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한 쉽고 간단하게 소개하는 『논리-철학 논고』의 근본 사상

『논고』의 근본 사상은 4.0312에서 드러납니다.

[4.0312] 명제의 가능성은 기호들이 대상들을 대표한다는 원리에 의거한다.
나의 근본 사상은, '논리 상항들'은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사실들의 논리는 대표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논고』의 근본 사상은

  • 논리 상항들은 대표하지 않는다.
  • 사실들의 논리는 대표될 수 없다.

입니다. 둘은 같은 내용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논리 상항이라고 하면, 우리는 ''~'(부정 기호), '&'(연언 기호), '∨'(선언 기호), '∀'(보편양화사), '∃'(존재양화사) 등을 떠올립니다. 물론 이것들은 논리 상항이 맞습니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의 근본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리 상항에 관해 지금 교과서적으로 정립된 것과는 조금 다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즉, 우리는 1910년대에 러셀이 논리 상항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러셀은 (여타 다른 문제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논리의 본성에 대해서 형이상학적 실재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러셀에게 명제란 형이상학적으로 실재하는 것입니다. 추론은 명제들 간의 관계인데, 그렇다면 추론 관계란 실재하는 것들 간의 관계이며, 이 관계 또한 형이상학적으로 실재하는 존재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논리학 역시 (여타 과학과 마찬가지로) 존재자들에 관한 탐구입니다. 단지 그 탐구 대상이 세계의 가장 보편적인 존재자일 뿐인 거죠. 그 보편적인 존재자가 바로 논리 상항이 포착하는 바입니다.

러셀은 논리 상항으로 크게 네 가지 종류의 것들을 제시합니다. (다만 각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전체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크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1. 존재론적 범주
  2. 원자명제 형식
  3. 진리함수
  4. 양화사

그런데 이때 어떤 논리 상항들이 존재하는지에 관하여 러셀은 어떻게 정당화를 할 수 있을까요? 러셀은 이에 대해 만족스런 답변을 찾지 못했습니다.

물론 논리에 관해서 정당화를 한다는 발상 자체가 이상한 거 아니냐?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논리는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저 위에서 논리 상항이랍시고 러셀이 제시한 것들은, 러셀의 유형 이론에 기반한 것입니다. 유형 이론은 누구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무튼 러셀에 따르면 유형 이론에 따른 논리 상항 존재자들이 세계에 실재한다고 합니다. 누구나 당연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닌데도 아무튼 존재한다고 주장하려면, 정당화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존재자가 논리적인 어떤 것이라면, 과학 이론마냥 문제해결력, 설명력, 재밌는 결과물 등등만으로 정당화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러셀이 도입하는 환원공리나 무한공리와 같은 것을 생각해 보아요. 이것이 논리학이 맞는지 무척 의심스럽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문제에 대해 답을 제시합니다. 바로, 논리 상항은 제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지는 예시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러셀에게 이항 관계는 논리 상항입니다. 그러니 다음과 같은 명제를 생각해 봅시다.

  • "'x가 y를 사랑한다'는 이항 관계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이 명제는 사이비 명제입니다. 이항 관계라는 것은, 문장이 기호화하는 방식에 따라 보여지는 것입니다. 'x가 y를 사랑한다'는 명제는 L(x, y) 또는 xLy 등등의 방식으로 기호화될 텐데, 이 기호화되는 방식에 따라 우리는 이항 관계를 곧바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는 이항 관계이다.' 등의 술어는, 아무런 내용이나 실체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술어는 아무것도 나타내는 바가 없고, 제거되어도 무관합니다.

또 다른 예시를 생각해 보죠.

  • "p 그리고 q"

우리가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연언 명제입니다. 여기서도 비트겐슈타인은 연언이 제거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위 명제를 아래와 같이 표기하면, 연언 기호는 필요가 없습니다.

p q
T T T
T F F
F T F
F F F

여기서 주의하셔야 할 점은, 이 진리표를 저 명제의 표기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 진리표는 (현대의 용도처럼) 추론 관계를 체크하기 위해 도입된 도구가 아니라, 명제의 표기법으로서 도입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p 그리고 q'라는 기호를, 위의 진리표대로 기호화할 수 있습니다. 가능한 진리치들 간의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표기함으로써, 우리는 연언 기호 없이도 해당 문장을 표기할 수 있습니다. 연언 기호는 일목요연한 표기법 상에 등장하지 않고, 그것이 나타낸다고 보였던 관계는 일목요연한 표기법 상에서는 그저 보여지는 것(복합명제의 단순명제들로부터의 진리함수 관계)일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연언이라는 논리 상항도 실은 아무것도 나타내는 바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러셀이 처한 문제 상황에 대한 답이 되는 것일까요?

임의의 명제에 등장하는 논리 상항이 언제든지 얼마든지 표기법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면, 논리 상항은 그 명제의 뜻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논리 상항은 아무것도 나타내는 바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논리 상항은 실재하는 존재자를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논리 상항이 나타내는 것 같았던 내용들은 사실, 제대로 된 기호법 하에서는 곧바로 보고 파악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러셀과 달리,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논리에 대한 정당화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이 무엇인지에 관해 러셀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됩니다. 러셀의 생각과는 달리, 비트겐슈타인에게 논리학은 학문이 아닙니다.

그럼 비트겐슈타인에게 논리 상항은 아무런 의미(지시체)가 없는 기호일까요? 놀랍게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비트겐슈타인에게도 논리 상항 기호들은 의미가 있습니다. 논리 상항의 의미는 그것의 구문론적 사용에서의 기능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디테일은 남겨둔 채로 이 글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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