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주의적 자유; 필립 페팃의 '노예 비유' 비판?

가입하여 글을 열람한 지는 꽤 된 것 같으나, 실제로 써보기는 처음입니다.

철학과 학부 입시 면접을 앞두고, 기출문제를 분석하다 보니 [(개인적) 자유 v. 공동선]과 같은 형식의 문항이 많아 관련된 책을 읽으며 생각할 시간을 가지는 중입니다. 그러다보니 공화주의적 자유를 소극적 자유의 입장에서 비판할 수 있지 않나 싶어 간단한 논증을 준비하였는데, 고등학생의 독단이 아닐까 싶어 이곳에 올려 비판을 받고 수정할 기회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먼저 '자유 : 간섭받지 않는 상태'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 같은 정의에 대해 공화주의자 필립 페팃은 '자애로운 주인이 노예에게 간섭하지 않는 경우, 그 노예는 과연 자유로운가'와 같은 귀류법을 의도하여 자유를 비지배 자유로 재정의하고자 하였습니다. 누군가의 자의적 처분의 대상이 되지 않는 상태, 즉 법률이 유일한 지배자의 위치를 점하는 경우만이 자유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를 실질적인 행위에 대한 제약의 부재가 아니라 형식 차원의 비지배 상태로 취급하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타인의 자의적 처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도, 법률이 개인에게 명령하는 바가 행위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제약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상태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비지배 자유는 결국 소극적 자유를 실현하는 도구로서의 의의 외에 다른 것을 지니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페팃은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자기지배의 원리에 따라) 개인이 입법자로서 법률 구성에 참여하기 때문에, 법률이 행위의 자율성을 제약하더라도 개인은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뿐, 의지 실현에 방해를 받지 않는다'라고 주장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사회적 규범인 법률에 개개인의 의지가 온전히 실현된다고는 보기 어렵고, 결국 또 하나의 '자애로운 주인'으로서 인민 전체를 상정하는 결과로 비판될 수 있습니다.

앞의 노예 비유로 돌아가면, 간섭받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도 실제 간섭이 이뤄지지 않는 경우 역시 자유롭다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일례로 영국 군주는 법률안 거부권과 의회해산권을 가지고 있으나 이를 관습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페팃의 정의에 따르면 자애로운 주인에 해당합니다. 어쨌든 직관은 '영국 국민들이 비자유적인 상황에 있다'는 판단을 내리지 않습니다. 형식상 군주에 의한 지배 상태에 놓여 있고, 원칙적으로 군주가 이들의 의회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는데도 그러합니다. 이는 결국 개인의 행위가 제약받지 않는, 소극적 자유가 일정수준 이상으로 실현되고 있기에 그러한 것이라고 파악하였습니다.

