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나는 유교와 기독교와 불교의 교리에 대해 어느정도 이해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개인의 사특한 마음에서 벗어나 더 넓고 보편적 시야에서 보고 느끼고 체험할 것을 제안한다.(단순히 보자면 유교는 도심을, 기독교는 내가 아니라 예수가 살기를 바라며, 불교는 대자비심을 말한다. 강조점에 있어 디테일이 다르며 이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 나아가 이들은 이러한 보편적 시야와 특정한 도덕적 가치를 연결시킨다. 유교는 인을 말하고 기독교는 사랑을 말하며 불교는 자비를 말한다. 어떻게 표현하든 결국 실천적 층위에서 볼 때 핵심은 서로 비슷하다. 즉, 모든 가르침은 서로 아끼며 조화롭게 잘 살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이러한 실천의 지위를 이론적으로 논할 때, 그 원천이 리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며, 신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으며, 법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잘 살자는 희망의 근거를 마련하고 설명하는 방식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역사는 이러한 차이 때문에 여러 종파들이 피를 흘리며 싸워왔음을 잘 증언하고 있다.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물론 이론은 중요하다. 이론에 대해 공부하고 사색할 때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 안에서 더욱 적절하게 조화와 번영을 이끌어내는 여러 실천을 수행할 수 있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례가 많다고 생각한다. 전통과 교리를 잘 갖춘 종교집단에서 교육받고 기도하는 것은 좋은 삶을 사는 한 방법이리라 인정한다.

그러나 이론을 실천보다 앞세우게 되면 서로 아끼며 조화롭게 살라는 가르침보다 언어적이고 율법적인 측면에 매몰되기 쉽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사랑을 실천하되 그 원천인 신을 믿어야 한다. 무엇보다 신이 우선이다. 믿음없이 사랑을 실천한다고 구원받을 수 없다는 엄중하고 무서운 선언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어떤 믿음인가? 성경을 글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 적어도 성경이 다른 가르침보다 우선히는 특별한 지위를 가진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신이 존재해서 믿는 이들을 구원하며 믿지 않는 이들을 영원힌 지옥에 던져버릴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게 타자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한이 있더라도, 따뜻한 시선이 아니라 날카로운 손가락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성경을 앞세워 계몽해야한다. 그게 진짜 사랑이다."

이론을 앞세우면, 내가 이해하는 사랑과 양립하기 어려워보이는 폭력성과 배타성이 서늘하게 드리운다. 이것은 특히 내가 아는 한 기독교에 있어 그렇다. 만약 폭력성과 배타성을 내려놓고 믿지 않는 이들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함께 사랑하며 살자고 말하는 기독교가 있다면 나는 아마 기독교인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는 주류적인 기독교인은 아닐 것이다.

나는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여러 예식에 신실히 참여함으로써 여러 덕성을 기르고 사랑을 실천하는 훌륭한 인간이 될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으로 충만하며 사랑이 넘치는 인간이 됨에 있어 신앙생활은 훌륭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겐 항상 사랑이 우선이다. 성경도 예식도 사제도 목회자도 교리도 모두 사랑을 위한 도구일뿐이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십자가도 밟고 지나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덕스러운 품성을 기르고자 노력하는 것은 이제라도 미약하게나마 사랑을 실천하며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자하는 결심이지, 신의 명령 때문이 아니다. 구원에 대한 희망 때문도 아니다. 신이 있든 없든 나는 사랑하며 살고자 한다. 부끄럽게 살았으나 이젠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한다. 기독교의 교리 중 어떤 핵심적인 것이라도 그것이 사랑과 충돌한다면 나는 믿지도 실천하지도 않을 것이다.

6개의 좋아요

이미 좋은 터를 갖고 계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는 그런 마음을 갖게 하신 것 또한 은혜라고 고백하겠습니다만, 차치하고서라도 선생님의 말을 들으니 기쁩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저는 사랑이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처음과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 역시 본질은 사랑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로마서 13:8, 10)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한복음 14:21)

그러니 사랑에 어긋나는 것을 믿지도 실천하지도 않기로 하는 태도는, 그것이 올바른 판단이라는 가정하에 저는 지극히 그리스도교적인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랬지만,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에 다소간의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랑과 순종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단적인 예로, 사랑하는 사람이 뭘 같이 먹자고 할 때 저는 딱히 따지지도 않고 재보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러자고 말합니다. 저는 그것이 순종의 단적인 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제대로 살고 있는지를 테스트하는 지표 또한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복음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 또한 우리를 악한 세대로부터 건져내어 취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것(갈1:4)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 후자는 그리스도인의 거듭난 삶을 보여주는데, 말씀하신대로 이는 내 안에 성령이 계셔서 내가 아니라 성령이 살아내는 삶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의 거듭남은 성령의 내주함인데, 기록된 바 "하나님은 사랑이시"(요한일서4:8)기 때문에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는(고린도전서 16:14)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이제 문제되는 것은 (1) 사랑이 무엇이며, (2) 그럼 사랑을 강조하는 다른 입장 내지는 교리들과는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1)은 아마도 철학적이면서 신학적인, 또 한편으로는 매우 실천적인 물음이 될 것입니다. 제가 이해하는 바, 대체로 널리 동의되는 바는

x가 y를 사랑한다 -> (혹은 <->?) x는 y가 잘 되기를/잘 살기를/좋게 되기를 그 자체로서 추구한다.
혹은 우변을 영어로 표현하면 "x seeks to promote y's welfare for its own sake"

인 것 같습니다. 저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고, 관심 있는 작업을 하고 있구요. 하지만 여전히 좀 더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교의 사랑 교리는 무엇이 다른가 하는 문제는 비교적 명백한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완전히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고 봅니다. 개혁교회의 교리문답서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제 5문답은 우리에게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하는 성향이 있다고 답합니다. 잘 알려진대로 이는 원죄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교리는 실천적으로는 특별한 차이가 없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다른 답을 갖고 있는 셈입니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 말이 좀 길어졌습니다만, 선생님의 삶에 사랑이 충만하길 바랍니다. 또 여기 계시는 모든 분들에게도요. 종교적인 것을 다 떠나서라도 오늘 이곳저곳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랑은 분명히 잃어버린 무언가라고 생각합니다.

10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