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태원,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 제2강 요약

진태원 (2022). 『스피노자 윤리학 수업』. 그린비. 39-72.

제2강 실체, 속성, 양태: 스피노자의 존재론

제1장 스피노자의 우주

1. 스피노자의 신: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이다.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자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로 구성된 실체이다. 실체의 각 속성은 실체의 본질을 표현한다.

여기서 신이 무한하다는 말의 뜻이 정확히 해명되어야 한다. 신은 절대적으로 무한한 반면, 속성은 자신의 유 안에서 무한하다. 예컨대 실체의 속성 중 하나인 사유는 무한하기는 하지만, 연장을 비롯한 다른 속성들에 대해서는 전혀 작용력을 지니지 않는다. 한편 실체는 자신의 유 안에서만 무한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무한한 까닭에, 각기 자기 안에서 무한하며 무한히 많이 존재하는 속성을 자기 내에 통일적으로 지닌다.

2. 비인격적 존재자로서의 신

스피노자의 신은 창조주가 아니다. 왜냐하면 영원은 시작과 끝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모든 것의 존재에 이유가 있듯 모든 것의 부재에도 (그것이 존재하는 일을 방해하는) 이유가 있다. 그런데 절대적 무란 이러한 특정한 이유를 갖지 않는 무이다. 그러므로 절대적 무는 불가능하고, 무로부터의 창조 역시 불가능하다.

스피노자의 신은 구원자가 아니다. “신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신과 인간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인데, 이러한 관계는 스피노자에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무한한 존재자와 유한한 존재자는 서로 관계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무한자는 무한자와만, 유한자는 유한자와만 관계 맺을 수 있다.

스피노자의 신은 인격신이 아니다. 의지나 정서는 유한한 존재자인 인간만이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인격신의 관념은 인간이 어떤 강력하고 자비로운 존재자를 허구적으로 상상함으로써 얻어진 산물이다.

3. 자기 원인

스피노자의 신은 자연이다. 다시 말해 신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총체성, 즉 세계이다.

이 점에서 자기원인 개념이 중요하다. 신의 본질은 신의 실존을 함축한다. 즉 신은 실존하는 것으로밖에는 생각될 수가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은 자기원인이다. 신이 존재하는 원인은 신 자신 외에 다름 아니다.

신이 자기원인이라는 스피노자의 주장은, 첫째로 신이 자연, 세계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함축한다. 데카르트에서 신은 세계를 초월해 있으면서 자연 내의 사물들이 운동하는 원인이 되는 인과적 힘이다. 다르게 말하면, 데카르트는 세계를 수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인과적 힘을 박탈한 채 자연을 수동적인 것으로 간주했으며, 세계의 운동 원인을 세계 밖의 신에 할당했다. 반면 스피노자는 세계를 수학적으로 설명하려는 데카르트의 기획에 찬성하면서도 데카르트에 반하여 자연이 스스로에 의해 운동할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이유에서 스피노자는 신이 즉 자연이라고 주장한다.

둘째, 헤겔을 비롯한 독일 관념론자들이 스피노자의 철학을 부동의, 정적인 철학으로 간주했던 것과 달리, 스피노자의 자연은 스스로 운동하는 역동적인 자연이다.

제2장 실체란 무엇인가?

1. 실체는 단 하나만 존재한다

스피노자에서는 오직 단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하며, 그 실체란 신 즉 자연이다. 철학사에서 실체는 기본적으로 다른 것들에 의존하지 않는 것을 일컫는 개념인데,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이 실체는 기본적으로 개별자로 간주되었다. 한편 데카르트는 무한실체와 유한실체의 구별을 도입했는데, 전자는 진정으로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실체(즉 신), 후자는 신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한적인 의미의 실체이다.

2. 실체와 양태

스피노자에 의하면 실체는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 인식되는 것인 반면, 양태 혹은 변용은 다른 것 안에 있고 다른 것에 의해 인식되는 것이다. 요컨대 실체는 자립적인 것, 자기원인이라면 양태는 의존적인 것, 타자원인이다.

스피노자에서 양태란 세계 속에 있는 (정신적 및 연장적) 사물을 의미한다. 양태는 실체의 자기변화를 통해 생성된 산물이며, 실체는 이 양태들을 생산하는 원인이다.

3. 실체와 속성

1) 실체의 정의

실체가 양태들을 생산하는 방식은 임의적이지 않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스피노자가 속성을 어떻게 정의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속성이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성이 지각하는 것이다.

x는 속성이다=df.지성은 x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한다.

스피노자는 왜 단순히 “속성이란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여기서 뜻해진 지성은 실체의 무한한 지성이고, 스피노자에 의하면 “무한 지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하는 것은 모두 하나의 유일한 실체에 속”한다(진태원, 2022, 60; 재인용). 그러므로 속성은 실체의 객관적 본질을 구성한다고 지각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러하다.

앞서 말했듯 속성은 자기 안에서 무한하다. 다시 말해 속성은 다른 무엇에 의해서도 제약되지 않는 자존적인 것이다. 덧붙이자면 신은 무한수의 속성을 갖고 있지만, 인간은 사유와 연장의 각각 유한한 양태인 정신과 신체로 구성되어 있는 까닭에 신의 속성들 중 이 두 가지 속성만을 인식할 수 있다.

