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하이데거의 유효성에 관하여

일단 저는 하이데거의 후기 저작을 접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이데거 입문서를 통해서 대강의 주제의식은 알 것도 같습니다.)
제가 읽어 본 하이데거의 저서는 존재와 시간 그리고 칸트와 형이상학의 문제 이렇게 두 개 뿐입니다.

제가 궁금한 것은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이 그의 전기 사상에 비해 어떤 측면에서 더 유효한 접근인지를 모르겠습니다.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이 전기 사상과 가장 차이나는 지점은, 후기에 하이데거가 현존재 분석론을 그만두었다는 데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의 질문은, 이걸 그만두는 것이 무슨 이점을 가져오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하이데거의 전기 저작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바는, (비록 진부한 통찰들이 군데군데 껴 있기는 하지만) 바로 이 현존재 분석론에서 그 저작들의 탁월성이 가장 전면적으로 드러난다는 겁니다. (제가 아는 후기의 서술들이 너무나 감상적이고 신화적인 데 비해, 이 글들은 건조하면서도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 의문이 단순히 그의 현존재 분석론이 탁월했는데 그걸 포기해서 아쉽다 수준으로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후기 하이데거 철학에 관한 입문서 수준의 서술들을 보면, 솔직히 괴상망측한 사변으로 읽히기 너무나도 쉬운 내용들이 많이들 적혀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나치 시절을 겪더니 정신이 이상해져서 횔덜린과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과 신비주의에 심취했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으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전기 하이데거의 사상을 계속 떠올려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핵심이 현존재 분석론이라고 한다면, 결국 암묵적으로 현존재 분석론에 관한 내용들을 상당 부분 깔고 가지 않을 수가 없는 것 같은데, 그러면 대체 이걸 왜 논의에서 빼 버렸는가 하는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다루는 주제가 달라졌으니 그렇다고 한다면, 맞는 답인 것 같긴 한데 뭔가 아쉽습니다.) (만약 빼 버린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왜 존재와 시간 후반부를 안 썼는가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냥 개인적으로 존재와 시간이 맞말 모음집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김에, 존재와 시간과 대조해 가며 읽어볼 만한 후기 하이데거 저서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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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철학 입문서들을 보셨다니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에 ‘인간’이나 ‘주체’라는 개념을 귀속시키기를 거부함으로써 근대적 사유가 비추는 비본래적 존재이해로부터 벗어나기를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후기 하이데거가 보기에 『존재와 시간』이 취하는 방법은 존재의 본래적 의미의 출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에 여전히 불충분합니다. 왜냐하면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을 경유하여 존재의 의미를 밝히려고 할 때 드러나는 존재이해는 여전히 존재물음을 던지는 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후기 하이데거는 이런 의미에서 전기 철학이 여전히 배태하고 있던 근대성의 흔적으로부터 더 철저히 벗어나서 존재를 비본래성으로부터 탈각시키고 그 고유함 속에서 사유하기 위해 현존재 분석론을 포기했습니다. 그래서 후기에서는 존재의 생기에 대해 현존재의 수동성이 철저하게 부각됩니다. 예컨대 현존재는 존재에 접근할 어떤 특권적 지위도 없이 그저 존재의 생기에 자기를 내맡겨야 하는 것으로, 존재물음은 현존재에게 숙고가 강요됨으로써 비로소 시작되는 것으로 간주되며, (시적) 언어는 인간이 존재에 종속되는 일이 발생하는 곳으로 이야기됩니다.

하이데거 후기 철학에서 『존재와 시간』에 필적할 만한 규모를 지닌 저작에는 『철학에의 기여』가 있습니다. (자신의 30-40년대 강의록이 모두 출판되기 전까지는 출간하지 말라고 지시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하이데거 자신도 이 책에 상당히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철학에의 기여』를 『존재와 시간』과 대조하며 읽기를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존재와 시간』과는 판이하게도 단편들의 모음집처럼 구성되어 있고, 그 단편들마저도 파편화된 문장들과 비문들의 모음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차라리 하이데거가 먼저 출간토록 한 강의록들을 찾아 보시는 것이 그나마 나은 선택지가 아닐까 합니다.

이와는 별개로, 원활한 소통을 위해

같은 불필요한 수사를 배제하시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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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신 불필요한 수사 부분은 지웠습니다. 그것과 별개로 답변은 매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이데거의 목표를 비본래적 존재이해로부터 벗어나서 존재의 본래적 의미를 출현시키는 것이라고 설정하고 생각하면, 반드시 현존재를 분석함으로써 본래적 존재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현존재의 수동성이 부각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근대철학의 '성과'라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까지 모조리 날아가 버리지 않느냐 하는 의문이 듭니다. 현존재의 특권적 지위라는 것이, 무슨 부여된 권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현존재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점에서 그런 것 같은데, 예컨대 사방세계와 같이 각 항들의 공속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우리가 현존재임에서 벗어나서 곁눈질하는 관점에서 이뤄지는 서술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그런 생각이 오해라고 할지라도, 하이데거의 후기 사상이 전기의 논의로부터 단절된 것이 아니라는 걸 전제할 때에야, 비로소 그런 논의들이 신비주의나 "관계의 형이상학" 따위로 읽히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싶었습니다. 제가 의아했던 지점이 이런 것인 듯합니다. (단순히 근대적 주객 문제의 극복을 논하는 거라면, 관계의 형이상학 같은 것도 얼마든지 주객 문제를 극복(한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또 한편으로, 현존재에게 비본래성의 가능성이 도처에 깔려 있다는 통찰과, 현존재에 의존하지 않는 '진짜' 본래적 존재를 사유하겠다는 기획이 잘 공존할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습니다. 후자의 사유가 가능하다면 비본래성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없앨 수 있는, 또 없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싶은 거죠. 존재물음이라는 계기를 통해서 존재가 사유된다면, 해석학적 순환 과정을 우리가 그려갈 수 있으니 그런 문제가 없겠지만, 후기 사상에는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가 가능한가 싶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역운에 따라서 우리에게 사유가 강요된다는 식으로 말하면 해결은 되겠습니다..(이게 맞는 서술인지는 모르고 그냥 하는 말입니다.) 이건 그냥 미학성의 문제같네요.

이런저런 사항들을 고려해 보면, 저에게 후기 하이데거 독해의 관건은 현존재의 수동성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이며 왜 강조되어야 하는지 적절히 이해하는 데 있어 보입니다.

저는 아직 하이데거가 익숙하지 않아서, 그의 어법을 활용해 가며 글을 쓸 줄 모르는데, 그래서 답변 남겨주신 덕분에 좀 더 생각을 잘 정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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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이란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하니까요.

젊을 때는 그게 충분히 가능할거라고 생각하지만 나이들면서 인생은 크게 취약하다는 방향으로 생각이 바뀌는 것은 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저도 많이 아는 부분은 아니고 단지 존재와 시간이나 숲길, 근거율 정도를 읽은 바입니다만, 개인적으로는 후기 하이데거의 철학이 훨씬 공감이 많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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