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 로티, 그리고 그 이후: 하버마스-로티 논쟁 평가하기(5)

2023년 12월 5일, 서강올빼미
하버마스, 로티, 그리고 그 이후: 하버마스-로티 논쟁 평가하기(5)

00:00-13:08 논문에 대한 발제
13:08-59:15 질의응답 및 토론

*질의응답 및 토론 부분에서 녹음 환경의 영향으로 인한 음성 노이즈가 있습니다.

발제

김도윤(sophisten)

논문

Anton A. van Niekerk, “The Rorty–Habermas Debate”, A Companion to Rorty, Alan Malachowski (ed.), Hoboken: Wiley, 2020, Chapter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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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티는 상대주의자인가?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저자는 상대주의라는 관점에서 로티 철학을 돌이켜본다. 저자에 따르면 로티는 상대주의라는 딱지에 대해 중대한 태도 변화를 겪었다.

1.1 초기 로티

초기부터 로티는 실재론·이성중심주의자들(realist, rationalist)로부터 상대주의라는 딱지(epithet)를 부여받았다. 그것에서 탈피하기 위해 상대주의와 자신 입장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힌다. 그에 따르면 통상 사람들이 다음의 세 입장을 모두 상대주의 철학이라고 부른다.

첫째, “모든 믿음은 다른 것들만큼 좋은 믿음이다(395).”

둘째, “참[진리]을 참으로 정초하는 많은 과정들이 존재하기에, 참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는 의미에서 모호한 용어이다(395).”

셋째, “주어진 공동체 내에서 운용되는 지속적/건전한 지식 습득 과정을 위한 친숙한 과정들에 대한 기술을 빼놓고는 참과 합리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395).”

로티는 셋 중에서 자신[프래그머티스트]은 세 번째의 것을 취한다고 밝힌다. 문제가 되는 세 번째 입장[프래그머티즘]을 좀 더 쉽게 밝히면 다음과 같다. 프래그머티스트에게 있어 “참과 합리성은 오직 그가 속한 그룹과의 연대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다(396).” 그들은 실재론자나 이성주의자들처럼 “객관적 지식은 모든 인간들이 취할 수 있는 이상적인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396).”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로티에 따르면 프래그머티즘에게 상대주의라는 딱지를 부여하는 것은 잘못됐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보다 상대적으로 이러하다”라는 긍정적 의미의 이론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396). 그들은 오직 ‘지식과 의견’, ‘잘 대응된 진리와 잘 정당화된 믿음’ 사이의 벽을 허물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는 의미에서 ‘부정적인 진리 이론’을 펼칠 뿐, 어떤 종류의 긍정적인 상대적 진리 이론을 펼치지 않는다.

한편, 로티의 입장이 변호되기 위해서는, 즉 “공동체의 효과적 기능을 위해서는 많은 대상에 대한 합의와 참과 거짓의 구별이 요구된다(397).” 그러나 이를 위해서 형이상학적 혹은 인식론적인 기초가 필수적으로 요구되지는 않는다. 보편적 진리 혹은 대문자 참(Truth) 없이 윤리적 기초를 통해서도 충분히 인간들의 협력[연대]을 끌어낼 수 있다. 바로 이렇게 무언가를 참 또는 거짓으로 확고히 나눠줄 수 있는 표준으로 잴 수 있는 무언가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상대주의와 비슷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2 후기 로티

후기에 들어 로티는 상대주의를 네 가지로 재정의한다. 그중 하나로 “우리의 일시적인 욕구와 이해의 덧없는 산물을 판단해주는 하나의 기준이 되는 불변하는 무언가를 찾으려는” 플라톤적 철학 프로젝트와 진리 이론에 반대하는 자가 제시된다(397). 쉽게 말해, 토대주의, 진리 정합론, 참은 발견되거나 찾아진다고 주장하는 이론에 반대하는 자들은 상대주의자들에 속한다. 후기 로티가 바로 딱 상기에 설명한 부류에 속한다. 그에게 있어 진리는 만들어지는 것이고 발명되는 것이다.

