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르노의 영화 매체 비판에 대한 단상

논문 결론 부분 작성하다가.... 무언가 집중이 안되기도 하고 결론 부분에서 제시되어야 할 근본적인 대답을 솔직히 아직도 찾지 못한 것 같아서 잡념 삼아 남겨봅니다.

아도르노는 영화 매체의 사실주의적 성격이 영화 관람자들로 하여금 총체성의 이념을 학습게 만든다는 점에서 영화 매체르ㄹ 굉장히 부정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라고 적으면 안될 것 같지만 이곳에 제 논문 전문을 업로드 할 생각은 없기 때문에 대충 그렇다고 하고 넘어가주시길...)

그런데 아도르노는 그의 활동 시대에 동시대적으로 존재했던 소위 '누벨바그' 영화의 존재를 몰랐던 것일까요? 혹은 알고도 모른 척 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알았지만 별로 중요하게 생각은 안 했던 것일까요??

일전에 지도교수님과 대화 해본 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때는 아도르노가 이미 너무 고령이었고 (누벨바그 운동은 대충 60년대 초반?에 생겼다고 보면 됩니다. 아도르노는 제가 알기로 69년에 작고하셨습니다.) 68 학생 운동과 관련한 정치적 / 일신상의 건강 이슈 등등으로 계속 학술적으로 활성화 되어있는 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라는 대답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누벨바그 운동에 대한 설명은 아래의 링크로 갈음합니다. 누벨 바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어찌됐든 그래서 제 논문의 결론은 '아도르노의 영화 매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완전히 균형적인 것은 아니다. 영화 매체의 사실주의적 성격이 만들어내는 총체성에 대한 반성은 영화 매체 내부에서부터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영화 매체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적 시각은 재고되어야만 한다.' 라는 것인데, 개인적으로는 아도르노가 누벨바그 운동을 모르고 있었을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왜냐하면 아도르노는 동시대 독일에서 발생한 오버하우젠 선언/운동 에 대해서는 분명히 지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운동 또한 큰 맥락에서 누벨바그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주장을 제가 믿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혹시 꼭 아카데믹한 텍스트가 아니더라도 각종 매체 자료에서 누벨바그나 영화 매체에 대한 아도르노의 언급을 공유해 주실 수 있는 분 계시다면 정말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1)

이 결론이 정말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인지 저는 의문이 듭니다.

누벨바그를 알았냐, 아도르노가 그에 대해 쓴 글이 있냐 등의 서지적 사실을 배제하고 그렇습니다.

말하신 바에 따르면 아도르노의 영화 비판은 (i) 영화의 사실주의적 성격과 (ii) 그로 인한 총체성의 이념 학습 때문인듯합니다. 그렇다면 핵심은 누벨바그 영화가 정말 이 두 가지 혐의를 벗어날 수 있는가? 일겁니다.

사실주의적 성격과 총체성의 이념이 무엇인지 이 글만으로는 짐작이 되지 않고 왜 누벨바그 영화가 이 혐의를 벗어난다 여기시는지도 이 글만으로는 전혀 알 수가 없네요.

(2)

누벨바그 영화가 일반적인 극 영화 관습은 살짝 빗겨간 것은 사실이고, 특히 고다르의 몇 영화는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의도했다는 점에서 아도르노의 비판에서 예외일지도 모릅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에) 대다수 누벨바그 영화는 형식적으로 볼 때 옛 영화들과 별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아도르노가 정말 자신의 견해를 철회했을지 의문이네요.

(3)

그리고 전 여전히 왜 작성자님이 그리 확신을 가시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에야 누벨바그가 거대하지만, 60년대 누벨바그가 누구나 다 알았을 지성계의 화두였을까요?
아직 영화는 필름 상영이라서, 미국 영화나 자국 영화가 아니면 특별한 영화제에 가서야만 볼 수 있었던 시대에 말이죠.
(게다가 아도르노가 정말 그정도 열정이 있는 시네필리아였는지도 살짝 물음표이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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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호기심으로 Chat GPT 옹에게 물어보았더니, 아도르노와 누벨바그 사이에 documented connection은 없다고 하네요 :rofl:

