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와 아리스토텔레스

쇼펜하우어의 <소품과 부록>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고 생각나는 대로 적어봤는데, 글을 한번 읽어보시고 좀 더 가르침을 주실 수 있을까요? 틀린 내용이나 제가 더 공부할 만한 지점을 가르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공자는 아니고, 그냥 이것저것 제가 관심 가는 주제에 대해 읽다 보니까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과도한 헛된 기대를 버리면 덜 불행해진다’로 요약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진실이다. 이는 어쩌면 쇼펜하우어 스스로가 험난한 세상에 대처하고 자신의 삶에 적용하기 위한 방어적 심리기제였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언뜻 보면 고통을 세상을 이루는 근본적인 요소로 본다는 점에서 매우 비관적이고, 욕망을 절제하라는 측면에서 금욕적이고 동양 사상이나 불교 철학과 흡사한 부분이 더 많아 보인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 특히 자본주의와 물질적 풍요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 세상에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무엇이 되었건 무언가를 쟁취하려고 노력하는 젊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는 매우 달라 보인다.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이성의 힘으로 동물적 욕망을 제어하라는 소크라테스의 이성적 금욕주의의 연장에 있으며, 안분지족의 삶을 살 것을 권유하는 유교적 금욕주의와도 궤를 같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우리의 근본과 크게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과거의 지혜를 반복하듯이 친숙한 것일지도 모른다. 오래되어서 빛이 바랬지만 시간이라는 먼지와 얼룩을 털어내고 나면 진가를 발휘하는 추억의 조각과도 같다. 그래서 쇼펜하우어가 들려주는 인생 지침을 듣다보면 꼰대 발언처럼 들리기는 해도 실상은 예상했던 것만큼 낯설지 않으며 마치 어딘가에서 들어본 것만 같은 현명한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삶의 지혜처럼 친숙하고 편안하게 들리는 구석이 있다.

인스타그램과 같은 SNS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행복은 쇼윈도에 너머에 장식된 상품처럼 보여주기 식으로 무분별하게 소비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자신의 여력 범위를 넘어서는 비싼 차나 명품 등을 과시적으로 전시하면서까지 사람들의 관심과 시선을 욕망하는 요즘 세태를 보면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의 원칙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으며 현실이 반대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또한 이성을 만날 때 조건을 먼저 보고, 그러한 조건에 따라 행복을 미리 점쳐서 자신의 결혼까지 설계하는 현대인들에게 쇼펜하우어는 단호하게 그건 행복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내면이나 진실한 가치를 들여다보지 않고, 그 사람의 지위가 어떤지, 그 사람이 무엇을 소유하는지, 돈은 얼마나 있는지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으로 현실은 굴러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적인 것을 추구할 수 있음에도) 이상적인 것에서는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항상 현실적인 것을 필요로 하는 자가 속물이다. 혹자는 ‘그건 현명한 사람들이나 가능할 것이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바보란 말인가? 우연에 의해서건 숙고나 관찰에 의해서건 현상이나 사태를 조금만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람들이 전혀 행복하지 않으며 오히려 행복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본질을 깨달을 것이다.

