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안다는 것

미국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12학년(고3) 학생입니다. 입시를 코앞에 두고, personal essay를 끊임없이 쓰다 보니 여러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이 에세이라는 것 자체가 일정한 분량 이내로 나라는 사람의 인생을 함축하여 어필하는 작업인데... 짧은 인생을 되돌아 보니 끊임없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타인은 절대 내가 될 수 없기 때문에 나를 가장 잘 아는 것은 나라고 생각합니다. 남이 내 머릿속을 들여다볼수도, 내가 느끼는 감정, 감각을 온전히 동일하게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자기 자신이 가장 많이 이해하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다만 저는 삶을 나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군지 이해하고,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을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따라오는 여러 부가적인 가치들이 있겠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스스로를 '아는 것'이라고 바라보는 것이죠. 그렇다면, 남들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 수 없고, 나 자신조차 끊임없이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려고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도달하고자 하는 끝이 과연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인생의 목표를 안다, 진리를 안다' 보다는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 하면 가장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나를 분석하고 남에게 이를 어필하려는 글을 쓰다 보니 아무래도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내가 오히려 어렵게 이해하려고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다만 자신을 이해한다는, 안다는 말이 참으로 독특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 짧게 글 써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국어가 아주 유창하진 않습니다. 철자나 문법적인 오류가 있다면 너그러이 봐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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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는 사뭇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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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맞습니다. 흔히 심리철학에서 '1인칭적 특권'이라 말하는 부분이지요. 다만 '1인칭적 특권'을 통해 '나'가 자신에게 "전부" 드러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의식'에 드러나 있는 부분까지라 전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미 잊어버린 과거의 사건, 우리가 아는 줄 몰랐으나 질문을 받으면 답을 할 수 있는 '어떤 잠재된 믿음들' ("나이지리아에는 왕이 있다 생각해?" - 한번도 이런 생각을 안 해보았더라도, 우리는 뭐라 답을 할 수 있겠죠.), 우리 스스로를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으나 통계적으로 드러나는 여러 편향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1인칭적 특권'으로 접근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오히려 제 3자가 더 나은 답을 제시할 수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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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저는 "나"라는 자아가 변하지 않고 고정되어 있어서, 우리가 끊임없이 "알아 가야 하는 대상", 예컨대, 저 아래 고고학적 지층에 묻힌 유적지처럼 하나하나 발굴해 나가야되는 대상이라 여기는 것에 회의적입니다.

자아란 무엇일까요? 정체성(personal identity)의 문제를 저기로 치워버리고, "나답다."라 여겨지는 범위를 대충 자아라 합시다.
결국 이 '나다움'이란 우리에게 남아있는 기억과, 여러 호르몬과 같은 생화학적 시스템의 결합물처럼 저는 느껴집니다. 예컨대, 다른 특별한 이유 없이 계절성 우울증에 걸려있는 사람에게, 그 우울한 무드는 그 사람의 자아의 일부분일까요? 아니면 참 자아는 다른 곳 어딘가에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생각보다 사람들 쉽게 변하고, 알 수가 없다 전 생각합니다. 예컨대, 실제로 돈이 많아보기 전까지는 우리가 그동안 우리 자신이 가진 정보를 통해 '상상해왔던 자기 자신'과 실제 자기자신이 동일할 것인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본성을 보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권력을 쥐어줘봐라 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남성에 군대를 가셔야 한다면, 군대에서 이걸 체감하실 수도 있으실지 모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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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저는 자아에 대한 탐구가 끝이 없다 생각합니다. 자아와 자아가 아닌 것의 경계조차 불확실하며, 그에 접근할 수 있는 여러 수단 중 무엇이 더 '신빙성 있는지' 때에 따라 불확실하고, 결국 자아로 묶여있는 여러 요소들조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테세우스의 배'라고 하죠.)

그렇다고 제가 회의주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희는 그저 지금 시점 t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정보/믿음을 바탕으로 행동을 하는 것이고, 미래 시점 t에서는 이 정보들이 새로운 경험 등으로 수정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런 개방성 속에서, 자아/자아가 아닌 것의 구분을 고민하기 보단, 나에게 더 좋은 것 - 더 나쁜 것 - 바꿀 수 있는 것과 견뎌야 하는 것이라는 조금 더 '실용적인' 구분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낫다, 개인적으로 여깁니다.

때로 사람은 형이상학 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덫을 만들고, 거기에 사로잡혀 죽기도 하니깐요.
(요즘 문학책을 많이 읽어서 그런지, 굉장히 문학적인 표현들이 자주 나오네요.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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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저의 설명이 부족하였던 듯 합니다. 만달라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나'가 자신에게 "전부" 드러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라는 객관적인 개념이 선행되어야 하는데 그 객관적인 나라는 존재를 정립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전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의식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가 남들이 접근할 수 있는 정보와는 차원이 다르기에 그 정도의 차이를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제 글을 곱씹어보니 답이 없다고 믿으면서도 답이 있기를 바라는 것 같더군요. 정해진 답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직은 힘들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쉽게 변하고, 감정적입니다. 그런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자아의 경계를 정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남이 정한 규칙따위는 없으니까,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으니까, 나는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 나의 것으로 만들고 살아가야 하는 것 같습니다. 역시 삶은 어렵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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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도 '믿음'이 어떻게 생기는지 제대로 답변하지 못합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시간이 지나면 불현듯 (그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 없지만) 어떠한 믿음이 생기곤 한다는 뜻이겠죠.
저를 가르쳐주셨던 교수님이 한 말인데, '무엇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 믿음이 영원불변하고 수정되지 않는 확실한 지표이길 원할 따름이죠. 그리고 이런 것은 드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다시 회의주의로 갈 필요는 없는 것이 "무언가 더 나은" "더 신빙성이 있는" 믿음이 생기곤 합니다. 그게 영원불변하진 않을 수 있지만 말이죠.

이렇게 @notorious 님과 대화를 나누다보니, 제가 생각했던 바가 잘 정리되는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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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학 입시를 하시는군요. 주제 넘게 참견을 해보자면, 미국 입시에서 personal essay는 철학적인 논증보단 문학적인 부분을 더 중요하게 본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나 논증에 오류가 있더라도 너무 신경쓰시지 말고 그걸 어떻게 감명깊게 전달할까 고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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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저도 문학적인 부분에 더욱 초점을 맞춰 작성하려고 합니다.
다만 주제가 철학적인 내용을 담다 보니 생각이 깊어져 글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지원하는 학교와 학과가 특수성을 띄고 있기에 글의 울림과 동시에 철학적인 내용을 어떻게 녹여낼지 고민하다 보니 본질에 대해서 의문점이 생긴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할 때 그것을 하려는 이유를 찾아야 진심을 담은 글이 나오기에 계속 깊게 들어가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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