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자들은 화형받아 마땅하지!

비트겐슈타인: […] 최근에 어떤 책을 읽었는데, 저자는 오늘날 우리의 부르주아 문명을 일으킨 인물이 칼뱅이라면서 그를 비난하더군. 그런 논지를 그럴듯하게 펼치기는 아주 쉽겠지. 하지만 나라면 칼뱅 같은 사람이 무슨 일을 했더라도 감히 그를 비난하지는 않을 거야.

드루어리: 그렇지만 칼뱅은 미카엘 세르베투스를 이단이라며 화형시켰는걸요!

비트겐슈타인: 자세히 이야기해보게.

그래서 나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한 세르베투스의 이단적인 책에 대한 이야기와, 그가 고의적으로 칼뱅이 한창 설교중일 때 제네바의 교회 안에 들어온 일화를 꽤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비트겐슈타인: 이런! 일부러 자신의 죽음을 자초했군. 세르베투스가 그랬다는 게 사실이라면, 칼뱅은 그를 체포하는 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겠는 걸?

M. O'C 드루어리, 「비트겐슈타인과의 대화」, 『비트겐슈타인 회상록』, 러시 리스 엮음, 이윤·서민아 옮김, 필로소픽, 2017, 256쪽.

비트겐슈타인: 나는 칼뱅 선생님이 한 일이라면 감히 비난하지 않아. 뭐? 칼뱅 선생님이 이단자 세르베투스를 화형시켰다고?! 거룩한 삼위일체를 비난하는 그런 이단자는 화형받아 마땅하지!

2e97b2000042bb5664e50a645f6bae41
이단자를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비트겐슈타인

11개의 좋아요

웃자고 올린 이야기이긴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의 종교철학에는 흥미로운 점들이 많아서 몇 가지 부연설명을 써봅니다.

사실, 비트겐슈타인이 강조하는 건 특정한 종교적 교리의 문제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인생의 다양한 시점에서 만드는 차이"의 문제이긴 해요. 그래서 삼위일체 교리와 관련해서도 『색깔에 대한 소견』(Remarks on Colour)이라는 텍스트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죠.

What I actually want to say is that here too it is not a matter of the words one uses or of what one is thinking when using them, but rather of the difference they make at various points in life. How do I know that two people mean the same when both say they believe in God? And one can say just the same thing about the Trinity. Theology which insists on the use of certain words and phrases and bans others, makes nothing clearer (Karl Barth). It, so to speak, fumbles around with words, because it wants to say something and doesn’t know how to express it. Practices give words their meaning. (L. Wittgenstein, Remarks on Colour, L. L. McAlister & M. Schättle (trans.), G. E. M. Anscombe (ed.), Berkeley & Los Angeles, Californi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317)

즉, 교리적으로 무엇인가를 말하거나 금지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말들에 의미를 주는 '실천(practices)'이 중요하다는 게 비트겐슈타인의 기본적인 종교철학적 입장이에요.

그렇지만, 이런 입장이 "종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삶이 중요하다." 같은 환원주의와도 구별되고, "종교들은 결국 하나의 정상에 오르기 위한 여러 길들이다." 같은 다원주의와도 구별된다는 점이 저에게는 꽤나 흥미롭네요.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은 (a)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기독교 전통에 깊이 들어와 있는 인물이고, (b)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학문적인 기독교 신학에도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거든요. (당장 저 인용구에서도 '칼 바르트'라는 20세기 개신교 신학자의 이름이 등장하죠.)

비트겐슈타인에게 예수의 부활이나 삼위일체 같은 기독교 교리가 단순한 '말(words)'로 폄하되거나 일반화될 수는 없다는 게 저에게는 분명해 보여요. 언젠가 비트겐슈타인의 종교철학에서 '교리'가 어떤 위치를 지니는지, 또 그런 비트겐슈타인식의 교리 이해가 오늘날 어떤 철학적 의의를 지니는지 연구해보고 싶네요.

7개의 좋아요

흥미롭네요. 비트겐슈타인이 삼위일체를 저렇게 생각했다면 이미 신앙이나 기독교의 범주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2개의 좋아요

비트겐슈타인도 삼위일체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 흥미롭네요. 이번에 ‘삼위일체의 필연성’에 관해 양상논리적으로 논증한 논문이 실리게 되어 올립니다. 관심있으신분들은 재밌게 읽어주세요^^

4개의 좋아요

굉장히 재미있는 주제네요! 꼭 읽어보겠습니다. "삼위일체론의 철학 사상사 속의 중요도에 비해 그리고 그것이 여전히 서양 철학계에서 지속적 탐구의 대상인 것과 비교하여 국내 철학계의 이에 대한 논의는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라고 하신 것처럼, 저도 삼위일체론이 단순히 신학적인 교의를 넘어서 철학적인 중요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현대신학에서 칼 바르트나 칼 라너 같은 인물들이 삼위일체론을 새롭게 강조하게 된 건, 삼위일체론이 계시론(doctrine of revelation)이라는 분야에서 지니는 중요성 때문이거든요. 이 분야는 철학에서 인식론(epistemology)에 대응하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는가?'라는 신학적 문제와 '실재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가?'라는 철학적 문제가 동형적인 고민인 거죠. 그래서 논문에서 언급하신 헤겔과 가다머도 삼위일체론을 자신들의 철학에서 강조하는 거고요. 이런 점에서, 저는 철학 전공자들도 신학의 삼위일체론에서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2개의 좋아요

저도 youn님과 같이 삼위일체론이 단순히 기독교 교의일뿐아니라 인식론과 관련있는 철학적으로 중요한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수론뿐아니라 존재론에 걸친 주제라고도 생각하고요.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존재’와 ‘하나’의 관계에 대한 아포리아가 삼위일체 문제의 근저에 놓여있다고 생각하거든요.

1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