나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우리 집안이 강조하는 금욕주의적인 삶의 방식과 처세술이 쇼펜하우어의 철학과 놀랍도록 일치해서 더더욱 거부감이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쇼펜하우어에게 고마움을 느꼈는데, 그 까닭은 한 마디로 부모님이 매번 입으로 (기분 나쁘게) 늘어놓던 잔소리를 A부터 Z까지 논리적으로 타당하게 설명해준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듣는 부모님의 잔소리에 논리적 개연성을 입힌 버전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부모님이 강조하는 (과거에 내가 보기에) 금욕적인 삶과 나 자신의 생활방식이 항상 충돌했고, 그로 인해서 부모님과의 갈등이 끊이지를 않았다. 나 자신도 부모님이 말하는 생활방식을 납득하고 그것을 수용하고 싶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글은 그토록 강조하던 부모님의 라이프 스타일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며, 무릎을 탁치며 결국에는 나로 하여금 수용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이러한 삶의 방식을 실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이는 참으로 이상하고도 신기한데, 어쩌면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서 유복한 생활을 했다는 공통점에서 기인한 점이 아닐까도 생각해본다. 아니면 나이가 들면 현명해진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앞선 세대가 우리보다 좀 더 많은 지혜를 경험을 통해 직관적으로 알고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이 나와 내가 어울리는 사람들이 가진 라이프 스타일의 한계를 명백하게 지적하며 이에 대한 대안을 논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욕망이 생길 때 이를 해소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행동하고, 욕망에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내맡기는 경향이 있음을 나 스스로도 차츰 인지하고 있었고 몇몇의 사건과 계기들로 인해 험한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내 자제력이 현격히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나에게는 모종의 실천적 규율이 필요했다. 충동적이고 향락추구적인 라이프 스타일의 반대급부로서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은 그 효력을 충분히 발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만약에 내가 쇼펜하우어의 행복 철학에 대해 리뷰를 하고 이에 대한 해설을 한다면 내가 고민하고 있는 타인과의 관계, 취미, 사교 생활, 유흥, 술 등에 대해 초점을 맞춰 지극히 주관적으로 몇몇 요소들이 강조된 글이 하나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또한, 조금 더 주제넘게 말해보자면, 나와 함께 어울리며 내게 자신의 고민거리를 허물없이 털어놓는 내 친구들이 겪는 많은 문제의 원인들은 쇼펜하우어가 말한 행복의 원칙들을 통해 쉽게 해결 가능한 것이었다. 아마 그들이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을 읽고 라이프 스타일을 조금만 바꾼다면 그들이 삶에서 겪는 많은 문제들이 쉽게 해소될 것이다. 이들이 이 책을 읽지는 않겠지만, 나중에라도 각자의 길을 걸으면서 크고 작은 삶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나름의 지혜를 터득해서 좀 더 현명한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 소망과 바람이 생겼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방식은 결국에는 <행복론>에서 말한 삶의 원칙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 친구들과 비슷한 고민거리를 안고 있을 내 또래 친구들이 보면 좋을 거 같다는 생각에 쇼펜하우어의 행복 철학에 대한 짤막한 서론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이라는 비슷한 주제를 다루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다르다. 근본적으로 세계관이 다르다. 같은 형이상학인데도 그 내용은 다르다. 여기에 니체까지 더하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있다. “모든 나쁜 사람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무지하고, 사람들은 그러한 무지 때문에 불의해지거나 일반적으로 나쁜 사람이 된다.”라고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신뢰하고, 적절한 지도와 훈련을 거치면 모든 사람이 이성을 발현해서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떻게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인간이 되었든 누구나 이성의 단초를 갖고 태어나는데 잘못된 습관을 들이거나 적절한 훈련을 받지 못해 나쁜 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은 최고의 미덕인 중용에 이를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중용이 무엇인가?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은 그런 상태에 이르는 것을 중용이라고 부르는데, 그러한 상태가 무엇인지 인지하고 딱 잘라서 이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카이사르가 중용을 실천한 인간인가, 나폴레옹이 중용을 실천한 인간인가? 마치 인간의 행위와 상태와 미덕,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윤리도 수학처럼 정밀하게 재단하고 계산할 수 있음을 전제한다. 좋음이 객관적으로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누가 판단해주냐는 말이다. 죽은 뒤 사람들의 판단도 완전하지는 않다. 완벽한 중용의 미덕을 실천하고 확정지을 수 있는 존재자는 아마 신밖에 없지 않을까? 이러한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초의 원인이자 부동의 존재자로서 신을 요청한다. 먼저 사물들을 관찰하고 좋은 특성들을 꼽은 뒤 신이라는 존재가 가져야 하는 여러 특성들을 사변적으로 따져간다. 그리고 그는 그 특성들을 만족시키는 존재는 신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 그래서 모든 질서를 관장하고 세계를 합리적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신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피안의 세계를 가정한다. 스콜라 철학이 말하는 신도 이러한 철학에 기초를 둔 것일 테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런 아리스토텔레스를 두고 순진하다고 말할 것이다. 합리적인 질서 또는 신이 있다면 세계가 이렇게 고통스럽고 불행할 리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특히 신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더욱 그렇다. 