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성이론 이후 칸트의 시간론은 폐기 된건가요?

제가 알기로는 칸트의 시공간은 오직 주체가 사물을 인식하기 위해 있는 틀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성이론은 운동하는 모든 물체가 속도에 따라 각자의 시공간을 가진다고 하지 않나요? 그럼 상대성이론과 칸트의 시공간론은 양립할 수 없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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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대답을 드리자면, 적어도 제가 아는 한에서 18세기 사람 임마누엘 칸트씨의 시공간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철학자는 더이상 없습니다.

다만 칸트 시공간론의 몇몇 핵심적 발상을 차용한 시공간 철학은 아인슈타인 당대에 이미 출현했으며, 어떤 의미에선 현재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국립대구과학관 강형구 박사님께서 번역하신 라이헨바흐의 <상대성 이론과 선험적 지식>, 그리고 박사님께서 쓰신 여러 문헌이 좋은 자료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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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관점은 유클리드 기하학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의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고 일정합니다. 아인슈타인의 관점과는 완전히 다르지요. 또 오늘날 칸트의 시공간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학자는 거의 없을 것이고, 철학자도 결코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성 이론 '이후에' 칸트의 시공간론이 폐기됐다고 말한다면 어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칸트의 시공간론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가 상대성 이론 때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더 중요하게는, 칸트의 시공간론이 갖는 기능과 상대성이론이 갖는 기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칸트의 시간과 공간을 인간의 감각 경험의 형식으로 이해하고 그의 시간론과 공간론을 감각 경험의 가능성을 정당화하는 작업으로 바라본다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양립불가능할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블랙홀 근처의 천체가 휜다는 것을 관측하고 공간의 휨을 수학적으로 정확히 계산하고 이를 토대로 예측하고 그 예측을 또 다른 관측으로 입증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인간의 눈에 그 휨이 관측되는 지각 경험의 국면에서는 여전히 유클리드 기하학과 칸트의 공간론과 시간론이 상정하듯 일정한 공간과 시간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늘날 많은 철학자들은 우리의 그러한 경험의 틀이 뇌의 해석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기에, 그런 철학자들에게는 칸트의 공간론과 시간론이 엄밀히 말해 거부되고 있는 것이지요. 즉, 칸트의 시간론과 공간론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상대성 이론의 반증 때문이 아니라 다른 철학적 이유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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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칸트 입문서인 오트프리트 회페의 『임마누엘 칸트』(이상헌 역, 문예출판사, 2012)의 93-98쪽에서도 칸트의 감성론을 비유클리드기하학 및 상대성이론과 관련해서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간략히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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