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론의 경계는 어디까지인가요?

최근 철학 강의 중에 "미디어 철학"을 주제로 토론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졸업을 앞둔 저와 제 친구, 그리고 2-3살 정도 차이가 나는 친구들을 남겨두시고 선생님은 주제를 주시고 주도권을 저희에게 넘기셨습니다.

처음에는 뜨거운 미디어, 차가운 미디어에 대한 얘기를 진행하다 어쩌다 보니 주제가 모두의 공통 관심사인 대입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점점 토론의 형식을 벗어나 조언과 경혐을 공유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왜 대학을 가고 싶은가' '공부를 왜 해야 하는가' '선택의 책임'과 같이 두루뭉실하지만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는 질문, 그리고 답을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80분 정도의 대화가 끝나자 선생님께서 마무리를 지으시며 이렇게 얘기를 하시더군요, '오늘 나눈 이야기들이 크게 행복론의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요. 행복론을 체계적으로 배워보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연스레 형성되었습니다.

  1. 행복론은 경계, 즉 행복론에서 다루는 내용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요?
  2. 행복론으로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 서적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행복론에 대해 더 심도있게 탐구하고 이와 같은 질문에 답을 구하고자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p.s. 저는 철학을 왜 행복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지를 바탕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그것이 깨지고, 모든 철학이 행복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만 철학을 공부하는 것 또한 행복을 위해 하는 것 아닐까요? 돈을 버는 것, 사랑을 하는 것, 그리고 인생에 있어서 목표로 삼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행복을 좇아 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런 생각은 제가 인생의 목적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나온 결론인걸까요?

이 점에 대해서 제 식견을 넓혀주실 수 있는 분이 계시다면 부탁드리겠습니다. 정리가 아직 무척이나 안된 생각이고, 아는 점이 부족하여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 못하는 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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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복론이라는 단어가 애매하네요. 한국 학계에서도 딱 여기에 해당하는 학문분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영미권에서도 딱 여기에 해당할 학문분과가 딱히 생각나진 않습니다.

다만 meaning of life, happiness, well-being, death, love(와 같은 여러 종류의 감정들)에 대한 연구는 (하나의 학문으로 정의되지 않은채) 산발적으로 연구되고 있습니다.

(올빼미 예전글 검색해보시면 글 몇개 나올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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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댓글에서처럼,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철학계에서 중심적으로 다루어지지는 않는 것 같아요. 다만 SEP에 다음과 같은 엔트리가 있네요:
https://plato.stanford.edu/entries/happ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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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철학은 행복한 삶보다는 의미 있는/가치 있는 삶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철학적으로 할 수 있는 얘기들이 더 많은, 자명한 것이 별로 없는 주제이기 때문이고 의미 있는/가치 있는 삶이라고 하면 왠지 행복한 삶보다 더 객관적이고 더 보편적인 무엇인가 - 철학이 좋아하는 것 - 를 추구하는 삶인것 같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행복한 삶이 반드시 의미/가치 있는 삶인 것은 아닙니다. 한 평생 마음껏 살인을 저지르고는 잡히지 않은 채,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은 채 평안하게 생을 마감한 살인마도 행복했을 수 있습니다.

  2. 행복은 그 자체로 추구하기 힘든 것이고 그 자체로 추구하면 오히려 이뤄지기 더 어려운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행복하고 싶어서 여행을 가거나 데이트를 하거나 새 옷을 사거나 뮤지컬을 관람하거나 대학에 입학하거나 반려 동물을 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의 그 활동들의 동기는 그 활동들로 충족하고자 하는 특정한 구체적 욕구들입니다. 행복은 그 욕구들이 충족이 되는 경험이 누적되고 불운들을 별로 겪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형성되는, 내 일상적 말과 행동과 제스쳐와 기분에 나도 모르게 스며들어 있는 밝고 따뜻한 광채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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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분들의 말씀을 들으니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다른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한 묘한 기분이 드는군요 ㅎㅎ 왜냐하면 제가 공부하고 있는 분야가 따지자면 행복에 관한 주제이거든요..ㅋㅋ

@Mandala 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삶의 의미, 행복, 복리, 죽음, 사랑과 같은 주제들이 실천철학 영역에서 종종 연구자들의 관심을 끕니다. 저는 복리와 사랑에 관한 주제를 주로 공부하고 있구요.
"하나의 학문으로 정의되지 않은채"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지만, 대략적으로 뭐 일반적인 이론적 대립구도가 없이 산발적으로 연구된다는 의미이시겠지요? 일견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죽음이나 사랑에 관해서는 말이죠.

현대적인 논의에서는 대체로 'happiness'(행복)와 'welfare' 혹은 'well-being'(복리 혹은 복지) 등이 교환적으로 쓰입니다. 'welfare'와 거의 같은 의미로 주로 쓰이는 말이 'good for someone'(누군가에게 좋은 것)이 많이 쓰여요. 'good simpliciter'(걍 좋음)와 대조되어서요. 때론 'self-interest'라는 말도 쓰입니다.

