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철학에서 "역사성" 단어를 연구한 사례가 있나요

제가 말하는 것은 분석철학의 역사가 무엇이냐를 물은 것도 아니고
분석철학에서 역사적 분석이 특히나 부족하다를 물은 것도 아닙니다.
역사성이라는 그 단어 자체를 말하는 겁니다.

"역사성"이라는 개념을, 분석철학적으로 접근한 그런 논문이나 책이 있나요?

진리와 방법 2의 극초반부에서 역사학과 해석학의 긴밀한 연관성을 설명하면서 딜타이가 랑케나 드로이젠이 한 일을 개선했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고
딜타이가 "삶이란 사유를 형성하는 작업"이라 하며 삶과 앎의 상호연관성을 근본 주장으로 둔 뒤 "역사의 장에서 삶은 삶을 포착한다"고 상대성에서 총체성으로의 의미맥락 과정을 주장한 철학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역사성"에 흐릿하게 부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잘 알려졌다시피 이해를 존재론적 기초로 두고, "현사실성의 해석학" "존재역운" 등등 "역사성"을 설명하기 위한 많은 시도를 해왔고, 이것을 통해 가다머 또한 "영향사" 등 "역사성"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설파한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이것은 꼭 해석학 쪽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닌데요, 헤겔 또한 "역사성"에 대해, 푸코도 "역사성"에 대해, 좀 형이상학적 여지가 있으나 벤야민도 이 "역사성"에 대해 이 용어를 정의는 하지 않아도 각자 자기 자신의 코멘트를 달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석철학은 이 "역사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그들만으로서의 접근이 굉장히 희박하다는 것이 느껴지는데요.
혹시 이에 대해서 여러가지 접근을 한 논문이나 책이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혹시 피츠버그 학파에서는 기존 헤겔의 역사성을 어떻게 접근하나요?)

제가 분석철학자들을 대표할 위치에 있지는 않지만, 글을 읽으며 든 생각을 나눕니다.

1) “역사성”이라는 단어를 연구하는 것이 철학자의 일인가?

이건 짜실한 피드백인데요(…), 분석철학자들의 주된 일이 어떤 단어를 연구하거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떤 표현이 철학적으로 중대한, 또는 철학적 문제를 야기하는 개념을 표현하거나 용법을 가질 때 이에 주목할 뿐이죠. 일단 “역사성”이 중의성을 (갖기는 하지만, 철학적 혼란을 야기할 정도로는) 갖지는 않으니 연구가 필요하다면 전자의 연구여야겠습니다. 역사성 개념의 분석 말이죠.

2) 역사성 개념은 개념 분석의 대상으로 적합한가?

그런데 역사성 개념에 대한 분석이 필요한지가 의문입니다. “역사성”은 분석이 필요한 일상적 표현이라기보다는 다분히, (학제적 합의가 있는 것도 아닌 듯하니) 저자마다 나름의 정의를 해야 할 전문 용어같습니다. 마치 ‘보편자’ 개념을 술어 귀속의 해명을 위해 사용할 뿐, 추가적으로 분석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3) 시점이나 연대기의 문제가 분석철학에서 무시되어 왔는가?

아닙니다. 한편으로, 시제의 논리적 특성은 중요한 화두였습니다. 일찍이부터 발화 맥락과 시점에 따라 문장의 진리값이 달라진다는 점이 인지되어 있었고, 이는 문장과 진술 간의 구별을 두게 했습니다. 이후 프라이어를 통해 시제 표현의 의미론적 구조가 규명되기도 했고요.

연대기 역시 주목되어온 주제입니다. 크립키, 카플란, 에반스, 퍼트남 등은 고유명이나 자연종명사의 의미가 그 단어를 사용하는 공동체적 맥락 및 그 사용의 역사(이른바, ‘인과적 사슬’)가 의존함을 보였습니다.

