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곳을 방황하다가 이곳에 글을 적어봅니다

저는 방금 회원가입을 했습니다. 철학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습니다.
다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생각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최근 드는 생각들이 저를 괴롭게 만들어서 답을 타인에게서 구해보고 싶었습니다. 제 생각을 적절하게 나눌만한 곳이 찾아지지 않던 찰나, 이곳을 알게 되어 글을 적어봅니다..

안녕하세요

요즘 살면서 한 가지 고민이 생겨서 이야기 드려봅니다.
제 몸은 최근 들어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느끼더군요. 그래서 당연히 '외로우면 같이 있을 사람이 있으면 되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같이 있으면 외롭지 않은 걸까?' '내가 바라는 것은 육체적인 가까움인가?' 라고 되새겨 묻더군요. 그래서 다시 내린 답은 이렇습니다.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가까운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를 이해할 대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제가 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겉으로만 보여지는 표상적인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저를 이해할 수 있는 걸까요?
사람에게는 여러가지 감정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눈이 부시다. 아프다. 와 같은 육체에 반응하는 감정들은 대부분 현실과 일치하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기쁘다', '슬프다', '화가 난다' 와 같은 감정은 과연 신뢰할 수 있을까요? 기쁜 순간에도 이게 왜 기쁜 건지 다시 생각해보고 슬퍼야 하는 순간에도 이게 왜 슬픈지 다시 생각해 볼수록, 의심하면 의심할수록 제 감정의 신뢰도가 내려갑니다. 저는 계속 저를 의심합니다. 감정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뇌는 무언가를 느끼고 표현하기 위해 호르몬을 분비하더군요. 이 호르몬은 물리적 반응의 결과인데 이것은 제 본질의 성질과 일치하는 것일까요?
저는 계속 저를 관조했습니다. 사회적 규범,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없을 때 나라는 존재는 어떤 기준을 가지고 움직이는 존재인가. 생각해본 결과 저에겐 기준이라는 게 없더군요. '기준'이라는 언어적인 표현으로 이 개념을 묶는 것이 가능한지도 확신이 서지 않을 뿐더러, 기준이라는 개념에 준하는 모호한 것들조차도 스펙트럼처럼 퍼져 실루엣이 남아있습니다. 그야말로 혼돈이었습니다.
저는 어떤 순간에도 어떤 생각이나 행동도 가능한 존재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위선적일 수도, 정의로울 수도, 배덕할 수도, 간교할 수도, 자애로울 수도 있습니다. 단순한 육체적인 감정과 나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상황을 제외한다면 그 어떤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나를 관측했기에 내가 존재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저를 바라봤을 때 존재했던 이 모습이 진정한 제 자신일까요. 예측 불가능하고 기준도 없으며 존재 이유도 없는 이 깊은 내면의 자아를 저는 이해할 수도 신뢰할 수도 아껴줄 수도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것 뿐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제가 저를 바라봤을 때, 나는 하나인데 내가 나를 어떻게 보았을까, 내가 바라본 것은 나에 한없이 수렴하는 다른 것일까, 아니면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상에 불과하는 나와는 전혀 다른, 표면적인 판단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무언가인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심, 자신의 감정에 대한 의심은 자신의 판단에 대한 의심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스스로가 존재의 가치를 인정할 수 없어집니다. 의심하지 않았던, 나를 관측하지 않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관념과 통념, 육체의 감정에 지배당하는 생활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이 감정은 사유와 자각으로부터 오는 통각의 산물입니다. 생각이 이어질수록 두상의 정면에서 정수리보다 살짝 아랫부분이 아프며 가슴의 정 중앙도 시린느낌과 먹먹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 느낌이 괴롭기 때문에 더 이상 느끼고 싶지 않다고 육체가 표현합니다.

외로움이라는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사랑 이전에 그 존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정의되지 않는 대상을 어떤 사고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는 걸까요? 이것이 가능하다면 이 세상의 상대적으로 선하든 악하든 아름답든 추악하든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닌가요? 모든 것을 이해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면 가족의 사랑, 애인의 사랑은 왜 존재하는 것이죠? 애초에 사람들은 상대의 본질을 사랑하는 건가요? 아님 보여지는, 태어나서 살아가며 얻어지는 표상적인 것들을 사랑하는 건가요? 아니면 표상적인 것들을 통해 유추 되어지는, 불확실한 형태(스펙트럼이 존재하는)의 '삶의 형태와 경향성'을 신뢰하는건가요?

제 몸은 이 생각의 고리를 끊고 싶습니다. 그냥 기억을 지우고 싶습니다. 멍청해지고 싶습니다. 어째서 저는 고통스러움을 느껴야 하는 걸까요.
제 사유는 이 일련의 생각들의 답을 얻고 싶습니다. 답이 존재한다고 믿고 싶어합니다.

