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 철학이 정신분석과 가지는 관계

슬라보예 지젝이 2003년에 내한해서 서울대 철학과 교수 김상환과 나눈 대담이 있습니다. 여기서 슬라보예 지젝은 김상환과 철학의 여러 주제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는데요. 그중 첫 꼭지가 정신분석과 철학의 관계입니다.
지젝을 한국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징후로도 읽히는데요.

최근 정신분석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 여럿 올라와 있지만 정신분석학계에 있는 사람의 입장은 반영되지 않은 것 같아 올려봅니다.
지젝은 단순 철학계에서만이 아니라 프로이트-라캉주의자들에게는 자주 또 깊이 인용되는 학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지젝의 정신분석과 철학에 대한 언급도 특정한 라캉주의자로서 한 답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만 발췌해서 인용했습니다.1)

사실 정신분석은 어떤 비일관성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을 포착, 해명하고자 합니다. 라캉이 반복해서 정신분석을 탁월하게 반-철학적이라고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점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는 어떤 개별 과학의 입장에서 반대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총체성에 대한 해석학적 관점에서 반대한다는 것이고, 또 어떤 환원 불가능한 미해결의 간극을 포착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철학은 모든 것을 설명해줄 총체적 체계를 건축하려는 어리석은 시도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철학도 어떤 환원 불가능한 간극에서 출발합니다.

...누구든 프로이트를 면밀하게 읽어본다면 그가 실천했던 고유한 의미의 정신분석은 바로 상호주관적 실천임을 알 수 았습니다. 여기서 정신분석이 어떤 단순한 실증과학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대화라는 것이 명백해집니다.

정신분석의 실천과 개념들의 존재론적 지위를 묻고 설명하기 위해서는 초월론적 철학의 수준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현실, 그리고 이 현실을 지각하는 주체가 어떻게 출현했는지에 대한 초월론적 성찰을 제공하는 것이지요.

철학에는 .... 어떤 유한성, 불완전성에 대한 어떤 진정한 철학적 경험이 있지만, 이 경험은 어떤 형이상학적 건축물에 의해 곧바로 가려져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정신분석이 철학 안에서 억압돼 있는 것을 어떤 근본적인 방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정식화할 수 있게 하는 사유라고 생각합니다.

  1. 김은주. (2003). 대담/지젝-김상환 철학과 정신분석의 만남. 철학과 현실,, 6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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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지젝이 한국과 일본을 정신분석학적으로 얘기한 적이 있었죠. 우리는 일본인들을 용서하지만 잊진 않으니깐요.

이 두 발췌는 정말 흥미로워 보입니다. 저 책을 한 번 꼭 읽어보고 싶네요.

여담으로 지젝이 정신분석학과 헤겔에 관한 연구도 활발히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신분석학과 헤겔의 연결점에 아직 발을 들여보진 않았지만 미래에 한 번쯤은 들어가보고 싶은 영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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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에서 강연했던 것 말씀이시군요! 지젝이 한국인들은 쿨하다는 식으로 얘기했던 걸로 전 기억합니다. '트라우마를 잊어버리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용서하지 않겠다'는 한국인의 태도는 좋다고...

역으로, 우리가 통상 "용서하되 잊지는 말자"라 말하는 것에는 위선적인 부분이 있다고 지젝은 지적했죠. 그런 위선은 사실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니라 일종의 낙인찍기에 불과하다는 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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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위선 자체가 정신분석학적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지만 일본에게 갖고 있는 적대감은 우리 속에 남아있으니깐요.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트라우마에 대한 얘기를 한다고 해서 정신분석학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을 구분짓는 것은 프로이트식 무의식이겠죠. 이 무의식은 단순히 제가 지금 신은 양말을 느끼지 않는 정도의 무의식이 아닌, 저의 의식이 "부정"하는 무의식입니다. 제 무의식이 갖는 갈망을 제가 부정하는 것이죠. 대표적인 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겠습니다. 부모님과 성관계를 맺고 싶어한다는 것은 우리가 부정하지만 무의식의 갈망이다라고 하는거죠. 즉, 정신분석학은 심리학으로부터 우리의 갈망이나 감정을 부정한다는 것에서 구분이 되겠습니다. 다시 지젝의 예시로 돌아가게 된다면, 우리는 의식적으로는 현대 일본인들이 잘못이 없는 걸 알고 있고, 말씀하신 것처럼 "쿨하게" 행동합니다만, 우리의 마음 속에서는 적대감이 있다는 것이죠. 이런 한국인들의 태도를 지젝은 정신분석학적인 모순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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