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소품과 부록>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고 생각나는 대로 적어봤는데, 글을 한번 읽어보시고 좀 더 가르침을 주실 수 있을까요? 틀린 내용이나 제가 더 공부할 만한 지점을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공자는 아니고, 그냥 이것저것 제가 관심 가는 주제에 대해 읽다 보니까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과도한 헛된 기대를 버리면 덜 불행해진다’로 요약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진실이다. 이는 어쩌면 쇼펜하우어 스스로가 험난한 세상에 대처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 위한 방어적 심리기제였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언뜻 보면 고통을 세상을 이루는 근본적인 요소로 본다는 점에서 매우 비관적이고, 욕망을 절제하라는 측면에서 금욕적이고 동양 사상이나 불교 철학과 흡사한 부분이 더 많아 보인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 특히 자본주의와 물질적 풍요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 세상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무엇이 되었건 무언가를 쟁취하려고 노력하는 젊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는 매우 달라 보인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이성의 힘으로 동물적 욕망을 제어하라는 소크라테스의 이성적 금욕주의의 연장에 있으며, 안분지족의 삶을 살 것을 권유하는 유교적 금욕주의와도 궤를 같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우리의 근본과 크게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과거의 지혜를 반복하듯이 친숙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래되어서 빛이 바랬지만 시간이라는 먼지와 얼룩을 털어내고 나면 진가를 발휘하는 추억의 조각과도 같다. 그래서 쇼펜하우어가 들려주는 인생 지침을 듣다보면 꼰대 발언처럼 들리기는 해도 실상은 예상했던 것만큼 낯설지 않으며 마치 어딘가에서 들어본 것만 같은 현명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삶의 지혜처럼 친숙하고 편안하게 들리는 구석이 있다.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행복은 쇼윈도에 너머에 장식된 상품처럼 보여주기 식으로 무분별하게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자신의 여력 범위를 넘어서는 비싼 차나 명품 등을 과시적으로 전시하면서까지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욕망하는 요즘 세태를 보면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의 원칙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으며 현실이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또한 이성을 만날 때 조건을 먼저 보고, 그러한 조건에 따라 행복을 미리 점쳐서 자신의 결혼까지 설계하는 현대인들에게 쇼펜하우어는 단호하게 그건 행복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내면이나 진실한 가치를 들여다보지 않고, 그 사람의 지위가 어떤지, 그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는지, 돈은 얼마나 있는지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으로 현실은 굴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적인 것을 추구할 수 있음에도) 이상적인 것에서는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항상 현실적인 것을 필요로 하는 자가 속물이다. 혹자는 ‘그건 현명한 사람들이나 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바보란 말인가? 우연에 의해서건 숙고나 관찰에 의해서건 현상이나 사태를 조금만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람들이 전혀 행복하지 않으며 오히려 행복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본질을 깨달을 것이다.
나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우리 집안이 강조하는 금욕주의적인 삶의 방식과 처세술이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놀랍도록 일치해서 더더욱 거부감이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쇼펜하우어에게 고마움을 느꼈는데, 그 까닭은 한 마디로 부모님이 매번 입으로 (기분 나쁘게) 늘어놓던 잔소리를 A부터 Z까지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설명해준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듣는 부모님의 잔소리에 논리적 개연성을 입힌 버전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부모님이 강조하는 (과거에 내가 보기에) 금욕적인 삶과 나 자신의 생활방식이 항상 충돌했고, 그로 인해서 부모님과의 갈등이 끊이지를 않았다. 나 자신도 부모님이 말하는 생활방식을 납득하고 그것을 수용하고 싶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글은 그토록 강조하던 부모님의 라이프 스타일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며, 무릎을 탁치며 결국에는 나로 하여금 수용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삶의 방식을 실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이는 참으로 이상하고도 신기한데, 어쩌면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유복한 생활을 했다는 공통점에서 기인한 점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아니면 나이가 들면 현명해진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앞선 세대가 우리보다 좀 더 많은 지혜를 경험을 통해 직관적으로 알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이 나와 내가 어울리는 사람들이 가진 라이프 스타일의 한계를 명백하게 지적하며 이에 대한 대안을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욕망이 생길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욕망에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내맡기는 경향이 있음을 나 스스로도 차츰 인지하고 있었고 몇몇의 사건과 계기들로 인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내 자제력이 현격히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나에게는 모종의 실천적 규율이 필요했다. 충동적이고 향락추구적인 라이프 스타일의 반대급부로서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은 그 효력을 충분히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만약에 내가 쇼펜하우어의 행복 철학에 대해 리뷰를 하고 이에 대한 해설을 한다면 내가 고민하고 있는 타인과의 관계, 취미, 사교 생활, 유흥, 술 등에 대해 초점을 맞춰 지극히 주관적으로 몇몇 요소들이 강조된 글이 하나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또한, 조금 더 주제넘게 말해보자면, 나와 함께 어울리며 내게 자신의 고민거리를 허물없이 털어놓는 내 친구들이 겪는 많은 문제의 원인들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행복의 원칙들을 통해 쉽게 해결 가능한 것이었다. 아마 그들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을 읽고 라이프 스타일을 조금만 바꾼다면 그들이 삶에서 겪는 많은 문제들이 쉽게 해소될 것이다. 이들이 이 책을 읽지는 않겠지만, 나중에라도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 크고 작은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나름의 지혜를 터득해서 좀 더 현명한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 소망과 바람이 생겼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은 결국에는 <행복론>에서 말한 삶의 원칙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 친구들과 비슷한 고민거리를 안고 있을 내 또래 친구들이 보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에 쇼펜하우어의 행복 철학에 대한 짤막한 서론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비슷한 주제를 다루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다르다. 근본적으로 세계관이 다르다. 같은 형이상학인데도 그 내용은 다르다. 여기에 니체까지 더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있다. “모든 나쁜 사람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무지하고, 사람들은 그러한 무지 때문에 불의해지거나 일반적으로 나쁜 사람이 된다.”