제 육체와 사유는 다른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누구의 편을 들어야하는것인가요. 다른 하나가 낙오되어야 하는 것인가요? 몸이 편해지거나 사유가 편해지거나를 택해야 하는 것인가요?
주변의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편하게 살아가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사실 그들조차 연기에 불과한 것일까요? 아니면 사유의 과정이 도달하지 못해서 무지하게 살아가기를 선택한 것인가요?

이상 하소연같은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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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선생님. 철학을 배우신 적이 없다고 하셨지만 철학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을 사안들을 언급해 주셔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도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언급하신 것들 중에

'기쁘다', '슬프다', '화가 난다' 와 같은 감정은 과연 신뢰할 수 있을까요?

라고 하신 부분은, '나의 각각의 감정이란 대상의 본질을 이해하기 어렵다'와 같이 조금 바꾸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선생님의 말씀에서 '과연 이 감정이 뇌의 물리화학적 작용일 뿐인지, 아니면 나란 존재의 본질을 드러내는 어떤 추상적 대상으로서 독립된 가치/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이어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과연 나란 무엇인가'라는 더 근원적인 문제와 만나는 것 같습니다. "이 '나'를 규정할 기준을 외부에서 발견할 수 없고, 나의 내면은 한없이 유동적인 것 같은데 과연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라는 생각에 이르고 이것은 '나'의 존재와 의미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으로 연결되어서 선생님 마음에 괴로움을 야기하는 것으로 보여요.

'나'자신에 대한 이런 회의감은 외부세계와 타인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으로 쉽게 연결되고 이는 더욱 마음을 무겁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모든 것에 철학에서 정해진 답이 있고 그것을 제가 제시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분명 거짓말일 거예요. 하지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세상은 분명 수없이 다양하고 동시에 깊은 의미가 담겨있는 대상이고, 그것들을 즐겁게 탐구하며 많은 지적인 사고들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혼자서 생각하는 것은 때로 다소 좁은 틀에 우리의 시각을 가두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러한 생각에 너무 자신을 구속하거나, 임시적 결론에 집착하지 않으시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아요.

그리고 철학사 책을 한번 읽어보시며, 이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생각과 같은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는지 참고해 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군나르 시르베크의 <서양철학사>책을 추천하고 싶어요. 반복해서 읽는 것도 좋고요.

귀한 말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따금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거나 질문이 있으시면 여기 포럼에 남겨주시면 많은 분들이 설명해 주실 거예요. 선생님의 사유가 고통이 아니라 많은 가능성을 담고 있는 생성중의 사유일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답변을 마무리하고 싶네요. 부디 힘내시고, 좋은 기분으로 하루 마무리하시길 바래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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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어떤 이성적, 논리적인 과정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니체는 이성적 주체나 선험적 의식이 파악한 것은 추상적이고 일반적이어서 현실을 가장 피상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되어버린다고 한 것으로 압니다. 즉, 이성, 주체, 의식에 의해 정립, 인식된 것은 심층적 세계에 대한 도식화/일반화의 산물이라는 것이죠. 우리 자신과 세계는 이성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데, 감성을 억압하는 형이상학은 이성만을 강조해서 우리를 구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엽의 <이성과 이성의 타자>일부를 참조하고 인용했습니다)

따라서 이성으로 사랑과 감성, 그리고 인생의 의미와 신비를 환원시키려는 것은 무척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어요. 저도 잘 모르긴 하지만 일단 니체의 사유에 입각해서 적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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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굉장히 여러 문제들이 엉켜있는 의문들이라 어디서부터 답을 해야할지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실용적 차원에서 답을 하자면, 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인 동시에, 왜 그 해결책이 작동하지 않는지에 대한 반문처럼 읽히네요.

(2)

심리적/정신적으로 가까운 사람 = 나를 사랑하는 사람 = 나를 이해하는 사람.
이라 여기시는듯합니다. 여기서 "이해"라는 것의 불가능성이 상황을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지옥으로 질문자님을 이끄는 듯합니다.

다만 제가 보기에 과연 저 셋이 동일한 것인지...의문스럽네요.

심리적으로 가깝다는 것은 굳이 나를 "사랑"까지 할 필요는 없어보입니다. 우정일수도, 동료애일수도 아니면 뭐 여러가지 단어를 붙일 수 있지만, 나에 대한 긍정적인 애착...을 가진 상대 정도라 할 수 있겠네요.

이런 애착이 이해를 통해서'만' 생긴다 여기지 않습니다. 공통의 추억, 취미 아니면 도무지 설명하기 어려운 우연적 사건들을 통해 애착이 생기곤 하죠.