반대로 쇼펜하우어는 인간과 세계가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본다. 이때의 맹목적인 의지는 인간을 넘어서는, 인간도 이해할 수 없는 욕망과 충동 같은 우주적인 힘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난이나 질병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그게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것인가? 우리는 우리의 두려움을 우리의 뜻대로 통제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렇지 못한 측면이 더 많다. 이성이 비이성을 통제하기는커녕 비이성에 끌려가기에 바쁘다. 이성은 욕망이 사고 친 걸 뒤따라가면서 사고가 아닌 것처럼 포장하거나 변명해 주는 기능을 한다. 또한 삶에의 의지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욕구하는데 그것을 얻자마다 또 다른 무언가를 욕구한다. 이 끝없는 의지는 본질적으로 충족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비극적인 고뇌의 세계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와 염인주의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상 자체를 좋은 것, 삶 자체를 즐거운 것으로 긍정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인간 존재 자체를 본성적으로 좋은 것으로 여기는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와 친구 또한 근본적으로 선하지만, 쇼펜하우어는 반대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실천 강령에 있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르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고통스러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공동체는 나 자신과 마찬가지로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지배당하는 불쌍한 군중들의 집합과 마찬가지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명예는 한 개인에게 수여되는 공동체의 합리적인 동의와 인정이고 좋은 가치를 지니는 것인 반면 쇼펜하우어가 명예를 군중들의 어리석은 변덕과 불합리한 것으로 치부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인간의 머릿속에 든 대부분의 견해는 불합리하고 그릇되고 불합리하며 대부분은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또 쇼펜하우어는 아리스토텔레스보다 개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궁극적으로 공동체는 신뢰할 만한 것이고, 좋은 사람은 공동체에서 자신의 미덕을 발휘해서 공동체를 더 좋게 만드는 사명을 띤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했다. 그래서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고, 공동체에 속한 개인으로서 공동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고 보았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개인의 가치는 공동체와 무관하게 결정된다고 보았다. 아마도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시대와 쇼펜하우어가 살았던 시대가 다르고 그 둘이 처했던 환경이 다른 데에서 기인한 이유가 클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직접민주정치를 실현하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시민이었고, 이러한 현실 속에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사유를 치열하게 전개해나갔다. 반면에 쇼펜하우어는 중세라는 시기를 거쳐 프랑스 혁명과 시민 혁명을 목도했으며 모든 사람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정치가 전문적인 영역으로 분리된 시대에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해나갔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산다는 것은 곧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쇼펜하우어에게는 아니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한테 있어서는 공동체 내의 구성원으로서의 미덕이 쇼펜하우어보다 더 중요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쇼펜하우어와 아리스토텔레스 둘 다 이성으로서 욕망을 통제하는 것을 삶의 모범이자 이상으로 삼는다. 니체는 아예 이 둘을 싸잡아 비판하는 듯하다. 특히 쇼펜하우어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자기계발의 측면에서 접근한 나를 두고 하는 말인 듯해서 더 뜨끔하다. 니체는 마지막 인간을 강하게 비판하는데, 마지막 인간을 행복을 최고 가치로 두고 안락한 삶을 좇는 인간이라고 하면서, “자기 자신을 더는 경멸할 줄 모르는 더없이 경멸스러운 인간의 시대가 오고 있다.”라고 한다. 세계를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추동된다고 본 점에서는 쇼펜하우어와 니체는 비슷하지만,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금욕적 이상주의에 빠진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가 욕망을 억제함으로서 삶의 고통을 회피하려고 한다고 니체는 생각했다. 니체는 삶의 고통도 긍정하고, 욕망 또한 나쁜 게 아니라고 했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상에서 갖는 최종 목표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그로서 인간은 원대한 이상을 품고 가치를 창출해내는 자기극복을 실현할 기회를 박탈당했다고 니체는 생각했다. 그렇지만 결국 어쩌란 말인가?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며 ‘영원회귀’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로서는 쇼펜하우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차라리 와 닿는다. 나는 니체를 이해하기가 제일 어려운데 니체는 왜 그렇게 이해할 수 없을까? 아마 니체의 과격함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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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었습니다. 전공자도 아니신데 이런 이해가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중간중간에 논리적으로 갭이 있거나, 단락이 정돈이 안 된 느낌을 가끔 받았지만, 크게 신경쓰이는 정도는 아니었고, 전체적으로 좋은 글인 것 같습니다. 특히 1번은 흔히 말하는 철학적 글에서 보기 힘든 문학적 형태의 글 같은데, 일반적으로 보기 힘든 글이 있어서 더 흥미로웠네요.