그런데 만약 이것이 결론의 전부라면, 뭔가 김샌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아도르노의 미학이론도, 영화사도 잘 알지 못하지만, 아도르노의 미학이론이 단순히 누벨바그라는 사조가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의해서 쉽게 반박되는 종류의 것일까요? 모든 철학적 사상은 시의성을 가지기 때문에 (아도르노가 누벨바그를 몰랐다는 전제 하에) 누벨바그의 존재가 아도르노 이론의 약점으로 충분히 작용할 수 있지만 단지 이것만으로 아도르노의 이론이 재고되어야 한다면, 이러한 결론이 아도르노의 이론을 너무 사소하고 볼품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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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도르노의 영화론은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분야입니다. 아도르노는 재즈와 영화를 대체로 부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영화의 경우엔 예술 작품이 될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 "영화 매체의 사실주의적 성격이 만들어내는 총체성에 대한 반성은 영화 매체 내부에서부터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는 문장의 의미가 불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서 '총체성'은 무엇인가요? 리얼리즘이 사회 전체의 재현을 추구한다는 뜻인가요? 영화 매체의 '내부'는 뭘 가리키는 것인가요? 영화가 자신의 사실주의적 성격을 반성하고 있었다는 뜻인가요? 더 구체적인 설명과 예시가 필요해 보입니다.

  • 영화에 대한 아도르노의 고찰은 『계몽의 변증법』에 나오는 「문화산업: 대중 기만으로서 계몽」, 「영화 슬라이드 필름들 Filmtransparente」(흔히 사용되는 '영화의 투명성'이라는 번역은 부적절해 보입니다)에 나오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밤 La Notte》(1961)에 대한 긍정적 평가, 「두 번 만난 채플린」, 『영화를 위한 작곡』, 그리고 서간집에 산재해 있습니다. 유튜브에 찾아보니까 아도르노가 1968년에 영화 비평가와 토론한 라디오 방송이 있네요. 제목은 "영화관은 극장을 밀어내는가?"입니다. Verdrängt das Kino das Theater?

  • 아도르노는 근본적으로 대중 매체와 오락 산업 자체를 매우 불신하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대중들이 저녁이나 휴일에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를 일종의 현실 도피로 보고, 텔레비전을 소비 사회를 교육시키는 이데올로기 매체로 보았습니다.

  • 아도르노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영화 감독 장뤽 고다르는 1995년에 프랑크푸르트 시에서 아도르노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고다르는 아도르노에 대해 할 말이 별로 없었던 듯 합니다. [장뤽 고다르 추모 연속 기획③] 연표로 보는 고다르의 생애 - 1991년부터 2022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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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길 출판사에서 『음악의 사회적 상황에 대하여/음악의 물신 성격과 듣기의 퇴행 외』라는 제목으로 아도르노 에세이집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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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벨바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따져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도르노가 살아있던 당대에도 누벨바그에 대한 평가가 지금과 같았는지, 아니면 이제 막 등장한 새로운 사조로 여겨졌기 때문에 아직 '역사적' 평가를 판단하기에는 이른 시기가 아니었는지요.

또한 누벨바그가 총체성(모더니즘)을 반복재생산하는 기존 영화 전통에 반기를 든 것은 맞지만 '사실주의' 사조에 반한 것인지는 좀 더 빠져보아야 할 듯 합니다. 누벨바그가 가능했던 기반 중 하나는 휴대가 가능한 8mm필름 카메라의 출시 때문이었는데, (기존의 영화 카메라는 너무 무거워서 이동이 불리했습니다.) 이 휴대용 필름 카메라로 이루어졌던 누벨바그나 시네마 베리테 같은 시도는 어떤 현장을 꾸임없이 '그대로' 혹은 '그대로 찍은 것처럼'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것이었거든요. 링크하신 위키백과의 누벨바그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그래서 누벨바그 영화들은 현장성이 강조된 다큐멘터리나 사실주의와 잘 조응했구요.

더불어 아도르노가 영화라는 매체의 대중생산적인 성격, 즉 영화관이라는 폐쇄공간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같은 화면을 봄으로써 '다중'이 형성되는 현상 또는 그러한 다중을 끌어모으기 위한 대중영화를 비판적으로 보았지만, 영화라는 매체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았는지 역시 보다 정확하게 짚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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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원글을 게시한지가 벌써 3개월이 됐네요. 당시 11월부터 논문 심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었는데... 뭔가 많이 잘못 되었음을 깨닫고 황급히 현실로 도피했었습니다. 양해해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영화 매체의 사실주의적 성격이 만들어내는 총체성에 대한 반성은 영화 매체 내부에서부터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는 문장의 의미가 불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서 '총체성'은 무엇인가요? 리얼리즘이 사회 전체의 재현을 추구한다는 뜻인가요? 영화 매체의 '내부'는 뭘 가리키는 것인가요? 영화가 자신의 사실주의적 성격을 반성하고 있었다는 뜻인가요? 더 구체적인 설명과 예시가 필요해 보입니다.