(3)

게다가 질문자님이 사용하는 "이해"의 기준이 지나치게 가혹한듯합니다. 대상의 (한 부분이 아닌) 모든 것, 이는 과거-미래의 모든 변화도 포괄하고, 의식적/무의식적 영역도 모두 포괄하는 완전성을 가진 것만을 "이해"라 여기시는 듯한데, 이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인듯합니다.

저와 힙합이라는 취향을 공유하는 친구는 힙합 앨범의 좋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친구는 이해할 수 없죠.
하지만 저와 종교성을 공유하지 않기에 힙합-친구는 제 종교성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만 종교성-친구는 제 종교성을 이해하겠죠.)

이와 같은 나에 대한 "부분적인" 이해가 이해가 아닌 것도 아니며, (모든 것을 아는 이해에 비해) 열등하다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4)

찬찬히 문제들을 하나하나 적고, 과연 그게 옳은 문제제기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스스로 만든 문제에 잡아먹히곤 하니깐요.

나아가, 고민하는 것 자체가 심리적으로 괴로우시다면, 정신과를 가는 것 역시 좋은 선택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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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 감사합니다.
제가 물리를 배우다보니 사유를 논리화시키는 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는데, 형이상학이 우리를 구속한다는 이야기는 제게도 다른 패러다임을 제시하네요.
다만, 논리화한다는 것은 곧 언어화한다는 이야기는 아닐까요. 언어가 결국은 모호한 개념에 기준을 잡아주는 기능을 하는 것인데, 언어조차도 형이상학의 일부라고 봐야 되는 것은 아닐지요.

감성은 경험된 기억에 직관이 더해진 결과지 않나요? 형이상학이 감성을 억압한 것은 개개인이 경험한 각기 다른 기억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하게 대상을 사유하고자 하는 의도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감성이 이성이 이루지 못한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걸 뜻하는 건가요?

직관도 감성도 경험의 부산물로 생각되어지며, 논리와 비교해보자면 논리는 전자에 비해 순수하나 언어라는 개념에 속박되어 있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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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논리화는 언어(수학적 기호 등 포함)를 사용하므로 언어화를 수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감성을 기억+직관이라기 보다는 그보다 넓은 의미로 보고 싶습니다. 또, 감성과 이성을 구분하게 되면 감성은 이성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쩌면 제가 감성을 이성과는 다른 별개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들로도 보이네요. 어떻게 해야 제가 감성을 인정할 수 있을까요..
감성이 이성과 별개의 것이라면 이성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고 설명이 되지 않기에 신뢰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감성을 믿는다는 것은 너무 어렵네요. 마치 신을 믿으라고 말하는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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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감사합니다. 외람되지만, 제 생각에 선생님의 견해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점에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예술작품을 보고 느끼는 감동 같은 것은 이성으로 설명하기 이전에 우리가 느끼는 것이고, 따라서 그 존재근거를 이성에 의해 정초하는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해요.

처음의 셋이 동일한지에 대해서 생각해본 결과, 글을 적으면서 제 기대치가 올라간 듯 싶습니다.
심리적/정신적으로 가까운사람 < 나를 사랑하는 사람(나의 기준이 불완전함) < 나를 이해하는 사람

말씀을 듣고 제 친구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보았습니다.
말씀처럼 애착에 의한 관계로 보이더군요. 물론 그들이 표면적으로 제게 보여준것들에 한정된 결과지만요.
하지만 제가 기대했던것은 나를 온전히 바라봐 줄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보는것과 같은 것을 보고 느껴줄 사람 말이죠.
애착으로 관계를 쌓고 천천히 제가 바라본 저를 상대에게도 보여주면 되는 것이겠죠?
상대가 저를 온전히 바라봐주지 못했을때는 너무나 슬플것 같습니다.

처음에 제게 '이해'라는 엄밀한 잣대를 들이민 이유는 제 자신을 먼저 사랑해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단어조차 언어화된 논리의 일부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어로 설명 가능한 제 자신을 재어보려고 했습니다. 그 끝에서, 어떤 모습도 될 수 있는, 특별한 성질이 부여되지 않는 이 혼돈을 설명할 수 없기에 재어볼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은 부분적인 이해가 가능한 영역일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저를 어떻게 이해하고 사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네요.