이 글은 흔히 말하는 요약문 (exegesis) 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요약은 철학 글에서 중요한 부분이며, 일반적으로 텀페이퍼를 채점할 때도 요약 점수 배정을 70프로 정도로 배정하기도 하죠. @surenai 님이 앞으로 갈 방향은 본인의 의견을 피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쇼펜하우어를 비교했으면, 누가 더 말이 되는 것 같은지 주장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지만 쇼펜하우어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반대하는 이유는 이것인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 반박은 적용될 수 가 없다" 와 같은 주장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흔히 말하는 글의 절정이겠죠. 끝에 니체 부분 대신 이런 주장을 하나 넣는다면 괜찮은 철학 에세이가 될 것 같습니다 (앞에서 쇼펜하우어와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니체 얘기가 나오니 당황스러웠습니다.). 이 글 쓰느라 수고하셨습니다.

+) 저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쇼펜하우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 이 글이 말하는 것이 맞는지 틀린지에 대한 코멘트를 할 수 없다는 점 감안하셔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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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학술적 목적으로 작성된 글이 아니고, 이런저런 사건들 및 개인적 경험들과 엮어서 소감을 진술하는 수필 내지 독후감으로 보입니다. 이를 감안해서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욕망을 절제하라고 가르치지 않는 윤리학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철학사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철학자들이 욕망을 절제하라고 가르칩니다. 철학사 내에서 아주 거칠게 "쾌락주의자"들로 분류되는 에피쿠로스주의자들도 욕망을 무제한으로 발산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 철학을 "욕망의 절제를 가르치는 윤리학"의 범주로 넣었을 때 소크라테스-플라톤에서 유가 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윤리학들과 공통분모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욕망의 절제를 주장하는가가 각 윤리학을 변별해주는 결정적인, 중요한 차이입니다. 아시다시피 쇼펜하우어가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품성적 탁월성을 함양해서 잘 행위하고 좋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유학자들처럼 덕을 함양하고 성인의 도를 본받아 융성하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 속에서 조금이나마 고통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이 를 답하는 일이야말로 철학을 철학이게끔 하는 과제이고, 그렇지 않으면 윤리학은 단순한 처세술 모음이나 격언집 같은 좋은 말 모음과 유의미하게 변별될 수 없을 것입니다.

둘째 문단은 전체적으로 요약인지, 자신의 입장에 대한 논증인지, 아니면 감상인지가 모호합니다. 대략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와 쇼펜하우어를 이성주의/비이성주의, 공동체주의/개인주의로 비교 요약하는 구성을 취하는 듯하지만, 중간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비판이 등장하는가 하면, 말미에는 니체의 비판에 대한 재비판이 (개인적인 감상과 함께) 있습니다. 각 철학자들의 주장을 요약하고 그에 대해 입장을 논증하거나, 아니면 개인적인 감상(내가 이러이러하게 느끼는 이유)을 상세하게 적거나 하는 편이 좋은 것 같습니다.

세부적으로 말하자면, 일단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도 수학처럼 정밀하게 재단하고 계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서술은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용의 정의로 거부한 산술적 중간에 가까운 개념으로 보입니다. "가령 10은 많고 2는 적다고 한다면, 대상에 따른 중간으로 6을 취한다. [...] 이것이 산술적 비례를 따르는 중간이다. 그러나 우리와의 관계에서 중간은 이렇게 취해서는 안 된다."(1106a35-1106b1)

중용은 "마땅히 그래야 할 때에,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서,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감정을 갖는 것"입니다(1106b21-24). 그런데 이 정의가 정말로 본문에서 서술한 대로 절대적 기준을 요구해야만 성립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소매치기가 지갑을 훔쳐가는 광경을 목격했을 때 그에 마땅한 분노의 감정을 갖는 일이 좋다는 주장은, 수학적으로 정확한 기준이나 절대적인 기준을 요구하지 않더라도 성립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설령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생각했다고 치더라도 말입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가 "피안의 세계를 가정"한다는 해석에 대해 저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신은 기독교의 신이 아닙니다.

마지막으로, 니체에 대한 재비판이 제대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니체의 입장이 틀렸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적절한 근거를 제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글에서는 그러한 근거가 보이지 않습니다. 니체에 반하여 아리스토텔레스와 쇼펜하우어를 다시 옹호하기 위해서는, 본문에서 무엇인지 모르겠으며 이해하기 어렵다고 서술되어 있는 '초인'과 '영원회귀' 등의 개념을 사용하는 니체의 주장이 정확히 무엇이고, 그 근거가 무엇이며, 그게 왜 문제가 있는지를 입증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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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네요.