라고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신뢰하고, 적절한 지도와 훈련을 거치면 모든 사람이 이성을 발현해서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떻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인간이 되었든 누구나 이성의 단초를 갖고 태어나는데 잘못된 습관을 들이거나 적절한 훈련을 받지 못해 나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은 최고의 미덕인 중용에 이를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중용이 무엇인가?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그런 상태에 이르는 것을 중용이라고 부르는데, 그러한 상태가 무엇인지 인지하고 딱 잘라서 이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카이사르가 중용을 실천한 인간인가, 나폴레옹이 중용을 실천한 인간인가? 마치 인간의 행위와 상태와 미덕,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윤리도 수학처럼 정밀하게 재단하고 계산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 좋음이 객관적으로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누가 판단해주냐는 말이다. 죽은 뒤 사람들의 판단도 완전하지는 않다. 완벽한 중용의 미덕을 실천하고 확정지을 수 있는 존재자는 아마 신밖에 없지 않을까? 이러한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의 원인이자 부동의 존재자로서 신을 요청한다. 먼저 사물들을 관찰하고 좋은 특성들을 꼽은 뒤 신이라는 존재가 가져야 하는 여러 특성들을 사변적으로 따져간다. 그리고 그는 그 특성들을 만족시키는 존재는 신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그래서 모든 질서를 관장하고 세계를 합리적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신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피안의 세계를 가정한다. 스콜라 철학이 말하는 신도 이러한 철학에 기초를 둔 것일 테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런 아리스토텔레스를 두고 순진하다고 말할 것이다. 합리적인 질서 또는 신이 있다면 세계가 이렇게 고통스럽고 불행할 리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특히 신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더욱 그렇다. 반대로 쇼펜하우어는 인간과 세계가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본다. 이때의 맹목적인 의지는 인간을 넘어서는, 인간도 이해할 수 없는 욕망과 충동 같은 우주적인 힘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난이나 질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그게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을 우리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렇지 못한 측면이 더 많다. 이성이 비이성을 통제하기는커녕 비이성에 끌려가기에 바쁘다. 이성은 욕망이 사고 친 걸 뒤따라가면서 사고가 아닌 것처럼 포장하거나 변명해 주는 기능을 한다. 또한 삶에의 의지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구하는데 그것을 얻자마다 또 다른 무언가를 욕구한다. 이 끝없는 의지는 본질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비극적인 고뇌의 세계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와 염인주의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 자체를 좋은 것, 삶 자체를 즐거운 것으로 긍정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인간 존재 자체를 본성적으로 좋은 것으로 여기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와 친구 또한 근본적으로 선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반대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실천 강령에 있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르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공동체는 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지배당하는 불쌍한 군중들의 집합과 마찬가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명예는 한 개인에게 수여되는 공동체의 합리적인 동의와 인정이고 좋은 가치를 지니는 것인 반면 쇼펜하우어가 명예를 군중들의 어리석은 변덕과 불합리한 것으로 치부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의 머릿속에 든 대부분의 견해는 불합리하고 그릇되고 불합리하며 대부분은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또 쇼펜하우어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개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궁극적으로 공동체는 신뢰할 만한 것이고, 좋은 사람은 공동체에서 자신의 미덕을 발휘해서 공동체를 더 좋게 만드는 사명을 띤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고, 공동체에 속한 개인으로서 공동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개인의 가치는 공동체와 무관하게 결정된다고 보았다. 아마도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시대와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시대가 다르고 그 둘이 처했던 환경이 다른 데에서 기인한 이유가 클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정치를 실현하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시민이었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사유를 치열하게 전개해나갔다. 반면에 쇼펜하우어는 중세라는 시기를 거쳐 프랑스 혁명과 시민 혁명을 목도했으며 모든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정치가 전문적인 영역으로 분리된 시대에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해나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산다는 것은 곧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쇼펜하우어에게는 아니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한테 있어서는 공동체 내의 구성원으로서의 미덕이 쇼펜하우어보다 더 중요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쇼펜하우어와 아리스토텔레스 둘 다 이성으로서 욕망을 통제하는 것을 삶의 모범이자 이상으로 삼는다. 니체는 아예 이 둘을 싸잡아 비판하는 듯하다. 특히 쇼펜하우어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자기계발의 측면에서 접근한 나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해서 더 뜨끔하다. 니체는 마지막 인간을 강하게 비판하는데, 마지막 인간을 행복을 최고 가치로 두고 안락한 삶을 좇는 인간이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더는 경멸할 줄 모르는 더없이 경멸스러운 인간의 시대가 오고 있다.”라고 한다. 세계를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추동된다고 본 점에서는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비슷하지만,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금욕적 이상주의에 빠진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가 욕망을 억제함으로서 삶의 고통을 회피하려고 한다고 니체는 생각했다. 니체는 삶의 고통도 긍정하고, 욕망 또한 나쁜 게 아니라고 했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상에서 갖는 최종 목표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그로서 인간은 원대한 이상을 품고 가치를 창출해내는 자기극복을 실현할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니체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결국 어쩌란 말인가?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며 ‘영원회귀’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로서는 쇼펜하우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차라리 와 닿는다. 나는 니체를 이해하기가 제일 어려운데 니체는 왜 그렇게 이해할 수 없을까? 아마 니체의 과격함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