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유관념과 칸트의 선험

안녕하세요
칸트의 선험(감성, 지성, 이성)은 본유관념과 어떻게 다른 것인지 궁금합니다.
본유관념 개념을 단순히 업그레이드 한 것 같은데,
그게 대단히 혁신적인 이유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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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본유 관념(innate idea)'이란 그 자체로 일종의 지식이지만, 칸트의 '선험적 조건(transcendental condition, 초월적 조건)'이란 그 자체로는 지식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험적 조건이란 지식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요소이죠. 즉, 데카르트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코기토 명제를 비롯한 논리적-기하학적 지식들을 가지고 있다고 보지만, 칸트는 그런 식의 지식들을 함부로 상정하지 않습니다. 단지, 논리적-기하학적 지식들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사유의 '틀(framework)'이나 '구조(structure)'가 우리에게 주어져 있고, 그 틀이나 구조는 실제 경험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이죠.

시력이 나쁜 사람들이 안경을 쓴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시면 칸트의 주장을 이해하기가 더욱 쉬울지도 모릅니다. (a) 안경 자체는 사물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죠. 안경은 단지 눈이 사물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틀'이지 그 자체가 사물을 지각하지는 않습니다. 동시에, (b) 우리의 눈도 안경의 도움 없이는 사물을 제대로 보기 힘들죠. 안경이 없는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뿌옇고 불분명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래서 시력이 나쁜 사람이 사물을 지각하기 위해서는 '안경'이라는 틀과 '눈'이라는 신체가 모두 필요하죠. 어느 쪽 하나만 있어서는 사물이 제대로 지각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바깥으로부터 주어지는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과 그렇게 받아들인 것을 또렷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모두 인식의 '조건'으로 필요한 거죠.

칸트는 바로 이 점에서 경험론과 합리론을 통합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본유 관념'이라는 지식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입장(합리론)은 독단적일 뿐이고,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감각만으로 모든 지식을 구성하려는 입장(경험론)은 결국 실패하여 회의에 빠질 뿐이죠. 그 둘은 각각 안경만으로 사물을 파악하려는 시도와 안경 없이 맨 눈으로만 사물을 파악하려는 시도처럼 모두 불가능한 시도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인식의 '선험적 조건'에 실제 사물로부터 주어지는 '잡다'가 더해져야만 제대로 된 인식이 성립할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주장입니다.

아래 영상에서 다음 구간을 참조하시면 됩니다.

  1. 인식론적 전회(06:16-08:32)
  2. 합리론, 경험론, 비판철학(08:33-11:23)
  3. 비판철학이란 무엇인가?: 경험의 조건(11:24-14:46)
  4. 비판철학이란 무엇인가?: 사유와 존재의 이분법(14:47-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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