이 부분에 혹시 더 아시는 게 있나요? 두 종류의 중간을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 같은데, 그 차이가 뭐길래 하나는 산술적 비례를 따르고 다른 건 안 따르나요? 물론 아리스토텔레스 전공이 아니신 건 알지만 너무 흥미로워서 답글 달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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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을 나눌 때에는 "대상 자체에 따라 이야기될 수도 있고, 우리와의 관계에 따라 이야기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1106a28-29). 이때 전자가 @TheNewHegel 님이 말씀하신 "산술적 비례를 따르는 중간"입니다(1106a36). 예컨대 6은 2와 10 사이에 똑같은 거리차를 두고 있다는 의미에서 중간입니다. 후자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음식 섭취의 예를 드는데, 운동선수에게 적합한 양의 음식이 있고 아이에게 적합한 양의 음식이 있는 것입니다. 운동선수에게 아이가 먹기에 적절한 0.5공기의 밥을 제공해주면 이것은 운동선수에게 적절하지 않은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중간은 개별적인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고, 우리와의 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탁월성과 관계된 중용(마땅히 그래야 할 때에,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에 대해, 마땅히 그래야 할 목적을 위해서, 또 마땅히 그래야 할 방식으로 감정을 갖는 것)을 논할 때에는 두 번째 중간을 아리스토텔레스가 염두에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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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histen 님께서 훌륭하게 설명해주셔서 뭐라 덧붙일 것이 없네요. 그 말씀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상 자체에서의 중간'과 '우리와의 관계에서의 중간'을 나누는데, 이는 중용을 정의할 때 도입되는 구별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용의 품성상태'로서 탁월성을 정의할 때에는 후자의 중간 개념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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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좋은 설명 감사합니다.

글을 읽어봐주시고 흥미롭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부족한 부분을 잘 지도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New Hegel님 말씀에 전체적으로 다 동의합니다. 특히 산술적 중간에 대한 부분은 저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큰 실수를 한 거 같습니다. 또한 제 글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인사이트도 많이 얻었습니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용과 좋음을 판단할 만한 객관적 기준을 상정하고 있다고 제가 쓴 데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 뉴헤겔님의 의견도 궁금합니다.
-"적절한 때, 적절한 일, 적절한 사람을 향해, 적절한 동기와 적절한 방식"으로 행위하는 것을 중용으로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이러한 적절함을 판단할 만한 객관적 기준이 그 스스로에게는 존재하지 않았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객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적절함이란 추상적이고 상대적인 것이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스로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목적(행복,미덕)"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지 않나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적절함이란 게 상당히 모호하고 추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건을 훔치는 건 단순하고 본성에 기인하지만 다른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전장에서 헥토르가 욕을 듣기 싫어서 명예롭게 싸웠다고 하는데, 이는 다른 시대의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적절한 용기가 아니라 무모함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적절함이란 게 이렇게 상대적이고 추상적인 것이라면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목적 내지는 미덕을 탐구한다고 말하기에는 어렵지 않나 싶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도 별개로 누구나 중용의 정의를 접하면 "그래서 그 마땅함이 무엇인데?"라는 질문에 맞닥뜨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소매치기 문제가 아닌 보다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 시대나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거라면 사실 저는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라서 위의 글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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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쪽으로 생각이 기웁니다. 물론 @surenai 님의 생각이기 때문에 글에서 쓰셨던 것처럼 사실처럼 말할 순 없지만, 충분히 생각해볼만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계산이 불가능하다고 저작에서 언급한 것이 없다면, 충분히 여지는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수학과 다르다고 하지만, 수학과 다르다고 해서 계산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닐 수 있으니깐요.).

아리스토텔레스 당시의 아테네 정치체제에 대해 모를 분이 아닐 것 같은데 정확하지 않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 정치체제는 극히 제한된 직접 민주제였습니다. 노예 제도가 있었고 노예는 여성과 더불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노예의 비율은 전체인구의 30~35%에 달했습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제한을 의문시하지 않았을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태생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이성적인 판단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잠재력을 덜 지니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민주제를 최상의 정치체제가 아니라고 보기도 했습니다.

니체는 세계를 비합리적이고 맹목적인 의지에 의해 추동된다고 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 보는 것은 과거에는 니체에 대해 갖기 쉬운 인상이었지만 요즘에는 니체의 사상에 접근하기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많이 쉬워져 그렇지 않습니다.