이때 거짓말쟁이 역설의 문제처럼 로티 식의 진리 이론을 어떻게 정당화 혹은 토대 지을 것이냐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문제 제기는 여전히 플라톤적으로 고무된 철학관을 받아들일 때에야만 정당화된다. 로티가 문제 삼고 있는 바로 그 진리 이론에 근거해서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위 비판은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

다시 돌아가서, 이러한 맥락에서 로티 본인은 자기 자신을 ‘반-이원론자’라고 설명한다(398). 여기서 반-이원론자란 단순히 “이원론적 대립 전부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주체와 객체, 정초된 것과 만들어진 것,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 실재와 현상 등 전통-플라톤적 구분들의 타당성과 유용성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398).

위와 같은 진리 이론에 근거하여 로티는 이제 세계에 대한 이해의 과정을 반-플라톤적인 ‘다윈주의적 담론’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풀어서 말하자면, “직선적인 논증이 아닌 단계적인 설득”으로 철학의 관심을 옮겨야 한다는 것, 진리 주장(knowledge claim)은 오직 유용성(기능과 목적)의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398). 플라톤적인 세계 이해 방식이 예전에는 도움이 됐을지는 몰라도, 우리가 다룰 문제가 달라졌기에 그러한 방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한다. 우리는 이제 대상 X에 대한 어떤 기술이 X를 온전한 모습 그대로 반영하고 있냐고 질문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질문은 ‘경쟁하는 기술 중에서 무엇이 우리의 목적 성취에 더 유용할 것이냐?’이다.

2. 하버마스의 로티 비판

하버마스는 로티의 철학적 기획을 플라톤주의 ―‘신의 관점’과 이성/비이성의 이분법 등을 도입하는― 와 반-플라톤주의 사이의 변증법 과정 중 일부로 파악한다. 그런데 하버마스에 따르면 로티의 대응이 여타의 반플라톤주의자들과 다르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예를 들어, 데리다의 해체주의 전략은 형이상학 자체에 의해 주어지는 형이상학 비판을 통해, 철학 내에 오롯이 머무르면서 플라톤주의를 극복하려고 시도했다. 다른 방식인 동화주의 전략은 자신의 지평을 적(혹은 전통)에 대항하여 넓히는 데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방식으로 극복을 시도한다.

로티의 경우, 위 두 전략과 달리 플라톤주의와 반-플라톤주의의 대립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즉 둘 간의 대립이 허구라고 폭로하며 대립에서 빠져나오는 전략을 취한다. 이런 의미에서 로티의 전략은 플라톤 전통 내에 머무르면서(within)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어휘의 명령을 통하여 그 대립을 끝내버리는 방식이라 이해되야 한다

한편, 하버마스는 리오타르를 비롯한 많은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가에게 비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로티도 수행적 모순(performative contradiction)을 겪고 있다고 비판한다. 리오타르의 경우 하버마스의 이론에 대항하여 자신만의 언어 게임 이론을 제시했는데, 그가 이론을 제시한 이상 그것이 받아들여져야 하는 이유(in an argumentative manner, that is, providing reasons for what he is saying)를 논쟁적으로 제시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자기 모순적이라고 지적받았다. 리오타르에게 가해진 것과 똑같은 방식의 비판이 로티에게 적용될 수 있다. “하버마스와 우리가 형이상학적·플라톤주의적 주장에 아직도 목매고 있다고