제가 그래서인지 더 이상 감동을 느끼기 힘듭니다. 시각적이든, 청각적이든, 공감각적이든, 각각의 작품에서는 감정이 느껴집니다. 제 직관에 의해 작가의 의도가 상상 됩니다. 다만 그 작가가 표현하려 했던 감정에 근본적인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제 자신의 감정을 의심하는 것과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이런 생각을 시작한 뒤로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머리를 박고 있는 기분입니다. 이를 뚫고 나갈 기미가 느껴지지 않아 하루에도 수십 번 절망할 때면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맺히려다가도 그 감정조차 의심하면서 다시 들어가기를 반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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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 그다지 도움이 못 된 것 같아 아쉽네요...그런데 만약 논리로 감정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다면 근본적인 의심이 사라질까요? 오히려 그 설명의 논리에 또 의심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오해가 개입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물리를 전공하시는 것 같은데, 물리학의 예를 들자면 양자역학에서 입자의 위치는 슈뢰딩거 방정식에 의해 표현되는 확률함수로 나타나죠. 이 말은 즉 확률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일 텐데요, 이것도 그럼 완전히 확실하지는 않은 설명방식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완전히 알 수는 없겠지요. 어쩌면 일종의 겸허함이 요구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평안을 얻으셔야 할 텐데요...

언제나 시도하는 것은 유의미합니다만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비록 결과가 없더라도, 나의 행동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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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생각들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어 정확히 묻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 분명하지 않습니다. 물음에 대한 적절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를 명확하게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추려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나에게는 어떤 생각 및 행위도 가능하다.
(2) 그러므로 나의 생각과 행위를 규제하는 어떤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3) 그러므로 나(의 정체성, 동일성)를 정의할 기준이 없다.
(4) 그러므로 나의 존재에는 어떤 확실한 가치도 부여될 수 없다.
(5) 그러므로 나는 사랑받을 수 없다.

인격 동일성에 관한 회의주의적 주장의 일종으로 보이는데, (1-5)에 대해 모두 의문을 던지는 일이 가능합니다. (1): 정말로 나에게 생각과 행위의 가능성이 무한하게 주어져 있나? 그러면 해가 뜨는 동시에 뜨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일도 가능한가? 애초에 여기서 "가능하다"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 (2): 내가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행위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해도, 내가 실제로 아무렇게나 처신하지는 않지 않은가? 그런데도 실제로 내 사유와 행위를 규율하는 기준이 없다고 할 수 있나? (3) 내 사유와 행위를 규율하는 어떤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여기서 나라는 존재의 정의 불가능성을 도출할 수 있나? 등등, 계속해서 물을 수 있습니다.

인격 동일성에 관한 보다 본격적인 철학적 논의에 대해서는 다음 글들을 참조할 수 있습니다.

Thomson, J. J. (2008), People and their Bodies. In T. Sider, et al. Ed., Contemporary Debates in Metaphysics (155-176). Blackwell.
Parfit, D. (2008), Persons, Bodies, and Human Beings. In Ed. T. Sider, et al., Contemporary Debates in Metaphysics (177-208). Blackwell.
Parfit, D. (2008). Personal Identity. In Ed. M. Loux, Metaphysics: Contemporary Debates (464-484). Routledge.
Lewis, D. (2008). Survival and Identity. In Ed. M. Loux, Metaphysics: Contemporary Debates (485-509). Routledge.
Swinburne, R. (2008). Personal Identity: The Dualist Theory. In Ed. M. Loux, Metaphysics: Contemporary Debates (510-538). Routledge.
https://plato.stanford.edu/entries/identity-personal/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철학적 논의들을 깊이 공부해서 자아의 정체성에 대한 철학적 물음에 답하는 일은 딱히 개인의 외로움과 심리적 고통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점입니다. 철학적 문제에 탄탄한 근거를 갖고 논증할 수 있다고 해서 마음이 안 아프고 외로운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내가 누군지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다고 해서 마음이 아프고 외로운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씀하시는 "주변의 사람들"은 "연기"를 하거나 "사유의 과정이 도달하지 못해서 무지하게 살아가기를 선택"하거나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자아 동일성에 대한 철학적 문제에 설득력 있는 답을 논증하는 일이 편안한 심리상태를 유지하는 일과 딱히 관련이 없어서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의 외로움이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철학책을 읽는 일은 별로 좋은 방책이 아닙니다. 심리적인 문제는 심리적인 방법으로 해결을 보시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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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착이라는 패러다임이 최근에 저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애착이라는 키워드로 제가 알고있는 것들을 다시 돌아봤습니다. "애착"이라는 단어에 묶인 개념이 느껴지더군요. 인간이 사회화가 되기 위해 필요한 필수적인 감정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사물이든 사람이든 관계를 만들려면 관심을 가져야 되고, 그건 애착이거나 혐오이거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의 깊은 내면을 바라보는 행위는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 행동은 정신을 너무 피폐하게 만들더군요. 제가 가진 가치관과 기준에 대해 따지는 것까지는 좋은데,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서 제 본질에 의문을 두는 것은 자칫 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 같네요. ( 절대 하면 안되는 행동 리스트에 저장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