따라서 분석철학에서는 ‘역사성’ 개념을 망각했다거나 그 의의를 간과했다기보다는, 보다 광의의 ‘맥락 의존성’ 개념을 이를 위해 사용한다고 보는 것이 낫겠습니다.

4) 역사성 개념(이랄 것이 있다면, 그것)은 맥락 의존성 개념보다 더 명료하고, 유용한가?

제가 생각하기에 핵심은 이쪽입니다. 일단 “역사성”이 어떤 단일한 개념을 표현하는지부터가 제게는 의심스럽습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 여부에 관한(‘예수의 역사성’) 표현이기도, 시간적 흐름에 관한(‘언어의 역사성’) 표현이기도 하고, 서사로서 역사에 관한(가령, 민족사에 관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역사성”이라는 말이란 이처럼 퍽 방만한 용법을 갖는 듯합니다.

그런데 이 중 철학적으로 필요한 내용은, 제가 느끼기에 다분히 ‘맥락 의존성’ 개념으로 포착됨 직한 것들입니다. 어떤 시점이나 맥락에 의해 표현의 내용이 바뀐다는 측면이요.

혹 역사에 따른 사람들의 사고 방식 변화 따위를 철학적으로 중요하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이편은 이미 사회학이나 인류학의 편으로 넘어간 듯합니다.

여전히 이 마지막 의미를 강조한 ‘역사성‘’ 개념을 취하려면 위의 중의성들을 잘 분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가령 하이데거(에 대한 어떤 이해들)의 경우, 제 인상으로는 ‘표현의 시점 의존성’으로부터 곧장 ‘사고 방식의 역사 의존성’으로 넘어가는 것 같거든요.

+)
쓰다보니 질문에 답을 안 했네요. “역사성”에 대해서라면,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적어도 역사철학은 분석적 전통에서 주요한 주제를 형성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나 공동체적 역사에 관해서는, 언어철학적 탐구를 위해 다방면으로 사용된 이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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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성(historicity) 혹은 역사주의(historicism)은 제 감각에 의하면 "인간의 사유가 시대와 문화에 의존적이다"라는 넓은 조류를 통칭합니다. 따라서 역사주의는 맥락의존성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어요.

다만 역사성은 때에 따라서는 맥락의존성과 구별될 수 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의미론적 논의에서 맥락의존성의 경우, 의미의 다원적 층위를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 다원성을 단일한 의미론적 원리에 의해서 포착하고자 하는 동기에 의해서 추동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크립키 등에 의해서 논의된 인과적 사슬의 공동체적 맥락은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맥락의존성 테제는 보다 외재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조류와 쉽게 결합가능합니다. (물론 맥락의존성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고, 그러한 경향성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역사주의는 대체로 다원성을 특정한 원리와 법칙으로 환원시켜 설명할 수 있다는 접근에 부정적입니다. (물론 마르크스나 이를 비판한 포퍼의 경우 예외적인 "역사주의"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나, 이는 무시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역사주의를 "단일한 인과적 사슬로 추적될 수 없는, 시대/문화에 따라 급진적으로 상이한 세계관이 있다"는 주장으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역사주의는 맥락의존성보다 훨씬 급진적인 함축을 가지고 있고, 대개의 경우 상대주의에 대한 논의와 연결됩니다. 또한 상대주의의 문제는 단순히 문화상대주의의 층위(사회학이나 인류학의 대상)를 넘어서 개념적 상대주의나 과학철학에서의 상대주의와 직결됩니다. 과학철학에서의 상대주의는 뭐 토마스 쿤을 비롯하여 분석철학에서 고전적인 주제죠. 개념적 상대주의자들은 세계와 실재를 파악하는 완전히 상이한 소위 "개념적 도식 conceptual scheme"들이 있거나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오해의 여지를 무릅쓰고 단순화하자면) 콰인이 대표적으로 이것을 제시했고, 데이빗슨은 이러한 걱정을 기우라고 보았죠. 이렇게 본다면 역사주의는 또한 (분석철학에서의) 번역/해석의 문제, 더 나아가 해석학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피츠버그 학파가 역사성에 대한 단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로티의 경우 해석학적 전통과 매우 친근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philosophy and the mirror of nature" 등에서 해석학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죠.

