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박사과정생 따위가 위대한 철학자들을 반박하려 하다니!

그런데 철학적 진리는 절대적으로 확실한 진리라는 것이 그렇게도 명명백백하다면, 어째서 철학의 바로 이러한 노력이 도무지 성공할 수 없단 말인가? 절대적 진리와 확실성을 위한 이러한 노력과 관련하여 철학의 전 역사를 통틀어 우리는 성공 대신 오히려 잇따른 파국만을 끊임없이 보고 있지 않은가?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그리고 헤겔 등과 같은 사유가가 박사과정생에 의해서 반박되는 수모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파국들은 너무도 파국적이어서, 그 파국들에 관련된 사람들은 그것마저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 (마르틴 하이데거,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들』, 이기상·강태성 옮김, 까치, 2001, 42쪽.)

하이데거: 감히 박사과정생 따위가 위대한 철학자들을 반박하려 하다니! 이게 파국이 아니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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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과정생들이 벌이는 형이상학적 파국에 눈살을 찌푸리는 하이데거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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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곧 같은 수모를 겪게될 줄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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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롭네요 ...

어쩌면 시대의 차이일 수도 있겠는데, 흔히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그리고 헤겔" 등의 사유가들은 오히려 학부 저학년 과목이라면 몰라도, 본격적인 강독이 시작되는 시점부터는 "반박"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왔기에 하이데거의 서술이 이채롭습니다.

요컨대 철학자 x의 저작이 '철학사'로 편입되는 시점은 곧

  1. x의 사유를 이해하는데 문헌학적 관점 및 기법이 동원되기 시작함.
  2. x의 사유를 '옹호' 혹은 '반박'하는건 중요하지 않게 됨. 중요한건 x의 사유를 해석 혹은 현대적 개념으로 재구성해내는 것.

이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저는 이런 관점이 고전 독일식 철학교육관이라고 생각해왔는데, 하이데거의 말을 들어보니 어쩌면 꼭 그렇진 않았을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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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하군요. 전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저학년 수업 과제들이 요약 위주고 학부 고학년 수업과제들은 평가 위주였습니다 (학부세미나와 대학원 수업들은 주제가 주어지지 않았었습니다). 고학년 수업에서 과제 주제가 나오면, x의 주장을 설명하고 평가 (evaluate)하라 등의 주제가 제일 많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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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신기하네요. 철학사 강독 수업에서도 x의 주장을 설명 및 평가하는 과제가 많이 요구되었나요?

사실 어찌보면 철학사의 거인이 펼쳤던 주장 및 논증이 돌이켜보았을 때 건전(sound)치 못했던 경우는 꽤나 잦으므로, 당대의 맥락에 대한 문헌학적 이해를 통해 옛 거인의 논증을 최대한 타당(valid)하게 해석하는 방안을 제시하는 훈련이 저에게 있어서는 좀더 익숙한 훈련 방식 같습니다. 좀 극단적 얘기입니다만, 탈레스의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는 주장의 진위를 그 자체로 평가하는 것이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러셀의 라이프니츠 해석', '데리다의 니체 해석', '핑카드의 헤겔 해석' 등을 평가하는 식의 과제를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의 철학',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 자체를 평가하는 식의 과제보다 좀더 철학사 교육 과정에서 자주 접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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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철학사 수업도 거의 그랬습니다. 예를 들어, "헤겔의 acosmism의 해결 방안을 설명하고 평가하여라," "칸트가 'Refutation of Idealism'에서 나의 존재를 의식한다는 것이 외적 공간의 물체를 증명한다고 한다. 이 주장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와 같은 주제들이었습니다. (+추가: 지금 확인해보니 프로이트 수업에서도 그런 과제들이 대부분이었네요. 예를 들어, "프로이트의 transference의 개념이란 무엇인가? 이 설명이 울프맨의 케이스를 잘 설명하는가? 다른 대안은 있는가?" 가 한 주제였습니다.)

이것도 굉장히 신기합니다. 제가 들은 수업들에서는 한 철학자가 다른 철학자에 대해 코멘트한 건 거의 못 쓰게 했거든요. 예를 들어, 스피노자 세미나 때 들뢰즈의 스피노자에 대해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교수님이 들뢰즈는 금지 시켰습니다. 무조건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관한 글을 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 텀페이퍼는 2p49c를 옹호하는 글이었습니다. 스피노자의 데카르트 비판은 완벽하진 않지만 조금의 도움만 받으면 성공한다란 주장이었습니다). 대학원 세미나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 헤겔 세미나에서는 피핀의 해석을 평가할 수도 있었고, 헤겔/하이데거 세미나에서는 하이데거의 헤겔 해석을 평가할 수도 있었죠. 같은 시대에 살면서도 이렇게 다른 과제 주제들을 접하는 게 신기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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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hk9297 동질감이 느껴집니다 ㅠㅠ 학부 때 스피노자 수업에서 발제를 맡게 되었는데 의욕이 넘쳐서 들뢰즈를 비롯한 프랑스의 스피노자주의자들을 마구 끌어와서 발표했었거든요. 교수님께 쿠사리 먹고 그 이후 수업에서 프랑스 연구자들을 다루는 것을 금지당했습니다 ㅋㅋㅋ

미국에서 철학과 학부를 졸업한 친구 역시 학부에서 2차문헌을 금지시키는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더라구요. 의욕넘치는 학생들 입장에서는 사실 2차 문헌을 배제한 채 원전만을 읽고 그에 대해 옹호/반박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회의적일 때가 있잖아요. 물론 날 것 그대로의 원전을 직접 마주하고 그에 대해 자기스스로 생각을 전개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경험이라는 것도 공감하는지라 교수들이 왜 그러는 지도 이해가 가긴 합니다. 학부 수준에서 2차 문헌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는 항상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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