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익과 무관한 혐오 기질의 발현

생물이란 [표준 국어 대사전]에 따르면 ‘생명을 가지고 스스로 생활 현상을 유지하여 나가는 물체. 영양ㆍ운동ㆍ생장ㆍ증식하며, 동물ㆍ식물ㆍ미생물로 나뉜다’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 논평 문에서는 동물, 그중에서도 주로 ‘포유류’에 대해 다룰 것이다.

우리는 어째서 ‘동물’에게 공감하고 감정을 느낄까? 만약 오랜 시간 동안 함께(사냥이나 다른 활동 등을 하면서 생긴 동료애) 생활하면서 생긴 동물과 인간 사이의 가족애동료애라면 이러한 감정은 분명히 자연적으로 발생했거나 기존에 존재하던 감정이 변형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만, 애완동물을 키운 경험이 없거나 혹은 키웠던 경험이 있는 같은 종류(ex·강아지를 길렀었기에 이에 대하여 자기 경험을 대입)가 아니라면, 동물의 특정한 모습(주로 우리가 애정을 느끼는 모습이나 행동, 안타까운 상황 등)을 본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해 무의식적인 애정을 느끼는 것은 의문스럽다고 할 수 있다. 비록 맹자의 사단(四端)에 대해 숙지하고 있는 바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가 애정에 크게 속하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동물을 본다고 하여 자연스럽게 애정을 느낀다는 사실 또한 의문스럽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은 동물, 특히 포유류에 속하는 동물이 많은 펭귄, 물개, 개 고양이, 토끼, 쥐 등을 보며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마치 자신이 그들이 된 것과 같은 공감의 형태를 한 유대를 표현하는데, 이의 예외에 속하는 다양한 동물로 추론할 수 있는 점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매력을 느끼는 동물에 한해서 보편적으로 인간의 공감이 동물에게 행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가 시사하는 점은 외모적행동적 요인, 즉 인간이 애틋함을 느낄 수 있는 요소가 있는 동물에 국한되어 인간은 다른 동물에게도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과 동물과의 유대감은 언제,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BBC’와 ‘Science’에 따르면 개나 고양이와 같은 동물의 사육은 최소 약 11000년에서 6000년 전쯤에 형성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즉, 개와 고양이, 가축과 같이 인간이 길들이고 사육한 바가 있는 동물의 경우 해당 종 자체에 대하여 그 지역의 문화권이나 협력의 경험으로 인하여 이러한 동물을 오래전부터 받아들이고 이와 함께하였던 조상의 경험(단, 경험이 유전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부분과 전체)과 관련하여 유대를 가질 가능성이 존재하지만, 인간이 근대에 접어들고 해외여행이나 교역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거나, 동물원 등이 만들어지게 된 근대에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거나, 혹은 접하였더라도 이를 직접적으로 경험하기가 어려운 동물의 경우(호랑이, 뱀과 같이 ‘원시 공포’에 해당하는 동물 등에 대해서도 유대를 느끼기도 한다) 이에 대한 유대 또한 의문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비록 인간이 매력을 느끼는 동물 전체와 개와 고양이 등 인간에게 친숙한 동물 간의 외적 생김새의 차이는 존재하겠지만 추정되는 바로는 이러한 동물의 공통점에 해당하는 털이나 사족 보행과 같은 요소에 의해 이러한 유대가 일부 발현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주로 매력을 느끼는 동물에 한하여 그러한 관심이나 감정의 정도가 큰 것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사람들이 혐오감을 느끼는 동물에는 주로 곤충이 있다. 해충의 경우 다양한 원인으로 인하여 인간이 이를 자체적으로 혐오하는 것은 경제적 측면에서도 당연하다고 여길 수 있지만, 이 중 인간에게 해가 되지 않는 곤충이나 익충의 경우, 이성적으로는 이를 좋게 받아들이는 것이 타당하지만, 특유의 생김새로 인하여 사람들은 이를 혐오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의문스러운 점은 다른 해충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생김새를 가진 익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여전히 혐오한다는 점이다. 이 곤충과 포유류(주로) 간의 간극은 ‘외모지상주의’ , 즉 인간이 매력을 느끼는 생김새와 그렇지 아니한 생김새가 이러한 인식에 작용하였다고 추정된다. 흥미로운 점은 포유류와의 원시 공포(호랑이나 곰 등의 행동에도 여전히 애정이나 매력을 느끼는 것)가 존재하지만 이에 대해 유대를 느끼는 것과는 달리 곤충에게서는 이가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질 수 있겠지만 이러한 현상이 불러오는 모순은 있다. 사견으로는, 생물의 가치는 본질적으로 생태계에 이로운 영향을 끼치는 정도와 연관이 깊다고 여기기에, 환경적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생태계에 해로운 영향을 덜 끼치거나 이에 대하여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곤충의 경우, 사람들이 외적으로 매력을 느끼는 동물보다 더욱 가치가 높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대다수의 자연보호단체나 동물보호를 표방하는 다양한 정책/인물의 경우 결국 생태계 자체에 끼치는 영향보다는 해당 동물의 외적 요소에 치중하여 이러한 동물에 한정하여 논의하고 멸종 여부에 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모순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인류 전체가 개선해야 하는 현실이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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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라는 감정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배리 스미스/캐롤린 코스마이어의 『혐오의 현상학』을 추천드립니다. 말씀하시는 내용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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