어렴풋이 기억나는 것은 헤겔이 말하는 "정신"의 역사성에 대한 맥도웰의 해석인데요. 맥도웰의 경우 언어 및 개념이 정신의 중요한 특징이며, 또한 언어 및 개념이 인간으로 하여금 인류의 repository of tradition에 진입할 수 있게끔하는 가장 중요한 매체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정신을 통해 인류의 conceptual repository 에 접근가능한 한에서, 인간은 삶에서 이것을 계속해서 반추하고 반성하고 성찰할 수 있다는 것이죠.

요점은, "역사성"이라는 특정 단어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이 무엇을 문제로 다루고 있는지 무엇이 쟁점인지에 주목한다면, 분석철학에서도 충분히 해당 주제나 혹은 그 등가물에 대한 논의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의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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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 정확히 동의합니다!:smiley:

'역사성'이라는 개념을 직접적으로 논의한 경우는 찾기 힘들 거예요. 게다가, '역사성(historicity)'이라는 말 자체도 맥락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쓰이다 보니, 저자가 어떤 의미로 그 단어를 언급하는지도 고려해야 하고요. 가령, 이 말은 (a) 역사학적 검증 가능성(verifiability)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b)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상대성(relativity)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c) 과거와 현재의 지평 사이의 상호성(mutuality)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해요.

해석학에서 쓰이는 '역사성'은 (c)의 의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경험이란 새로운 사건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이전 지평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이 '경험의 역사적 성격(경험의 역사성)'인 거죠. 가령, 철수라는 사람에 대한 나의 이해는 철수와 만나는 매 순간마다 계속해서 수정되고 갱신될 수밖에 없어요. 어제 만난 철수는 그 이전까지 만난 철수와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철수에 대한 내 기존 이해를 뒤바꾸죠. 오늘 다시 만난 철수도 어제 만난 철수와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내 기존 이해는 또 뒤바뀌는 거고요. 우리의 경험이 바로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수정을 거치면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해석학에서는 "경험이 역사성을 지닌다."라는 말로 표현하는 거죠.

피츠버그 학파의 철학에서 '역사성'에 가장 대응하는 개념을 찾자면, 브랜덤의 '보류와 도전의 구조(default and challenge structure)'를 언급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우리는 특정한 믿음들을 우선 초견상(prima facie) 정당화된 것으로 수용한 상태에서, 그 믿음들에 새로운 도전이 제기될 때마다 기존 믿음의 그물망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지식을 확장한다는 사실을 표현한 용어에요. 브랜덤은 자신의 이 개념이 헤겔의 경험 개념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어요. 가령, “From German Idealism to American Pragmatism—and Back” 같은 논문에서 자신의 경험 개념이 헤겔의 경험 개념에 빚지고 있다고 고백하죠. (그런데 여기서는 '보류와 도전 구조'라는 단어 자체가 등장하지는 않아요. 다만, 지각 경험에 대해 소개하는 다양한 다른 논문들에서 경험이 '보류와 도전의 구조'를 갖는다고 말하죠.)

브랜덤의 논문

브랜덤의 논문에 대한 제 요약
https://blog.naver.com/1019milk/221560331663

역사성에 대한 제 논문

(* 지금 보면 다소 아쉬운 게 많은 글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논문에서 쓴 기본적인 입장은 유지하고 있습니다.)

