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만, 『진리와 문화 변동의 정치학』, 「하버마스-로티 논쟁에 대한 비판적 평가」

R: 로티, H: 하버마스, P: 폴라니, ->: 제기하는 비판

  • 지금까지의 내용 요약

R->H1: 하버마스가 제기하는 상대주의라는 비판은 주관/객관을 구분하는 전통 인식론을 따랐을 때에야 유효하다.

R->H1 반박: 화용의 내재적 성격에 의해 어떠한 주장이라도 보편에 정향되어 있어야 한다.

R->H2: 하버마스는 보편타당성이라는 명제에서 형이상학적 위안을 찾고 있을 뿐, 실제 생활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그것이 정말로 효과를 가지느냐?라는 문제에 어떠한 좋은 답변도 내놓고 있지 못하다.

  • 김경만의 자연과학 공동체 예시(가상 참여)를 통한 하버마스 비판

하버마스에 따르면 자연과학 공동체는 ‘보편과 무제한적 대화를 향한 해석학적 유토피아’가 절대로 위반되어서는 안 되는 원칙으로 신봉되는 ‘이상적 담화 공동체’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마이클 폴라니에 따르면 과학 공동체는 하버마스가 말하는 상호주관적 논쟁을 통해 담론을 구성하지 않는다. 이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벨리코프스키의 일화이다. 벨리코프스키의 연구는 천문학자들에게 읽히지도 않고 ‘암묵적 기준’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바로 기각되었다. 이 경우, 하버마스는 벨리코프스키의 글을 읽어보지 않고 기각시킨 천문학자들을 비합리적이라고 비판할 것이라 예상된다. 하지만 폴라니는 하버마스의 비판이 정당하지 않다며 거부할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P->H1: 하버마스가 합의와 진리에 도달하는 ‘유일한’ 최선책으로 강조하는, 합리적이라 가정되는 담화의 규칙들은 과학자들의 관점에서 봤을 때 ‘비효율적이고’ ‘비용이 많이 드는’ 규칙일 뿐이다.

근거1) 암묵적 지식의 작동은 과학 지식 성장의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토론할 가치가 있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시켜줌으로써 과학 이론 진보에 실제로 기여한다.

근거2) 암묵적 지식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실재의 다른 측면들도 탐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능을 갖고 있다(잘 이해 안 감)

P->H2: 과학자들의 실천에 체화된 암묵적 기준들은 ‘네’ 혹은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일련의 명시적 명제로 표현 혹은 번역될 수 없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그것들의 타당성을 옹호할 계기를 갖게 되지도 않는다.

P->H2 반박: 과학 실천에서 암묵적 차원의 존재라는 ‘이유’를 끌어대서 과학적 담론이 행해지는 과정을 변론하는 한, 이미 하버마스 본인과 같은 자들과 비판적 대화를 하고 있는 셈이기에, 결과적으로 보편적이고 무조건적 타당성을 향한 해석학적 유토피아에 과학자들도 참여할 수밖에 없다. 좀 더 쉽게 말해, 암묵적 지식을 통한 과학 실천의 정당화를 논하는 순간 ‘왜 그러한 정당화가 가능하느냐’ 등의 질문이 제기될 것이고, 질문에 대한 타당한 답변을 제시해야 하므로 과학자들은 타당성 주장 상환을 수행해야만 한다. 이른바 ‘수행적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

P->H2 반박에 대한 반론: 하버마스와의 지금의 논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과학자(폴라니)가 ‘협력적 진리 탐구’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연역적으로 도출되지 않는다.

보론1) 지금 폴라니의 행위는 하버마스가 말하는 ‘과학 실천이 어떤 것인가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경계를 넘어서 자신들의 과학 실천이 외부 사람들에 의해 비판적으로 평가되고 공유될 수 있도록 하는 데 관심’을 둔 행위가 아니라, ‘단지 그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공유하는 독특한 타당성의 암묵적 기준을 방어하는 데 관심’을 둔 행위일 뿐이다. 과학적 실천은 아무에게나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루지오를 공유한 자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과학적 실천을 과학 공동체를 넘어 모든 다른 집단에게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보론2) 폴라니를 포함한 대부분의 과학자들의 작업으 하버마스가 어필하는 ‘대화 공동체의 크기나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데도 전혀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P->H2 반박에 대한 반론에 대한 재반론: 폴라니는 ‘정당화’와 ‘방어’를 구분하며 주장을 개진하고 있으나, 정당화와 방어의 구별은 매우 모호하다. 오히려 과학자들이 과학적 실천의 논리를 방어하는 것은 논쟁에 계속 참여하여 하버마스 자신과 같은 비판자들을 납득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결국 방어도 정당화의 일부이다.