2) 실체의 통일성과 속성들의 다수성

속성들이 각기 자존적이고 자기 내에서 무한하다면, 이 속성들은 어떻게 각기 다른 실체가 아닌 하나의 동일한 실체에 속하는가? 어떻게 다수의 무한하고 자존적인 속성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실체가 단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스피노자에 의하면, 속성들이 실재적으로 구별된다는 점으로부터, 이 속성들이 상이한 실체에 속한다는 결론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 원래 스콜라 철학과 데카르트 철학에서 실재적 구별(distinctio realis)은 실체와 실체 사이에 성립하는 구별이지만, 스피노자에서 실재적 구별은 속성과 속성 사이에 성립하는 구별이다. x가 다른 것 없이 인식될 수 있을 때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x는 다른 것과 실재적으로 구별된다. 즉 속성들이 실재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은 속성들이 논리적으로 독립적임을 뜻한다.

한편 속성들은 상이한 실체에 속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실체는 본성상 자기의 속성을 스스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말하면, 상이한 속성들은 그 본성상 단일한 실체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여기에는 다시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속성들 간에는 시간적인 순서나 선후가 존재하지 않으며, 속성들은 실체의 본질을 동시에 함께 구성한다. 둘째, 속성들 간에는 논리적인 순서나 선후가 존재하지 않으며, 속성들은 논리적으로 동등한 지위를 지닌 채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 이는 마치 삼각형을 이루는 세 변이 시간적·논리적으로 선후 관계를 이루지 않고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하나의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

이처럼 실체는 속성에 앞서지 않고 속성과 더불어, 또 속성을 통해 구성된다는 점에서 관계적인 존재자이다.

3) 신의 속성으로서의 연장

그러므로 연장 역시 다른 속성들과 동등하게 신의 본질을 구성한다. 다르게 말하면, 신은 물질적인 존재자이다. “물질은 신의 본질에 속하는 것”(진태원, 2022, 70)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데카르트는 자연을 수학의 대상으로 규정하기 위해 사물을 연장적인 것으로 정의함과 더불어 사물들 간의 인과관계를 박탈하고 인과적 힘을 신에 귀속시켰다. 그 결과 데카르트에서 물질은 신보다 존재론적으로 하위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반면 스피노자의 자연은 데카르트에서와 달리 외재적 원인 없이는 운동하지 못하는 무력한 세계나 사유에 비해 하위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신의 본질로서 신적인 힘을 가지고 사물들을 생산하는 세계이다.

스피노자는 연장에 내재적 힘을 부여함으로써 물질적 양태들은 그 스스로 인과적인 힘을 갖게 된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사연, 실체와 양태 사이의 관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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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특히 실체와 속성을 읽으면서 생각할 거리가 생겼네요.

다만 조금 말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이 부분입니다. 왜냐면 변용은 다음과 같이 정의되고:

By attribute, I mean that which the intellect perceives as constituting the essence of substance (E1d4).

여기서 변용이 물체의 객관적인 본질을 구성하는지에 대해서는 스피노자가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죠. 아마 변용이 물체의 객관적인 본질을 구성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이유는

이것으로 보입니다. 이 전제가 맞다면, 연장이 속성이라고 말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전 이 전제가 biconditional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속성이라면 지성이 지각하겠지만, 반대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전제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만, 적어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스피노자의 변용을 이해하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고, 그 중 한 가지가 변용이 신의 객관적인 본질을 말해준다는 해석입니다. 하지만 변용이 신의 주관적인 본질만 말해준다는 해석도 있고 (이 해석도 나름 매력적입니다. 위 정의에서 스피노자가 말한 것을 좀 더 엄밀히 따지는 것이죠. 독일철학에서 변용을 주관적으로 읽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주관적/객관적 구분을 적용할 수 없는 해석 (!) 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Lin이라는 사람이 대표적입니다. 프레게의 morning star/evening star처럼 주관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다는 것이죠.). 물론 객관적 리딩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만 (전 아직 변용에 있어서 제 리딩을 발전시킬 정도로 생각을 안 해봤습니다), 독일철학에도 관심이 있으시니, 좀 끄적여보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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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서 여러 해석이 갈린다는 점이 흥미롭네요. 사실 책의 해당 부분에서는 속성의 정의에 굳이 "지성이 지각한다"는 서술이 들어가 있는 이유에 대해 몇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고 말하더군요. (1) 인간 지성에게만 속성이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듯 보일 뿐, 속성이 객관적으로도 그러한지는 알 수 없다. (2) 속성이 객관적으로 실체의 본질을 구성한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니 그 외에도 적어도 Lin과 같은 한 가지 이해방식이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읽은 텍스트에서는 다음을 전거로 들면서 (2)가 더 일관적이라고 말하더라고요.

[...] whatever can be perceived by an infinite intellect as constituting an essence of substance pertains to one substance only, and consequently that the thinking substance and the extended substance are one and the same substance [...] (E2p7s)

여기서 연구자들 사이에 견해가 갈린다는 말은 없길래 "그냥 편의상 이해를 돕기 위해 저자가 설명을 이렇게 했나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이게 사실 해석적 쟁점이었군요. 아무래도 지금 읽는 책이 강의록이다 보니, 본격적으로 여러 연구자들을 직접 언급하면서 논의를 진행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여하간 속성의 정의와 관련해서 여러 해석들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은 제가 스피노자를 잘 몰라서 아직 다른 해석들을 살펴볼 여력이 되지 않지만, 나중에 기초가 쌓이면 이 구절에 관해 어떤 해석들이 있는가도 살펴보고 싶네요. 특히 이 점이 독일고전철학의 스피노자 이해와 연관된다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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