브랜덤의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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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성이라는 그 단어 자체를 철학적으로 분석해서 뭐가 나올 수 있나요? 님이 거론한 철학자들은 인간 삶이 이렇다 저렇다라고 아주 아주 진지하고 심각하게 말할때 그 말에서 역사라는 단어가 차지(해야)하는 위상에 대해 자신들 나름의 얘기를 한 것입니다. 더 간단히 말하면 역사라는 것이 도대체 인간 삶에서 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시도한 것이죠. 그런데 이 질문은 사실 철학적 질문이 아닙니다. 역사가 무엇인지는 실제로 역사를 연구해야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역사를 연구하기 전에 역사가 무엇인지 미리 알 필요는 없습니다. 연구되는 것으로서의 역사와 어느 정도의 연구 끝에 나온, 역사는 이런 것이다라고 할 때의 역사는 다른 것이고 후자는 전자를 전제하죠. 님이 거론한 철학자들은 후자의 의미에서의 역사를 얘기한 것인데, 그 얘기가 얼마나 그럴듯한지는 그 철학자들의 역사 '지식'이 얼마나 풍부하고 정확한지에 일차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물론 지식이라는 것도 관점과 방법론과 해석을 거쳐서 나옵니다. 그래서 역사학의 철학으로서의 역사철학이 있죠. 그 역사철학의 차이 때문에 같은 시기를 같은 사료 가지고 연구해도 다른 역사서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결국은 역사란 무엇이냐는 철학적 질문이 아니라 경험적 질문입니다. 님이 거론한 철학자들, 특히 헤겔이 역사에 대해 한 식의 얘기들을 '사변적 역사철학'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때의 사변은 풍부하고 정확한 역사적 지식으로부터 나올 수 있지만 그 지식만 가지고서는 나올 수 없는, 그 지식에 역사학자라면 추가해서는 안되는 뭔가가 추가되어 나온 '철학적' 얘기입니다. 헤겔보다 더 정확하고 풍부한 역사 지식을 갖고 있는 그 어떤 역사학자도, 혹은 역사학이라는 학문이 정식으로 성립한 이후의 어떤 역사학자도 그런 식의 얘기를 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 철학자도 추가해서는 안 됩니다. 역사학의 철학을 하거나 그 지식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얘기를 해야죠. 역사 유물론 같은 얘기 말입니다. 역사 유물론은 틀렸을 수도 있지만 철학이 아니고 따라서 사변적 역사철학도 아닙니다.

"'역사성' 분석이란 크게 소박한 일이다"라는 입장에 있어서는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 제가 원래 의문점으로 가진 것이 있긴 했지만, 사실 질문으로 하기엔 너무 광범위하고 둔탁한 사례였습니다. "역사와 관련된 학문 (역사인식론, 역사방법론, 역사철학)에서 써먹을 수 있는 분석철학적 접근이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위에선 아니라고 말했지만 "분석철학 안에서는 왜 역사적 분석이 희박한가?" 도 좀 있고) 가 저의 문제의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좋은 질문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에서 가지는 성질"의 분석이 있었는가, 같은 역시나 둔탁하지만 소박한 것으로 논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오해가 있는 것 같아 여기에서 걷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 위에 있는 철학자들이 인간 삶의 진지한 면을 보여주기 위해 "역사성"이라는 말을 썼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A - 그런 소위 대륙철학자들 또한 꼭 인간 삶 -철학적이지 않은 것- 뿐만 아니라, 국소적이고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측면 -철학적인 것- 에서도 굉장히 많은 말을 한다고 생각하고요, B - 분석철학자들이 그렇다고 꼭 그렇게 "인간 삶이 이렇다 저렇다"라는 말을 버렸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푸코를 예를 들자면, 그의 역사성은 곧바로 "현재성"과 "문제제기"로 이어지죠. 그는 "우리의 삶을 바꾸기"를 주장하려고 하기도 했지만, 현대성과 역사에서 예전의 비교를 통해 "우리가 어떠한 존재가 아닐 수 있는지, 현재의 이것이 꼭 숙명적인 것인지"에 대해서 논하니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