  1. 우선 영화 매체의 사실주의적 성격이 총체성을 만들어낸다는 제 언술을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보겠습니다. 영화 매체는 그 특성상 현존에 대한 기술적인 복제를 실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영화적 재현에서는 본래 현존하던 대상이 놓여있던 사회 및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매우 직접적으로 관람자들에게 제시할 수 있게 되었고요.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대상에 대한 파악이란, 그 대상이 놓여있는 사회/역사적 매개를 거쳐서 비로소 더욱 완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겠죠. (단순하게 말해서, '사과는 사과이다'라는 언술은 사과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제시해주지 못 할 것입니다. 사과는 둥근 구체 모양을 하고 있으며, 그 표면은 빨갛고, 씹으면 단맛이 난다. 이 과실 나무는 고대의 a라는 나무로부터 진화되어 탄생하였고 성경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불충의 상징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등등.) 하지만 시각 매체에서 현존에 대한 묘사는 이런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서사를 통해 특정 인물이나 상황에 대한 맥락을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사 상에서의 맥락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재현된 대상에 대한 맥락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니까요. 제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이렇듯 시각 매체가 매개성을 상실시켜버리고서는, 관람객들의 사유를 단순화시키게 된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이것을 '총체성'이라고 표현하였던 것 같습니다. (후에 제 논문에서 '총체성'이라는 용어를 '직접성'과 '사유의 표준화', 혹은 짧게 '표준화'로 수정하였습니다.) 아도르노가 지적한 영화 매체의 지극히 사실주의적인 성격이 자아내는 문제점은, <<계몽의 변증법>> 191-192 페이지 부분을 통해서 단적으로 읽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국문본 기준입니다.)

"바깥의 거리는 방금 본 영화의 연속임을 깨닫는 - (...) - 관람객의 오랜 경험은 이제 영화 제작의 지침이 되었다. 제작기술이 경험 대상을 빈틈없이 정확하게 재현할수록 바깥의 세상은 영화에서 본 세상의 정확한 연장이라는 환상이 쉽게 퍼져나간다. (...) 유성영화는 관람자가 줄거리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사건의 흐름에서 자유롭게 빠져나와 이런저런 상상과 반성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제물들로 하여금 영화를 현실과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도록 유도한다."

  1. 영화 매체의 '내부'란 1950년대 당시 프랑스 영화계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철학계나 대중들에 의해서 영화 매체의 표준화가 반성되기 이전부터 이미 영화계가 자체적으로 그러한 현상을 지각하고 있었으며 또한 그에 대해 반성을 시도했다 (특히 누벨바그 감독들에 의해서) 는 것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댓글이 이상한 곳에 덧붙여져서 지우고 그대로 복사하려니 게재가 안되네요. 그래서 의미 없는 몇문장 더 보태봅니다.

  2. 기타 적어주신 다른 내용들은 바로 확인해보겠습니다. 공부하는 데에 자료를 제공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마찬가지로 댓글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한 이렇게 답변이 늦어진 것도 죄송합니다.

  1. 아도르노에 대한 제 비판에 의문을 표해주셨는데, 저는 여전히 영화 매체에 대한 아도르노의 시각이 공평하지 못했고 영화 매체가 생성해내는 사유의 표준화 (reflex님에 대한 제 답글을 참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에 대한 반성이 프랑스 영화계에서 이미 발생했었다고 생각합니다. 역시나 가장 큰 쟁점은 아도르노의 저작 활동 후기에 이미 공존하고 있었던 '누벨바그' 운동 때문인데요, (앞서 말했듯 Mandala님께서 지적하신 '영화 매체의 사실주의적 성격과 그러한 성격에 의해 재생산되는 총체성의 이념'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reflex님의 댓글에 대한 제 답변으로 갈음하도록 하겠습니다.) 누벨바그 영화는 이전 시대에 이루어졌던 전형적인 영화 창작의 문법을 철저하게 깨부숩니다. 누벨바그 영화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관람자들이 영화를 통해 재현되는 대상의 매개성, 즉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대상이 현재 극이라는 형태 안에 새롭게 위치된 것이며 그것이 본래 놓여있었던 현실 안에서의 사회/역사적인 맥락 또한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주는데 바로 이 매개성이라는 것이 곧 아도르노가 본인의 미학 이론을 전개하는 과정에 핵심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저는 누벨바그 영화가 오히려 아도르노가 제시하는 미학적 요인을 발현시키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생각합니다.

