 세밀하게 정리한건가요 아님 선생님께서 직접 분리하신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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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도 비트겐슈타인이 과학의 연구범위를 한정지었다기보다는, 과학의 연구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비트겐슈타인이 명료하게 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근대 이후로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전통적인 철학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점차 인식하게 되었는데, 정확히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철학자들이 규정한 것이죠. (그리고 이런 규정은 비트겐슈타인 이전에도 칸트 시절부터 제시된 것이기도 합니다.)

(2) '말해도 소용 없는 것', '말해도 알 수 없는 것',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라는 구분은 순전히 제가 만들어낸 구분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전기철학 이후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 개념을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과 연결지은 연구도 거의 없고요. 그렇지만 저는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개념이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철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유의미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저런 구분을 통해 제 의견을 표현해 보았습니다. 언젠가 이 주제로 좀 더 정돈된 논문을 써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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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말해도 소용 없는 것’ 또는 의견에서의 불일치에 대해 질문이 있습니다. 최근 가다머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드워킨의 <정의론>을 읽고 있는데, 드워킨은 정적주의에 대해 강한 반감을 드러내며 ‘정의’, ‘좋음’ 등에 대한 의견의 불일치는 실재하며 우리는 이러한 가치적 어휘에 대해 더 올바른 사용을 결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펼치더군요. 드워킨은 로티를 직접 언급까지 하며 무엇이 옳은지 불확실한 것과 무엇이 옳은지 비결정적인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주장합니다. 여하튼 비트겐슈타인 또는 비트겐슈타인적 입장에서는 이런 의견에서의 불일치를 어떻게 평가하나요? 그리고 이런 문제에 대한 유석님의 생각은 어떠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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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예전에 드워킨의 『정의론』을 읽어보았지만, 저는 드워킨의 주장에 몇 가지 중요한 오해가 들어 있다고 생각해요. 특별히, 지금 제시하신 사안과 관련해서는 아주 결정적인 오해가 하나 있죠.

(1) '의견'에서의 일치와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

비트겐슈타인은 '정의'나 '좋음' 같은 주제들에 대해 사람들 사이의 의견 불일치가 있다는 사실을 결코 부정하지 않아요. 오히려 그런 불일치는 너무나 일상적이다 보니, 일상 언어에 주목하는 비트겐슈타인이 그런 불일치를 부정한다는 식의 설명 자체가 굉장히 어색하죠. 굳이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하는 '일치'라는 것이 있다면, 그런 일치는 '의견'에서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에요. 그 두 '일치' 개념 사이의 차이는 실제로도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해요.

[…] 사람들이 일치하는 것은 그들의 언어 속에서다. 이것은 의견에서의 일치가 아니라,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이다. (『탐구』, §241)

아주 쉽게 설명하자면, 무엇이 '정의'이고 무엇이 '좋음'인지에 대해 우리가 강아지와 토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시면 돼요. "멍멍!"이라는 소리는 우리에게 있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거든요. "정의에 대한 너의 견해는 틀렸다!"라든가 "나는 좋음에 대해 너와는 다른 의견을 지니고 있다!"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편의 주장을 어떻게든 의미 있는 '언어'로 이해해야 하죠. "멍멍"이라는 소리는 우리에게 애초에 그런 언어조차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토론의 대상 바깥에 있어요. 우리는 "멍멍"이라는 소리에 동의하지 못해서 그 소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멍멍"이라는 소리를 애초에 이해하지조차 못해서 그 소리를 무시해버리는 거죠.

그래서 상대편의 언어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우리가 그 상대편과 이미 공통된 지반 위에서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함의하고 있어요. 우리가 상대편의 의견에 대해 뚜렷한 평가를 내리기도 전에, 우리는 상대편의 의견을 유의미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행동적 특징을 갖추고 있다는 거죠. 이런 특징은 결코 '의견'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가 '사람'이라는 존재자인 이상 취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삶의 형식'인 거죠. 즉, 우리는 상대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기 위해서조차 상대편의 의견을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우리가 상대편의 의견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상대편과 공통된 '삶의 형식'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해요.

따라서 '의견'에서의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드워킨의 주장은 '삶의 형식'에서의 일치를 강조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의에 대한 아무런 비판도 되지 않아요. 비트겐슈타인도 의견에서의 불일치는 얼마든지 인정하니까요. 다만, 그러한 불일치조차도 우리가 상대방의 주장을 의미 있는 '언어'로 이해하는 상황에서만 생겨날 수 있다는 게 비트겐슈타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인 거죠. 결국, 드워킨은 일종의 허수아비를 때리고 있는 셈이에요.

게다가, 로티에 대한 드워킨의 비판도 굉장히 순진해요.

(2) 불확실한 것과 비결정적인 것

무엇이 옳은지가 '불확실하다'는 사실로부터 무엇이 옳은지가 '비결정적'이라는 사실이 도출되지 않는다는 드워킨의 주장은 가치에 대한 특정한 형이상학적 가정 위에 세워져 있어요. 바로 무엇이 옳은지는 우리 자신과 상관 없이 미리 결정되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할 뿐이라는 일종의 '가치 실재론' 혹은 '도덕 실재론'이죠.

그런데 문제는 바로 이 가치 실재론의 정당성 자체가 로티에게는 논쟁의 대상이라는 점이에요. 애초에 로티는 가치 실재론이 언어와 세계 사이의 '대응'이라는 의심스러운 전제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닌지를 지적하는 인물이니까요. 그래서 그는 가치 실재론이 결코 자명하거나 당연한 입장이 아니라고 비판하고자 하는데, 바로 이런 입장을 취하고 있는 로티에게 가치 실재론에 따른 구분을 내세우는 것은 전혀 통하지 않죠. 논란의 대상인 가치 실재론을 주장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위 '선결문제 해결의 오류'를 범하는 셈이니까요.

게다가, (위의 댓글에서 직접 언급하시지는 않으셨지만) 드워킨이 가치 실재론의 입장을 받아들인 상태에서 로티나 비트겐슈타인을 '회의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한다는 점 역시 정당하지 않아요. 로티나 비트겐슈타인은 회의주의를 명시적으로 공격하는 사람들인 데다, 그들의 논증은 '가치 실재론'과 '가치 반실재론' 중 어느 쪽을 지지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 아니니까요. 오히려 실재론과 반실재론 모두가 언어와 세계 사이의 대응이라는 잘못된 전제 위에서 세워진 사이비 입장들이라는 게 로티와 비트겐슈타인의 지적이거든요. 가치에 대한 이분법의 기저에 놓인 철학적 전제를 공격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인 것이지, 가치가 '존재한다/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문제에 개입하려는 것은 그들의 관심이 아닌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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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한 질문에 대한 간명한 답변 감사드립니다!

내용이 가물가물하기는 한데, 이관표 박사님이 관련된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다만 비트겐슈타인 연구자는 아니고 종교철학/철학적 신학 연구가셔서요, 비트겐슈타인학(!)의 입장에서 적절한 연구인지는 제가 확실히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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