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라 도시히코의 『허구세계의 존재론』에 대한 단상

(1) 미우라 도시히코가 쓴 『허구세계의 존재론』이라는 책을 읽어보고 있다. 문학작품이나 미술작품 등 소위 '허구'라고 불리는 대상과 관련하여 생겨나는 철학적 주제들을 '직접 지시 이론'이나 '가능세계 의미론'을 동원하여 다루고자 하는 내용이다. 가령,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아라곤의 몸 속에도 우리와 같은 허파가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어떠한 기준들이 도입되어야 하는지를 따지면서 데이비드 루이스의 양상 실재론을 끌어들이는 식이다.

(2) 솔직히 나는 이런 논의가 쓸데 없이 치밀한 '사이비 문제'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아라곤에게도 우리와 같은 허파가 있지 않을까?"라는 물음이 도대체 어떠한 방식의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지부터가 매우 불분명하다. 가령, 질문자는 생물학적 관점에서의 검증 가능성을 기대한 것인가, 작품 속 설정으로부터의 추론 가능성을 기대한 것인가, 작가의 머릿속 의도를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대한 것인가, 작품 속 허파의 실재를 특정한 가능세계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기대한 것인가? 이런 식의 물음에 대해서는 '예/아니오'라는 형태의 대답을 제시하려는 시도가 애초에 무의미하다. 또한 대답의 조건을 하나하나 따지는 것조차 일종의 사고력 낭비가 되고 만다.

(3) 그러나 아무리 사이비 문제 같아 보여도 철학의 영역에 남아 있기 위해서는 이런 주제를 계속 공부할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가 엉터리라는 사실을 지적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문제를 다루는 철학자들의 글을 열심히 읽을 수밖에 없다. 특히, 이 책이 주로 인용하고 있는 데이비드 루이스는 20세기 후반의 영미권 철학계에서 가장 중요하게 평가받는 철학자 중 하나이다. (나는 얼마 전에 2019년 기준 스탠포드 철학 백과의 참고문헌 목록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철학자로 콰인, 크립키, 퍼트남, 데이비슨을 제치고 루이스가 1위를 한 것을 보고 상당히 놀랐다.) 루이스로 대표되는 분석적 형이상학의 지배적 경향이 이런 문제를 심각한 존재론적 주제로 다루고 있는 이상, 그 문제가 사실 심각하지 않다고 지적하기 위해서라도 그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어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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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저는 동 저자가 쓴 『가능세계의 철학』이라는 책을 맛만 봤었는데요, 『허구세계의 존재론』이 대강 그런 내용이었나 보네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아라곤의 몸 속에도 우리와 같은 허파가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어떤 기준들이 도입되어야 하는지를 따지면서 데이비드 루이스의 양상실재론을 끌어들이는 식이다.

이러한 문제제기가 문자 그대로라면 저 또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데 동의합니다. 한낱 청담에 지나지 않을 것 같은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령 데이빗 루이스의 논문 제목처럼 "Truth in Fiction"과 같은 주제는 더 넓은 언어철학적 차원에서 해명할 필요는 있는 것 같습니다. 가령 우리가 "셜록홈즈는 221B 베이커 가에 산다."라는 말을 참인 진술로 할 때 그것이 어떻게 참이될 수 있는가와 같은 문제가 그런 것일 겁니다.
그리고 사견으로,

루이스로 대표되는 분석적 형이상학의 지배적 경향이 이런 문제를 심각한 존재론적 주제로 다루고 있는 이상,

이라 말씀하신 부분은 제가 아는 바와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물론 데이빗 루이스가 20세기 후반 분석철학의 leading philosopher이긴 하지만 그의 양상실재론은 비판을 많이 받는 논제이고 실제로도 주류라고 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히려 크립키나 스톨네이커, 플란팅가 같은 가능세계 해석이 주류가 아닐까 싶습니다. SEP 인용수에서 루이스가 압도적인 것은 양상 형이상학 뿐만 아니라 의미론, 화용론(전제와 맥락), 맥락주의 지식론, 심리철학에서의 인과적 기능주의, 인과(반사실적 조건문 해석) 등 20세기 철학에서 등장한 주제들에 깊게 관련되어 있는 논문이 상당히 많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양상에 관한 형이상학적 주제를 다루는 것과 별개로 미우라 도시히코의 책에서 언급되는 다소 필요없어 보이는 논제에 대해 부담을 느끼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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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바로는 허구적 대상의 문제는 라쿤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셜록홈즈가 221B 베이커 가에 산다.' 같은 진술이 참으로 보인다는 점, 그리고 '셜록홈즈'가 고유명으로 보인다는 점 때문에 주로 논의되는 것 같았습니다. (고유명이라면 지시체를 가져야 할 테니까요.) 개인적으로 저런 표현은 고유명으로 취급되면 안 되지 않나 생각되는데, 허구적 대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렇다면 저 표현을 무엇으로 볼 것이냐? 하는 물음에 대한 답들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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