P->H 반박에 대한 반론에 대한 재반론에 대한 재재반론: 무조건적 타당성에 관한 배경 동의가 존재하고, 또 나아가 ‘모든 상상 가능한 공동체‘에 대항해 암묵적 지식을 논증 형태로 방어해야 한다’는 식의 하버마스의 주장은 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버마스는 사실상 자신의 입장을 규범적 기준으로 만들고 있으나, 하버마스의 말이 옳다면 하버마스 자신의 입장 또한 무제한적인 대화의 대상이다. 이런 점에서 계속해서 제기되는 과학자(폴라니)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판을 들을 이유가 없다. 달리 말해, 하버마스가 중요시 여기는 계속되는 대화를 지금 여기서 이어나가 봐야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한다. 즉, 지금의 이 논쟁을 지속할 이유가 없다.

이렇게 하버마스와 과학자들의 대화는 종료될 것이다. 결국 하버마스의 바람과 달리 ‘보편성과 무제한적 대화에의 정향’읃 작동되지 않은 셈이고, ‘이론가들은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무한한 토론 과정을 거칠 것’이라는 하버마스의 핵심 주장이 틀렸음이 드러난다.

출처: 김경만, 2015: 203-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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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

하버마스가 과학자들의 실천 세계에 대한 합리적 재구성을 통해 그들의 '왜곡된 소통'의 기원을 찾아내고 논쟁을 통해 과학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비합리적 행위를 바로잡으려 했던 시도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김경만은 하버마스를 옹호하는 매카시의 입을 빌려 하버마스-로티 논쟁을 계속 설명한다. 하지만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매카시의 하버마스 옹호 전략은 4장 및 5장에서 전개된 것과 같은 논리에 의해 로티를 넘어서지 못한다. 사실상 매카시는 하버마스의 입장을 반복할 뿐이다. 어떤 점에서도 하버마스-매카시가 강변하는 의사소통의 보편적 타당성은 실제 구체적 사례에서는 어떠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 M: 매카시(하버마스와 동일한 입장임), R: 로티, K: 김경만 →: 제기하는 비판

M→R: 모든 화용 안에는 맥락 초월적 진리에의 추구가 내재되어 있다. 로티가 지금 이 논쟁을 벌이는 것도 초월적 진리에의 추구를 위함이므로, 이를 부정할 경우 수행적 자기모순을 피할 수 없다.

M→R 반박: 나 로티가 이 논쟁에 참여한다는 것으로부터 맥락 초월적 진리를 추구하는 언술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이 도출되지 않는다. 지금 이 논쟁은 이미 서구-학문적 토론 문화를 전제하고 있기에 매카시 당신의 주장은 나에게 의해 검증될 것이 아니라 이질적 문화를 가진 자와의 화용 속에서 정당화되어야 한다.

보론1) 매카시 당신이 말하듯 모든 화용 안에는 맥락 초월적 진리에의 추구가 내재되어 있다면, 당신은 히틀러와 의사소통을 통해 그를 설득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인가?

M→R 재반박: 그런 자들을 설득하는 것이 실패한다는 사실로부터 그들 주장이 타당하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따라서 히틀러 같은 자들의 관점의 타당성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얘기할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 있다.

M→R 재재반박: 매카시의 재반박은 충분한 반박이 아니다. 여전히 자신이 옳고 히틀러 당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식론적'으로 '증명'할 비순환적 방법은 없다는 나 로티의 주장은 여전히 견지되고 있다.

M→R 재재재반박: 서구 철학자들이 히틀러와의 논쟁에서 그들을 설득시키고 변화시킬 수 없다고 하더라도, 철학자들의 이론적 주장이 그들의 근거 없는 주장과 인식론적으로 같은 지위를 갖고 있다는 로티의 주장은 우스꽝스럽다.

K(=M)→R 재재재재반박: 당신은 이미 자신들의 주장이 합리적이라고 전제하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게다가 당신 말이 더 합리적인 주장이라고 치자, 그런데 왜 히틀러를 설득하지 못하는지를 나에게 설명해 보라. 당신들이 말하는 타당성 주장 상환은 나치를 변화시킬 힘을 갖지 못한다. 핵심은 나치즘의 상황을 어떻게 실제로 변화시킬 수 있냐인데 이에 대해 당신들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은 당신들이 '구체적인 것에 대한 민감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구체적인 것에 대한 민감성'은 이론이 아닌 문학적 작품이 더 잘 보여줄 수 있다. 창백한 이론적 서술이 아닌 슬픔을 노출하고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지배에 대한 최선의 저항 전략이다.


출처: 김경만, 2015: 225-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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