  2. 저는 오히려 왜 Mandala님께서 "누벨바그 영화가 일반적인 극 영화 관습은 살짝 빗겨간 것은 사실이고, 특히 고다르의 몇 영화는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의도했다는 점에서 아도르노의 비판에서 예외일지도 모릅니다만" 이라고 생각하심에도 불구하고 아도르노가 그 자신의 견해를 철회했을지 의문이라고 말씀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물론 저도 아도르노가 영화 매체 비판에 대한 그 자신의 의견을 전적으로 철회해야한다는 것을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Mandala님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모든 개별적인 영화 작품이 아도르노의 비판에 들어맞는 것은 아니며 특히 누벨바그 운동 같이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들어낸 영화적 운동이 있었다면 이에 대한 코멘트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이 학자로서의 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대다수 누벨바그 영화는 형식적으로 볼 때 옛 영화들과 별 차이가 없다" 라고 언급하셨는데, 누벨바그의 기수라고 말할 수 있을 프랑수와 트뤼포는 그의 에세이 A Certain Tendency in French Film 에서 기존 프랑스 영화의 창작 방법과 분명한 단절을 선언합니다.

  3. 이 부분 또한 짧은 코멘트임에도 불구하고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들어주신 부분입니다. 그래서 후에 제 논문의 방향성은 "아도르노가 그 자신의 영화에 대한 관점을 수정해야한다" 는 제 주장은 후에 "아도르노의 미학적 관점에 상응하는 영화적 움직임 또한 존재했었다. 따라서, 아도르노의 미학 이론 자체에 이미 영화 매체의 미학적 가능성은 내재되어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와 같이 수정되었습니다. 논문을 작성하는데에 있어 정말 감사한 코멘트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코멘트 남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코멘트 또한 제 논문의 방향성을 수정하는데에 정말 많은 영향을 주셨습니다. 다만 Herb님께서 제시해주신 쟁점은 이미 Mandala님과 reflex님에 대한 답글을 달면서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자면, 결론적으로 제 논문의 방향성이 얼마간 수정되었습니다. "아도르노의 주장은 누벨바그 운동의 존재로 인해서 반박되는 부분이 있다. 따라서 영화 매체에 대한 아도르노의 비판적 시각은 재고되어야만 한다." 라는 부분은 후에

"(아도르노가 누벨바그의 존재를 알았건 몰랐건 간에, 혹은 그러한 사실관계와는 상관없이) 아도르노가 예술의 구성 요소 중 한 부분으로서 제시하는 '매개성'이라는 이념에 대해서 이미 누벨바그 운동은 자각하고 있었고 이 운동은 기존의 영화 창작 방법에 의해서 제거되었던 매개성을 새로운 영화 창작 방법을 통해서 다시금 실현시켰다. 이는 곧 아도르노의 미학적 관점에 상응하는 영화적 움직임 또한 존재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아도르노의 미학 이론 자체에 이미 영화 매체의 미학적 가능성은 내재되어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로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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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지점에 있어서 명확한 논의가 필요한 듯합니다. 트뤼포, 고다르 혹은 "누벨바그"라 부르는 사람들은 "기존 프랑스 영화의 창작 방법"과 단절을 선언한 것은 맞습니다. 다만 이는 프랑스 영화/미국 할리우드 영화라는 큰 구분 틀 속에서 그러하다는 점이 제가 아는 바입니다.

트뤼포가 명명한 "기존 프랑스 영화"를 가장 잘 나타내는 감독으로는 장 르누아르가 있겠지요. 연극 같은 세트 속에서 (크레인을 포함한) 카메라의 롱 테이크를 통해 장면을 잡아내는, (상대적으로) 연극에 가까운 전통입니다. (후대에 이 전통을 계승한 사람으로는 막스 오퓔스가 있겠습니다.)(위로 올라가자면, 프랑스의 시네마 다르 같은 것들이 있겠지요.)
이러한 연극적 전통에 반기를 들어서, 트뤼포/고다르/샤브롤은 히치콕으로 대표되는, 하나의 씬을 롱테이크로 잡는 것이 아닌 짧은 컷들의 연쇄를 통해 속도감을 올려야 한다고 보았다 전 생각합니다. (이는 적어도 고다르의 데뷔작인 <네 멋대로 해라>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에서 꽤 자주 등장하는 점프 컷을 통해서 여실히 드러난가 생각됩니다.)

