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강 평행론과 정신의 본질
제1장 스피노자의 데카르트 비판
1. 데카르트와 이원론의 유산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철학의 혁명적 면모를 수용하면서도 데카르트가 미완으로 남겨둔 과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는데, 이 과제 중 가장 주된 것은 정신과 신체의 관계라는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중세 철학에 이르기까지 자연 속의 개별 사물 즉 실체는 형상과 질료의 결합으로 이해되었다. 여기서 형상을 이루는 것은 영혼이다. 이때 영혼은 인간의 정신보다 넓은 의미로, 즉 식물적 영혼(생성과 성장의 원리), 동물적 영혼(감각과 운동의 원리), 인간적 영혼(지각과 인식의 원리)의 뜻을 지닌다. 이렇게 자연 사물들은 항상 영혼이 결합된 복합체로 이해되었다.
반면 데카르트는 물질을 영혼으로부터 엄격하게 분리함으로써, 물질에 대한 탐구와 영혼에 대한 탐구 각각을 보다 정확히 수행할 기초를 마련하고자 했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물질은 연장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영혼은 (인식뿐만 아니라 의지, 욕망 등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 사유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서로 구별된다. 양자 중에서 영혼이 본질적인 것의 지위를 점하며, 이에 따라 인간의 본질 역시 사유하는 사물(res cogitans)인 까닭에 신체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데카르트가 보기에 자연이 완전히 수학적, 기하학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면, 자연 사물들을 운동시키는 원인인 힘은 자연 안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에서 자연 사물들은 외부 원인에 의해 운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 안에는 자유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며, 이처럼 인간의 자유를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데카르트는 사유와 연장을 엄격히 구별하고 인간의 본질을 사유에 두었다.
그러나 이때 정신과 물질이 결합된다는 점을 설명하는 일이 난제로 발생한다. 이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데카르트의 『정념론』은 두뇌의 송과선을 통해 정신과 물질이 상호작용한다는 설명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는 정신과 신체가 이원론적으로 엄격히 구별된다는 생각과 상충하는 듯 보인다. 이와 반대로,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가 상호작용한다는 데카르트의 해결책을 거부함으로써 심신문제의 해결을 모색한다.
2. 데카르트 비판의 논점
스피노자가 데카르트를 비판하는 논점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정신과 신체를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두 개의 독립적 실체가 아니다. 둘째, 정신과 신체는 상호작용하지 않으며, 더구나 송과선과 같은 기묘한 기관을 통해 매개되지도 않는다. 셋째,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정신의 능동성/수동성과 신체의 능동성/수동성을 반비례하게 만드는데, 이는 정서의 (비의지적) 본성을 설명하는 데 문제가 된다.
이제 스피노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첫째, 스피노자는 어떻게 정신과 신체라는 서로 이질적인 요소가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둘째, 정신과 신체가 동일하다면, 정신은 어떻게 물질과 구별되어 고유성을 지닐 수 있는가? 앞서 논의했듯 데카르트는 물질적 사물을 완전히 수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으나, 그럴 경우 물질에 자유가 들어설 여지가 없어지므로 인간에게 자유의지의 가능성을 부여하기 위해 정신과 물질을 엄격히 구별하고 인간의 본질을 사유에서 찾았다. 반면 스피노자는 자연을 수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데카르트와 근대 과학의 기획을 공유하면서도 정신과 신체가 하나의 통일체를 표현하는 두 가지 방식이라고 봤다. 이에 따라 정신 역시 신체와 동일한 인과관계 속에서 규정되며, 이를 ‘정신적 자동장치’(automa spirituale)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신이 기계와 같은 자동장치라면, 이것을 왜 정신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셋째, 정신을 물질로부터 존재론적으로 구별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를 설명하려고 했던 데카르트와 달리, 스피노자는 이러한 자유의지를 전제하지 않은 채 인간이 왜 자유로운지를 설명해야 한다.
제2장 평행론이란 무엇인가?
1. 평행론의 정의
위 세 가지 문제에 대한 스피노자의 해결책은 흔히 ‘평행론’(parallelism)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사실 이 용어는 스피노자 자신의 용어가 아닌 라이프니츠의 용어이기 때문에, 이 명칭을 스피노자의 입장을 기술하기 위해 사용하는 일이 적절한지 아닌지는 논쟁거리이다. 그럼에도 그 명칭이 가져다주는 오해의 소지를 걷어내고 스피노자의 입장을 잘 이해한다면, 평행론은 스피노자의 형이상학, 인간학, 윤리학의 특성을 잘 부각시켜주는 입장이다.