주장하는 로티는 자신 입장을 우리에게 어떻게 확신시켜 줄 수 있는가(401)?” 하버마스에 따르면 로티는 ‘새로운 어휘(new vocabulary)’와 같은 ‘순전히 레토릭적인 장치(mere rhetorical devices)’ 따위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로티의 이론은 별로 새롭지도 않고 기능적으로 잘 작동하지도 않는다. 만일 그의 이론이 ‘다윈주의’라는 과학에 의존하고 있다는 식으로 반론을 제기한다면, 여전히 해당 과학 이론을 왜 받아들여야만 하는지 타당성 주장을 상환해야만 즉, 정당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이에 더해, 하버마스는 새로운 어휘를 개발하는 데 중점을 두는 로티의 기획에 대해 세 가지 강력한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첫째, 로티는 반-플라톤적인 담론 즉, 새로운 어휘가 추가적인 정당화를 거칠 필요가 없고 그것이 사람들이 좋은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받아들일 만하다고 주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플라톤주의가 수 천 년 동안 우리 세계를 지배했고 그것이 대부분의 삶 속에서 잘 작동하고 있다면 도대체 왜 반-플라톤적인 방식의 삶을 따라야만 하는가?

둘째, 로티는 ‘X는 참이다(X is true)’와 ‘X is justifiably held to be true(X는 참으로 여겨질 좋은 이유가 있다; X는 정당하게 참으로 여겨질 수 있다)’ 사이의 구분을 없애며 참 “보증된 주장 가능성(warranted assertability)”이라고 주장한다(402). 이러한 진리 이론에 따르면 참된 주장을 정당화하는 비-순환적 방식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지금 여기’의 언어 공동체 내에서만 주장은 정당화되어 참(truth)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하버마스의 이론적 작업에 따르면, 로티의 주장과 달리 우리는 어떠한 경우라도 주장에 대한 “이상화 과정(idealization)”을 거쳐야만 한다(403). 곧, ‘지금 여기’를 벗어난 “이상화된 공중(ideal public)”을 전제해야만 우리는 주장의 타당성을 보장할 수 있다(403).

셋째, 로티는 인식론적 이유가 아닌 유용성을 매개로 우리가 어떤 것을 참이라고 여기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러나 로티의 주장과 달리 우리는 어떤 명제가 다른 진리 주장 또는 실제 사실과 잘 부합하기 때문에 참이라고 여기는 듯하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로티의 주장은 언어의 ‘세계 개현(world disclosure) 기능’과 ‘내적인 학습 과정(innerwordly learning process)’ 사이의 상호작용을 놓치고 있기에 개진된 것이다(403).

3. 저자의 로티 비판

저자는 사실상 하버마스-로티 논쟁에서 하버마스의 손을 들어준다. 그가 보기에는 하버마스의 평가대로 로티의 전략은 사회-다윈주의의 재단장한 버전일 뿐이고, 수행적으로 자기모순이라는 비판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더해 저자는 두 가지 추가적인 이유를 통해서도 로티를 비판한다.

첫째, 로티는 가다머의 입을 빌려 자신 입장을 전개한다. “자연 과학이 비역사적인 의미에서 타당하다는 생각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가다머의 도움을 받는 것은 정당하다(405). 하지만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둘 다 역사적으로 위치지어진다는 사실 때문에 지적 탐구의 목표·목적인 지식과 진리가 단순히 포기되어야만 한다”는 주장은 가다머의 입장을 오용한 것이다(405). 가다머는 단지 자연과학이 여타의 과학보다 우위에 있지 않다는 점을 짚고 싶었던 것뿐이다.

둘째, 로티는 자신의 주장이 함축하는 바에 대해 세심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모든 지식의 목적을 유용성의 차원에서 바라보는 로티의 입장을 받아들일 경우, 인종차별에 관한 지식이 문제가 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유용하다는 것인가? 이렇게 로티의 입장은 윤리적 문제를 발생시킨다. 이에 더해, 저자는 이상화 과정을 상정하는 하버마스의 입장이 옳다고 여기는데, 그것을 없애려는 로티의 입장을 따르면 규제적 이념의 역할을 할 무언가가 없어지기에 국제적인 도덕 질서 수립이 불가능하다. 결과적으로, 후사인과 같은 폭군의 행위를 규제할 국제법이나 위원회 등을 만들지 못하게 된다. 로티의 전체적인 지적 성향은 지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빈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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