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론의 맥락에서라면 재료는 예술가가 다루는 모든 것이고 소재는 재료 중 하나입니다. 예를 들어 <보바리 부인>의 소재는 간통입니다. 근데 간통을 다루는 소설은 간통을 다루는 소설이지 <보바리 부인>이 아닙니다. 또는 간통을 다루는 소설들이 다 <보바리 부인>같지는 않습니다. 간통이라는 소재 외의 나머지 재료들과 그 재료들을 다루는 방식이 다르면 다른 소설들이 되는 것입니다. 문체가 다를 수가 있고 간통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고 화자의 위치가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술 작품에서 재료(material), 소재(subject matter), 내용(content)을 구별하는 것은 이론에 따라 다 다릅니다. 아도르노 미학을 전공하시는 분 같은데, 아도르노 미학에서 재료, 소재, 내용은 원칙적으로 전부 구별되는데, 실제 작품에서는 그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습니다.
요리에 비유하자면, 재료는 요리를 만들기 전에 사용하는 모든 것입니다. 음식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에는 식재료뿐 아니라 조리 기구, 레시피와 요리책도 있습니다. 미술의 경우에 재료에는 물감, 캔버스, 붓 같은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투시법이나 콜라주 같은 기법도 포함됩니다.
소재는 작가가 현실에서 취하는 것입니다. 『마담 보바리』의 소재는 시골 의사 부인의 간통 사건이고, 『전쟁과 평화』의 소재는 나폴레옹 시대에 프랑스와 러시아 간에 벌어진 전쟁입니다.
내용은 작품 자체에서 형식과 구별할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하나의 작품에서 내용과 형식은 물리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범주적으로만 구별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어떤 작품에서 내용은 정신적인 것이고, 형식은 작품의 제반 요소들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대상을 묘사하지 않는 비구상 회화, 예컨대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의 경우에 내용과 형식을 구별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졸업 논문의 한 섹션에서 어떤 논의가 전개되는지는 제가 잘 모릅니다만은
말씀해주신 재료와 소재가 잘 구분되지 않는 이유는, 담당 교수님께서 '예술' 혹은 '미술'이라는 개념어에 대하여 전통 회화나 조각, 건축 같은 올드 미디어에 이해를 한정하고 계셔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전통 미술의 경우에는 물질적으로 현실화된 것이 곧 그 작품의 재료이자 소재입니다.
하지만 현대 미술로 올 수록 미술작품은 반드시 재료와 소재가 동시에 현전해야할 필요는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재료와 소재의 차이를 설명할 때에, 이 두 개념 사이의 구분이 도드라지는 현대 미술을 중점에 두고 설명하시면 좀 더 매끄러운 설명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돌멩이에 대한 영화를 찍는다고 할 때, 돌멩이는 영화의 소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돌멩이가 영화의 재료인가 하면, 다소 애매합니다. 왜냐하면 완성되어 상영되는 영화 작품에서 돌멩이는 질료(material)로써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 작품은 최종적으로는 필름(film)이나 디지털 파일의 형태로 투사되지, 거기에 돌멩이가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돌멩이는 스크린 안에 있는 것이지 작품에서 물질적 실재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론 돌멩이를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기 위해서는 카메라 앞에 두고 돌멩이를 찍어야 합니다만, 완성된 작품에서 보이는 것은 돌멩이를 찍은 영상이지 실제 돌멩이가 아니지요.
요약하면 소재는 작품의 내용(contents)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재료(material)는 그 내용을 나타내기 위해 물리적으로 현전해야하는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물리적'이라는 점이 중요하지요. 이를테면 디지털 아트에서 돌멩이CG를 사용했다고 그 아트가 돌멩이를 재료로 사용했는가 하면 그렇다고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소재일 수는 있겠지요.
위에서 허브님이 개념미술을 예로 들어주셨는데, 개념미술에서는 또한 작품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 contents이고 이 contents의 바탕에 있는 개념적 기획이 concepts라고 구분해야 할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