기본적으로 평행론은 속성들이 상호작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은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따라서 각 속성에 속해 있는 양태들 역시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 정신적인 것은 정신적인 것끼리, 물질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끼리만 상호작용한다. 스피노자의 말로 한다면, 유한양태는 “자신의 유 안에서 유한”하며, 이는 모든 유한양태가 “동일한 본성의 다른 실재에 의해 한정될 수 있는 실재”(E1d2)임을 뜻한다.
그런데 속성들 간의 일체의 상호작용도 없이 각 속성이 평행하게 존재할 뿐이라면, 이 속성들은 서로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는가? 만일 그렇다면 이 속성들이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스피노자에 의하면, 속성들은 각기 자립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동일한 실체를 구성하며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관념들의 질서와 연관은 실재들의 질서와 연관과 같은 것이다”(E2p7). 사유 속성과 연장 속성은 실체가 갖고 있는 우유적인 많은 성질 중 하나가 아니라 실체를 실체이게끔 하는 것이며, 실체 자신과 결코 다르지 않다. 하나의 동일한 실체가 때로는 사유하는 실체로, 때로는 연장된 실체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유와 연장 역시 서로 간섭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는 하나의 동일한 질서이다. 예컨대 정신적 인과관계에 대해 고찰할 때, 우리는 동시에 물질적 인과관계의 형식으로도 나타나는 자연 전체의 질서에 대해 고찰하고 있는 셈이다.
2. 정신의 본성
사유와 연장이 동일한 질서가 지니는 두 측면이기 때문에, 스피노자에 의하면 “인간 정신을 구성하는 관념의 대상은 […] 연장의 어떤 양태”이다(E2p13). 그런데 여기서 “관념”은 “정신이 사고하는 실재이기 때문에 형성하는 정신의 개념”인데, 개념이란 “정신의 활동을 표현하는 것”이다(E2d3). 그러므로 스피노자가 말하는 관념이란 표상, 실재에 대한 모상이 아니라 능동적인 성격을 지닌 활동이다. 관념은 활동성인 정신이 형성하는 개념이며, 나아가 하나의 사물로서 그 스스로 원인이 되어 다른 관념들을 자기의 결과로 생산한다.
스피노자는 관념이 스스로 원인으로서 결과를 산출할 수 있는 실재라고 보고, 정신이 바로 이러한 관념으로 구성된다고 말한다. 정신이 관념을 떠받치는 기체(substratum)가 아니라 관념에 의해 구성된다는 생각, 정신이 하나의 관념이라는 발상은 종래의 철학사에 정면으로 반하는 입장이며, 라이프니츠 등의 반발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처럼 관념이 스스로 하나의 원인이며, 정신이 관념의 통합체로서 다른 관념들을 그 결과로 산출한다는 점이야말로 스피노자가 정신을 ‘정신적 자동장치’라고 규정하는 이유이다.
스피노자는 정신을 관념으로 규정하므로, 정신과 신체의 관계는 관념과 그 대상의 관계이다. (그리고 양자의 통일체는 바로 인간이다.) 신체가 관념의 대상이라는 진술은, 정확히는 인간 신체의 변용(affectio)을 통해서만 정신적 지각 작용이 가능하다는 점을 의미한다. 이후에 보다 상세히 설명되겠지만, 스피노자에 의하면 정신은 물체가 인간 신체에 가한 변용에 의해 산출된 이미지에 대해서 관념을 형성하며, 이로써만 지각이 시작된다. 이는 신체에 대해서뿐만이 아니라 정신이 정신 자신을 인식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정신은 자기의 자신을 직접 인식하지 못하고, 오직 신체의 변용을 통해 형성되는 이미지를 통해서만 자기를 인식한다.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가 하나의 동일한 개체를 이루고 있으며 이 통일체가 바로 인간이라고 말한다. 정신과 신체는 데카르트에서처럼 실재적으로 구별되는 별개의 실체라기보다는, 인간이라는 통일체를 표현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 인간이라는 통일체는 하나의 동일한 인과 질서와 연관이며, 이러한 질서와 연관이 사유 속성 아래서는 정신으로 표현되고 연장 속성 아래서는 신체로 표현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진태원, 2022, 134, 원저자 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