복리에 대한 철학적 논의의 현대적 구도를 만든 사람은 데릭 파핏(Derek Parfit)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유명한 저서 Reasons and Persons의 유명한 부록 Appendix I는 따로 해설 논문이 나와 있을 정도이지요. 여기서 파핏이 구분한 세 가지 접근법이 쾌락이론(Hedonistic Theory; 저는 '희락주의'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만), 욕구충족이론(Desire Fulfillment Theory), 객관적 목록이론(Objective List Theory)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22년 PhilPapers Survey에도 해당 항목이 있지요)

꽤나 이름 있는 윤리학자들이 관련 주제로 저서와 논문을 쓰고 있습니다.
쾌락이론은 그다지 인기는 없어 보이지만 에피쿠로스, 벤담, 밀을 뿌리로 삼고 있고, 로저 크리스프(Roger Crisp), 프레드 펠드먼(Fred Feldman) 등이 현대적인 버전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욕구충족이론은 어쩌면 현 시대를 잘 반영하는 이론 같아 보이지만 반론 또한 많습니다. 헨리 시지윅(Henry Sidgwick)이 현대적인 논의의 출발점에 있고, 리처드 브랜트(Richard Brandt), 크리스 히스우드(Chris Heathwood) 등이 지지했으며 이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들 또한 충분히 해당 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검토합니다.
객관적 목록이론은 많은 철학자들이 지지하는 것으로 조사된 것 같은데(PhilPapers Survey) 윌리엄 데이빗 로스(W.D. Ross)가 대표적인 지지자로 여겨지며 삶의 의미 같은 주제를 복리, 즉 개인의 행복과 연결시키는 논의가 이 맥락에서 논의되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현대에 들어서 행복 혹은 더 나은 삶, 복리의 증진과 관련해서 여러 가지 이론적 조합이나 새로운 견해들이 종종 나오는 것 같습니다. (토마스 허카(Thomas Hurka)의 완전주의(Perfectionism)는 위 세 구분에 속하지 않는 일종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인 것 같습니다)

저도 아직 이 분야의 많은 저서들이나 논문을 다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철학자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주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논의 초점이 조정되거나 축소된 측면은 있을지 모르지만(삶의 의미와 복리의 문제를 분리해낸다든지) 저는 행복론이 고대서부터 중세는 물론 현대까지도 비록 인기 있는 핫셀러는 아니지만 스테디셀러인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분들도 아니고 올빼미에 계신 선생님들께서도 이 분야가 잘 소개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는 인상을 받으시니 "할 일이 많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기쁘면서도 고물상이 된 것 같은 기분도 잠깐 드는군요 ㅋㅋㅋ

본문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저는 @notorious 님의 문제의식이 충분히 철학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순전히 저랑 관심사가 겹쳐서 입니다 ㅋㅋ).
'행복론'의 범주는 아마 이론에 앞서 선행적으로 결정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행복론'이 복리 이론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개인의 삶을 더 낫게(better off)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문제를 출발점으로 삼을 것이구요, 설령 그렇게 시작한다고 해도 공공복리의 증진이라는 문제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사회적인 문제로 발전해 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디까지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그렇지만 확실한 건 사랑, 인간관계, 삶의 의미, 성취, 자기실현 등등이 모두 복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따져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어로 출간된 글 중에 행복론에 대한 고전적-현대적 논의를 전체적으로 잘 소개하는 글이 있는지는 부끄럽게도 잘 모르겠습니다. 로저 크리스프(Roger Crisp)가 쓴 『밀의 공리주의』(철학과현실사)라는 책의 두 챕터 정도가 복리 이론들을 개괄해주고 있긴 합니다. 조심스럽게 추측해보건대 배경지식이 많이 필요하진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영어를 어느정도 하신다면 Ben Bradley가 쓴 Well-Being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얇은 책인데, 저는 현대적인 논의의 틀을 잡는데 있어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저도 조만간 다시 한 번 읽어보려고 하고 있구요. 로저 크리스프가 쓴 "Hedonism Reconsidered"라는 논문도 상당히 좋습니다. 이 논문은 쾌락 이론에 대한 몇 가지 주요 반론에 대해 대응하는 논문이라 개괄적인 내용이 들어가 있지는 않지만 상당히 논증적이고 깔끔하게 쓰인 논문이었습니다.

정작 본문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는 큰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네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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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이 분야에 대한 조사가 선행되어야 제대로 정리된 질문을 드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언급해주신 키워드 위주로 조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SEP에 따로 정리된 글이 있었군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답변 감사드립니다. 행복한 삶과 가치있는 삶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 노력해야겠네요.

이 말이 아주 큰 울림을 주네요. 행복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을 점검해 보게 되는 말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나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우선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니 다행스럽네요. 제가 가치있게 바라본 무언가가 남들에게도 빛나 보일 수 있다는 사실에 일단 안도감이 듭니다...ㅋㅋㅋ

Welfare, well-being과 같은 용어들이 이 분야에 포함되리라 생각하지는 못했는데 조금 더 깊은 접근을 허용하여 주는 키워드들일 것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답변들을 읽어보니 행복한 삶과 가치있는 삶에 큰 차이를 두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저는 행복한 삶이 가장 가치있다고 생각했었고, 많은 이들이 이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거라고 믿었는데요. 의외로 철학계에서는 행복에 관한 연구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에 조금 실망할 뻔 하다 @Raccoon 님의 답변을 보고 희망을 얻게 되었습니다.

관련 서적 추천 또한 감사드립니다! 영어가 편하다 보니 주로 영어 서적을 찾아보는데, Well-Being을 꼭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분야에 대한 이해와 틀이 잡히게 된다면 @Raccoon 님과 다시 대화를 나눠보고 싶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