지적해주신 대로 정확한 표현은 아닌 듯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처한 시대와 환경은 개인의 관념이 서양의 근대보다 덜 발달하였다는 의미를 잘 풀어내지 못한 거 같습니다. 서구의 근대가 개인에게 부여한 가치가 고대 아테네는 상대적으로 덜하지 않았을까, 일종의 근대가 발명한 인본적 개인주의라는 가치를 강조하고 싶었던 거고 쇼펜하우어도 이 영향을 받았을 거라는 건데 이 생각을 좀 더 정교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에 참여할 자격과 조건이 부여된 시민이라면 모두가 정치에 참여하는 게 마땅하다고 보았던 시대와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미로서, 큰 틀에서 보면 공동체의 미덕을 쇼펜하우어보다 상대적으로 중요시하게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말씀해주신 부분 참고하겠습니다.

그 말씀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 나아가 행복의 기준이 객관적이라고 보았고, 그 기준을 명확히 밝히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도 인정합니다(1109a24-29).

한데 제가 보기에 여기서 '적절함'이라는 용어에서 발생하는 모호성과 추상성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론의 결점을 드러낸다기보다는 우리가 이 용어를 세부적인 개별 탁월성들에 따라 생각하지 않고 뭉뚱그려서 취급하고 있는 데에 기인합니다. 일단 적절함 자체를 일반적으로 정의할 기준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요구한다면, 이는 부당한 요구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각각의 탁월성(통이 큼, 용기, 온화 등)에 따라, 그리고 각 탁월성을 구성하는 척도들(시간, 대상, 강도 등)에 따라 적절함의 각 내용이 상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용기에 관해서 두려워할 대상의 적절함을 판단하는 기준과 두려움의 강도의 적절함을 판단하는 기준은 (여전히 객관적이지만)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바로 이 점이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에 반하여 강조하고자 했던 바입니다.

한편, 수많은 개별 탁월성들과 관련한 여러 개별 척도들의 적절함을 판단할 기준들을 모두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일 역시 과도한 요구로 보입니다. 그런 요구는 윤리학이 아니라 결의론(casuistry)만이 충족할 수 있는 요구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소매치기에 대해 5분에서 10분 사이에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정도로 화를 내는 사람은 의롭다" 같은 행위지침을 제시하는 일은 윤리학의 과제가 아닙니다. 사실 저는, 많은 윤리학 이론과 달리 오히려 일반적인 탁월성 개념에 대한 논의에 머무르지 않고 구체적인 탁월성들을 제시하고, 나아가 이 탁월성을 충족할 수 있는 다층적인 척도들을 제시한다는 점으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이례적인 구체성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울러 적절함의 기준이 시대나 관점에 따라 달라지면 별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가능한 비판이지만, 이에 대해 저는 다른 의견을 갖고 있습니다. 중용, 탁월성, 좋음, 행복 등의 정의가 시대나 문화권 등에 따라 달라진다고 말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에 대해 틀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와 같은 개념들을 탐구하는 일이 단순히 무의미해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각 시대나 문화권에서 무엇을 좋은 행위로 제시하는지 알아보고, 왜 그렇게 생각되는지를 따져보고, 과연 그 이유가 타당한지 아닌지를 검토해서 옹호하거나 비판하고, 좋은 행위에 대한 상이한 기준들을 서로 비교해보는 작업은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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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적인 지식들에서 일반적, 보편적, 전체적인 지식과 근거를 탐구하는 것이 형이상학이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기획이 이를 시도하기 때문에 저는 과도한 요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일반적으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개별 덕목들도 지나침/모자람이라는 기준과 척도로 수렴된다고 봐서 제 생각도 여기에 한정된 것입니다.

의미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는 수긍이 되네요.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의 일반적인 정의를 제시하려 한다고 해서, 개별 탁월성들에서 이야기되는 지나침/모자람을 모두 단일하게 "수렴"시킬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지나침과 모자람은 단일하고 동종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나의 탁월성을 구성하는 각 척도의 지나침과 모자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입니다. 그래야만 중용이 원의 중심을 잡는 일(1109a24-25)과 같다는 비유, 또 "잘못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범할 수 있는 반면 [...] 올곧게 성공하는 것은 한 가지 방식으로만 가능하다"(1106b-29-33)는 그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Hursthouse, R. (2006). The Central Doctrine of the Mean. In R. Kraut ed., The Blackwell Guide to Aristotle's Nicomachean Ethics (pp. 96-115). pp. 107-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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