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마스, 로티, 그리고 그 이후: 하버마스-로티 논쟁이란?(4)

2023년 11월 24일, 서강올빼미
하버마스, 로티, 그리고 그 이후: 하버마스-로티 논쟁이란?(4)

00:00-48:05 논문에 대한 발제
48:06-1:09:14 질의응답 및 토론

발제

윤유석(YOUN)

논문

Richard Rorty, “Habermas, Derrida, and the Functions of Philosophy”, Truth and Progres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8, Chapter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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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발제 차례는 아니었지만, 간략히 논문에 대해 써 둔 것이 있어서 여기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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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마스의 주관성의 철학(자) 비판

하버마스에 따르면 철학은 인간 해방을 위해 힘써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은 철학들이 생겼다. 그들은 의식 철학 패러다임 소진의 결과로 등장한 것으로 보이며, 인간의 상호주관성을 외면한 채 주관적 차원에 머무르고자 시도한 철학이다.

주관성의 철학을 대표는 니체이고, 하이데거와 데리다가 그 후예에 속한다. 그들은 인간 이성의 중요한 역할에 찬동하지도 않고, 공공선(public good)을 추구하기보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유용성(social utility)을 별로 지니지 않는 나쁜 공적 철학자들(bad public philosophers)이고 민주 사회에 위협이 되는 자들(thought as a public danger, as a threat to democratic society)이다.

로티에 의한 하버마스의 데리다 해석 비판

로티는 상호주관적 영역에 무관심하다는 이유로 주관성의 철학자들을 고발한 하버마스의 주장이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예컨대 데리다는 의사소통 행위 속에서 드러나는 상호주관적 성격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이 공적 목적을 위해 필수 불가결하다는 점 또한 알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말해, 그들은 하버마스의 주장 “reason is by its very nature incarnated in contexts of communicative action and in structures of the life world”에 동의하지만 “an explanation of intersubjectivity of social praxis” that “begins from the premise of isolated consciousness”를 착수하는데 관심이 없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공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하버마스와 자율성 확보를 위한 사적인 투쟁을 중시하는 듯한 데리다 사이에서 양자택일할 필요는 전혀 없다.

로티의 하버마스 철학 비판

로티는 자연주의적 실증주의자의 입장에 서서 하버마스를 비판한다. 의사소통 속에 내재한 ‘보편 타당성’을 찾아내려는 그의 철학적 작업은 맥락주의에 대한 불신을 잘 보여주고, 맥락 외부의 것을 갈망한다는 점에서 병리적이고 그야 말로 주관성의 철학에 머물러있다. 하버마스는 여전히 자신(인간)보다 좀 더 큰 무엇인가와 관계 맺으려 한다는 점에서 사실 플라톤, 아우구스티누스, 칸트, 니체, 하이데거와 별 다를 바가 없다. 하버마스는 여전히 그들과 마찬가지로 비역사적인 인간의 본질적 관심사, 인간을 속박하고 있는 외부의 무언가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강한 개념을 갖고 있다.

로티의 자신 입장 전개

인간을 둘러싼 외부와 내부에 대한 관념(혹은 개념)을 떨쳐 버리는 순간, 우리는 자율성을 ‘인간 보편의 잠재성의 현실화(the actualization of a common human potentiality)’이 아닌 ‘자기 창조(self-cration)’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제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은 우리를 제약하는 외부의 무엇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이어받은 전통이다. 그리고 마주함과 변화는 이데올로기의 현전에 대한 보편인 사회적 실험과 왜곡되지 않은 의사소통이 아닌 고통과 억압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을 통해 이루어진다.

cf. 1: 인상 깊게 본 구절

As Marx and Foucault helped us see, today’s chains are often forge from hammers that struck off yesterday’s. As Foucault was more inclined to admit than Marx, this sequence of hammers into chains is unlikely to end with the invention of hammers that cannot be forged into chains – hammers that are purely rational, with no ideological alloy. Still, the chains might, with luck, get a little lighter and easier to break each time (320).

cf. 2: 전혀 동의되지 않는 구절

It[이데올로기 비판을 목표로 하는 독일식 사회 이론이 아닌 신실용주의적 접근 방법] is justified, if at all, not simply by a desire for the recognition of contingency but by a political judgement: namely, that the rich democracies of the present day already contain the sorts of institutions necessary for their own reform and that communication among the citizens of those democracies is not “distorted” by anything more esoteric than greed, fear, ignorance, and resentment. This amounts to saying that the instruments of perfectibility are already, in the rich North Atlantic constitutional democracies, in place – that the principal institutions of contemporary democratic societies do not require “unmasking” but rather strenuous utilization, supplemented by luck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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