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네이글과 알베르카뮈의 부조리에대한질문

최성효교수님의 <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를 읽고 질문드립니다.

토마스네이글은 인생에 대한 관점을 '주관적 관점'과 '객관적 관점' 으로 나누는데요

우리 인생의 개별적 행위들은 주관적 관점으로 보면 정당화가 되지만

객관적 관점으로 보면 (영원의 관점이라고 칭하기도합니다.) 정당화가 되지않는다고합니다.

밥을먹는행위를 예시로 든다면

주관적 관점으로 보면 이는 자기자신의 배고픔을 해소하고 살아가는데에 근거가있기때문에 정당화가 됩니다.

그러나 객관적 관점으로본다면 이는 '왜 배고픔을 해소하며 살아가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또 만들어냅니다.

그 질문에 어떠한 대답을 한다면 또 그질문은 '왜 그래야하는가'라는 질문을 만들며 끝없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객관적 관점으로 본다면 인생의 모든 개별행위들은 정당화될수없고 이유도없기에 부조리하다고 말합니다.

저는여기서 의문이생깁니다.

  1. 밥을먹고 생을이어가는것은 일종의 당위라고 생각할수도있는데 객관적 관점이라고 불리우는 관점에게는 이런 당위가 전혀 납득되지않는것인가

  2. 만약 이런 당위가 납득되지않는 존재라면 그러한 존재로하여금 납득시키게 만드는것은 의미가있는가

  3. 또 토마스네이글 교수님 또한 인간에 불과한데 '객관적 관점', 또는 '영원의 관점', '우주적 관점'으로 인생을바라보는것은 가능해보이는가?

이러한 의문이생겼습니다.

글읽어주셔서감사합니다

답변해주시면 감사히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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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비록 최성호 교수님의 글을 읽어 보지 못했고, 또 네이글에 대해서도 잘 아는 바가 없으나 간단하게 생각을 정리해보았습니다.

(1) 우선 ‘당위(ought)’는 일종의 ‘의무’라고 이해해볼 수 있을 겁니다. 인식적 정당화를 규범적 개념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인식적으로 정당화된 어떤 A에 대해 “A를 믿어야만(ought to believe A)”합니다. 그렇다면 만약 ‘밥을 먹고’, ‘생을 이어가는 것’이 일종의 당위(의무)라면, 이는 곧 어떤 생물에 대해 그 생물은 밥을 먹어야만 하고, 생을 이어나가야만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겁니다.

물론 주관적 관점에서 밥을 먹거나 생을 이어나가는 것은 의무에 가까울 정도로 당연한 일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아마도 네이글도 인생의 개별적 행위들이 주체의 주관적 관점에서 정당화가 가능하다고 하는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러나 객관적 관점에서는 개별 생물들이 밥을 먹을 당위(의무)와 생을 이어가야 하는 당위(의무)를 가져야만 하는지가 불명확할 수 있습니다.

가령 슬픈 일이지만, 수많은 인간들 중 한 명인 저는 객관적(혹은 우주적) 관점에 밥을 반드시 먹어야 하거나, 반드시 살아가야 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저의 개인적 정당화의 수준에서는 제가 살아야만 하는 많은 이유를 들며 주관적 정당화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라는 주관을 벗어나 객관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저’의 존재는 반드시 살아야만 하는 의무를 갖진 않는 것 같습니다. ‘당위(의무)’라는 것은 규범적 개념입니다. 즉 의무로서 주어진 것을 행하지 않으면 외부적으로 처벌 받거나 비난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밥을 먹지 않거나, 생을 이어가지 않기로 결정해도 객관적(우주적) 관점에서는 저에게 그 어떤 처벌이나 비난도 없을 것입니다(여기서 저의 부모님이나 사회가 저를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객관성보다 낮은 상호주관적 관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네이글이 ‘영원의 관점’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면 이러한 직관은 더욱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제가 밥을 먹지 않아도, 저의 당위 위반을 처벌할 그 어떤 우주적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결론적으로 객관적 관점에서 개인의 생존의지와 같은 것은 어떠한 중요한 ‘당위(의무)’도 갖지 않아 보입니다. 적어도 객관적 관점에서 생물이 살고자 하는 것은 ‘주관적 의지’이지 ‘객관적 의무’가 아닐 것입니다.

(2) 질문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생존의지와 같은 것을 의무로 승인하지 않는 객관적 관점을 지닌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에게 생존의지의 당위성을 납득시키는 것이 의미가 있는 일인지에 대한 질문을 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는 최성호 교수님의 글이나 네이글을 읽어보지 않아 여쭤보길, 네이글이 그러한 객관적 관점을 가진 존재가 있다는 것에 커미트먼트를 하는지요?

감히 예상컨대, 보통 객관적 관점과 그 정당화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객관적 관점으로 사고하는 존재를 상정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저는 네이글이 그러한 존재를 도입하고 납득의 가능성 여부를 고려하였다고 상상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별개로, 개인적으로 그러한 존재가 있더라도 그를 납득시켜야 하는 이유를 잘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3) 객관적 관점은 강한 상호주관적 관점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비근한 예시로, “지구는 둥글다”라는 명제를 믿고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가 둥글다는 것은 현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승인하는 명제입니다. 그러므로 “지구는 둥글다”는 상호주관적으로 참인 명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호주관적으로 참이라고 여겨지는 것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오류가능하다는 점입니다. 가령, 전 인류가 어떤 사악한 외계인에 의해 지구가 둥글다고 착각하도록 뇌를 개조당한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서운 음모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지구는 둥글다”라는 명제를 당당하게 믿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의 참을 지지하는 강력한 증거들은 만연하고, 그것을 부정하는 반대 증거들은 없거나 너무나도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는 둥글다”라는 믿음은 미래에 있을 모든 존재들까지 가정하더라도, 논파적 증거가 발견되지 않을 것으로 확신 가능한 명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구는 둥글다”라는 명제에 대해 객관적으로 참(혹은 객관적으로 참이라고 여김taking as true)인 지위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객관적 관점이란, 시간에 무관하게 불변하는 관점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영원한 관점입니다.

주로 중세 철학이나 스피노자의 저서에서 ‘sub specie aeternitatis’라는 표현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영원의 상 아래서’, ‘영원의 관점 아래서’ 라는 뜻으로, 아마도 네이글이 ‘영원의 관점’이라는 표현을 쓸 때 이러한 우주적 관점의 의미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네이글이 실제 어떤 입장에 있는지는 저는 알지 못합니다만, “지구는 둥글다”를 객관적 관점에서 우리 인류가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면, 적어도 인간이 객관적 관점에 아예 접근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 보입니다. 또한 1에서의 논의와 같이, 정당화의 관점에서 객관성은 문제없이 우리 인간들이 사용할 수 있는 개념으로 보이기 때문에 네이글에 입장에서는 큰 문제가 아닐 것 같습니다.

매우 단편적인 답변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질문에 부족한 글입니다.. 대신 저보다 이 논의에 대해 더 심도 있게 아시는 다른 분들께서 큰 도움 주실거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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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정말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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