요컨대, 관념적 측면에서 누군가 주인으로서의 권력을 지닌다 하더라도, 그것이 개개인의 행위에 실질적인 제약을 가하기 전까지는 자유로운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형식상의 지배관계가 아니라 결과적 측면에 해당하는 [행위에 대한 간섭 부재]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쓰다보니 여러 관점이 뒤섞인 졸고가 된 것 같습니다. 관련되어 더 공부할 만한 자료가 있다면 공유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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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라고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Stanford Encyclopedia의
https://plato.stanford.edu/entries/republicanism/#RepLibProDeb
의 2. 항목이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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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페팃이나 다른 현대의 공화주의자들의 논의들을 잘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만, 형식적 차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소극적 자유와 페팃이 제시하는 자유 개념이 양립 불가능하거나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진 않습니다. 둘째, 원자적 개인을 상정하고 있는 한, 비지배 자유는 언제나 개인을 제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첫째, 페팃의 자유 개념은 실질적 행위에 대한 제약의 부재(소극적 자유)와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식적 차원에 있어서 '자의적 지배에 대한 거부'는 실질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자의적 지배를 제약하는 것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지배 자유나 그러한 원칙 없이 오직 실질적인 행위에 대한 제약이 단순히 부재하고만 있다면, 그것은 뒤집어 말해 언제나 타인의 자의적 처분의 대상이 될 가능성을 허락하고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가령, 영국의 군주가 법률안 거부권과 의회해산권을 '지금 당장'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이 영국 군주가 자의적으로 타인의 의지들을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타인을 임의적으로 처분할 수 있는 특권적인 권력 자체가 부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존재하고 있지만, 비활성화되어 있다는 것만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자의적인 처분의 가능성을 원칙적으로 허용하는 것이고, 따라서 시민들을 '실질적인 행위에 대한 제약'에 노출시킬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리하자면, 실질적 행위에 대한 제약이 부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형식상 또는 원칙적으로 타자에 대한 지배를 허용하고 있는 한 엄밀한 의미의 자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아직까지는 주인이 자비로워서 노예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하지만, 만약 주인이 임의적으로 그를 처분하거나 괴롭힌다고 하더라도, 그 노예는 진정 자유로울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오직 한정된 기간에, 주인의 의지가 향하는 곳에 따라서만 부분적으로 자유를 향유하고 있지는 않은지, 모든 경우에 대해서 그의 행위에 대한 실질적인 제약의 부재가 정말 가능할지, 오히려 어떤 간섭을 계속 신경쓰고 두려워함으로써 그는 자신에 대한 지배를 상실하고 있는 과정에 있지는 않을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오히려 저는 '실질적 행위에 대한 제약의 부재'로 이해하는 관점이 자유를 더 제약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이러한 관점은 자유 개념 자체에 두 가지 성격이 있다는 가상을 보이면서, 적극적인 공동체의 구성과 타자의 임의적인 지배에 대한 거부로부터 우리를 더욱 더 멀리 떨어뜨린다는 것입니다. 그 반대에서 형식적 차원의 비지배로서 자유가 달성될 때, 최소한의 자유로서 '소극적 자유'가 성취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둘째, 원자적 개인을 상정하고 있는 지점에서 법률은 개인에 대해 소원한 것으로 비춰집니다. 적어도 공화주의적 전통을 따를 때, 법률은 절대적 주권을 가진 한 사람이나 기관에 의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자의적인 지배가 아니라 시민들의 자기 지배의 원리에 따라 제정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렇다면, 법률은 언제나 특수한 이해관계만을 반영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공공선이나 공적인 이해관계 등을 반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논의가 가능한 이유는, 공화주의가 원자적 개인을 상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개인은 시민으로서 공동체를 자발적으로 구성하고, 공공의 것들을 논의하고 숙고하고 원칙을 세우는 것으로서 서로 긴밀한 연관관계를 갖는 주체들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각 개인들을 서로 분리된 원자로서 이해한다면, 개인과 법이 맺는 관계는 언제나 위와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법률이 시민의 자기지배로부터 도출된다면, 즉 개인이 시민으로서 자기지배의 원리에 따라 자신에 대한 입법자로서 법률의 구성에 참여한다면, 법은 오히려 '자애로운 주인'에 의해 시혜적으로 베풀어진 규칙이 아니라 공동체 내 다른 시민과 논의와 숙고를 통해 공공선에 다다르려고 하는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법률에 의한 지배는 각 시민의 자기 지배와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법은 하나의 초월적인 실체가 아니라 공공선을 이루고자 하는 시민들이 성립한 규칙으로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현존하는 법 체계의 불합리함을 비판하는 준거나 현실의 불평등을 해소하는 준거로서도 작동할 수 있지 않을까요?

비교적 최근부터 공화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 터라, 저도 이것저것 알아보고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는 다음의 글들을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조승래, 공화국을 위하여-공화주의의 형성 과정과 핵심 사상, 도서출판 길: 서울, 2010.
필립 페팃 신공화주의-비지배 자유와 공화주의 정부, 나남: 경기 파주, 2012.

직접적인 공화주의 서적이라고 하긴... 확신이 안 서지만, 그래도 공화주의의 핵심적인 요소로서 공동체적 개인에 대해 아래의 책을 충분히 참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중 2장과 6장, 한길사: 경기 파주, 2019

현대 정치철학에 대해 궁금한 게 생길 때마다 참조하기 좋은 책은 아무래도... 컴패니언 시리즈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Gerald F. Gaus, et. al. The Routledge Companion to Social and Political Philosophy, Routledge: New York,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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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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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성에 대한 전제 자체가 달라서 일어나는 문제이군요. 참고하여 논의를 수정해보겠습니다.
추천해주신 글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