(게다가 이러한 공통점은 고다르, 트뤼포, 샤브롤의 초창기 영화에만 해당하는 사항일뿐, 이 감독들은 커리어가 발전해 나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점도 간략하게 언급해야 되겠네요.)

(2)

우선 아도르노의 영화 비판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아도르노가 프랑스 영화보다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더 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1차 세계 대전 이후 - 2차 세계 대전 사이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생산한 국가는 미국이고, (정확한 통계 자료는 기억이 안나지만) 독일 내 상영 영화의 50프로 이상은 미국영화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감안하면, 아도르노의 영화 비판에서, 비판되는 영화의 형식적 특성은 "미국 영화"도 분명 포함되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미국 영화를 따라가자고 했던) 누벨바그 역시, 아도르노의 영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누벨바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따져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도르노가 살아있던 당대에도 누벨바그에 대한 평가가 지금과 같았는지, 아니면 이제 막 등장한 새로운 사조로 여겨졌기 때문에 아직 '역사적' 평가를 판단하기에는 이른 시기가 아니었는지요.

충분히 가능하신 말씀이십니다만 오히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저는 더욱 더 제가 이러한 프로젝트를 진행시켜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도르노가 누벨바그 운동과 동시대에 그것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하기가 어려웠다면, 60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는 조금 더 적절한 시기가 되지는 않았을까 하고요.

그런데 저는 Keyahn님께서 말씀하신

누벨바그가 총체성(모더니즘)을 반복재생산하는 기존 영화 전통에 반기를 든 것은 맞지만 '사실주의' 사조에 반한 것인지는 좀 더 빠져보아야 할 듯 합니다. (...) 누벨바그나 시네마 베리테 같은 시도는 어떤 현장을 꾸임없이 '그대로' 혹은 '그대로 찍은 것처럼' 사실적으로 담아내는 것이었거든요. 링크하신 위키백과의 누벨바그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그래서 누벨바그 영화들은 현장성이 강조된 다큐멘터리나 사실주의와 잘 조응했구요.

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누벨바그도 그것이 태생적으로 '영화' 매체인 이상 사실주의적 성격으로부터 완전히 탈피하기란 불가능했겠지만 기존의 영화 창작이 보여주었던 사실주의와는 매우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례로 누벨바그 영화들은 비논리적인 시퀀스나 필름 자체에 대한 물리적인 변형을 통해서 관람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실제적인 사건 그 자체의 현존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재현이라는 사실을 꾸준하게 일깨워줍니다. 범박하게 말하자면, 그것이 비록 사실주의적이긴 하지만 완전한 사실은 아니라는 것이죠.
더군다나 아도르노나 프랑수와 트뤼포는 누벨바그 영화 이전에 존재하던 작품들이 단지 '사실주의적'이기만 할 뿐이지, 온전한 사실 그 자체를 전달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을 전달하는 과정에서도 그것의 교묘한 편집 과정을 통해서 분명히 창작자의 의도가 개입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서는 아도르노가 '친숙한 사실주의' 내지 '사이비 사실주의'라는 용어와 '극단적 자연주의'라는 용어를 대비시키면서 설명한 바 있는데, 혹시 관심이 동하신다면 미니마 모랄리아의 264 - 265 페이지 (국문본 기준입니다.) 를 참고해보시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실 수 있을 듯 합니다.

"이에 비해 영화의 기술적 장치에 의해 현실을 그대로 복사해내는 빈틈없는 그물망 (*곧 '사이비 사실주의'를 의미합니다.) 에서 모든 의도는 - 설사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 거짓이 된다. 듣는 이에게 말하는 이의 성격 또는 전체의 의미를 주입시키려 드는 말은 글자 그대로 충실한 모사와 비교할 때 '부자연스럽게' 들린다. 그런 언어는, 최초의 계획적인 사기나 실질적인 왜곡이 저질러지기도 전에, 미리부터 세계를 그 자체 비슷한 정도로 '의미로 충만한' 것으로 정당화한다. 누구도 그렇게 말하지 않고 누구도 그런식으로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영화는 끊임없이 모두가 그렇게 한다고 억지를 쓴다. 사람들은 함정에 빠지는데, 이 함정은 구체적 의미가 어떨 것인가와는 무관하게 그 자체의 의미에 의해 순응주의가 선험적으로 생산되는 것이다."

참고로 프랑수와 트뤼포 또한 A Certain Tendency in French Film 라는 에세이에서 아도르노의 친숙한 사실주의, 사이비 사실주의에 상응하여 '시적 리얼리즘' 내지 '심리적 리얼리즘' 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