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는 삶..?

곧 수시 원서를 압둔 고3입니다..
철학과에서 교직이수를 받고 저희 중학교로
오셨던 교생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
철학이라는 학문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철학과 혹은 윤리교육과를
꿈꿔왔습니다.

고등학년 3년 동안에도 철학 동아리 부장(2년) /
죽음관 관련 사회 부스/ 환경윤리 관련 수업량 유연화
등등 다양한 활동을 직접 진행했고,
솔직히 살면서 철학 보다 더 좋아하는 걸
못 찾을 것 같은데...

최근에 들어서 학교 후배 중 정말 분석하고
연구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친구가 보여서..
점점 부족해보이는 제 자신이 초라하게만 느껴집니다..

돈을 못 벌더라도 좋아하는 사상의 연구를 하고 싶은 데..
좋아한다는 마음 하나 만으로 이 길을 가도 되는 건지
혼란스러운 마음에 글을 올립니다..ㅎㅎ

정신차리라는 현실적인 대답도 좋고, 응원도 좋고
그냥 이런 고3이 있구나 하시고 지나치셔도 좋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털어놓기 힘들어서
여기라도 적습니다..ㅎㅎ

5개의 좋아요

(1) 길을 끝까지 걷는 일에 재능만큼 부수적인 것은 없다 생각합니다.

사실 무슨 일을 하는데, "재능"이라는 단어만큼 오독의 여지가 많은 단어를 본적이 없습니다. 현실은 게임이 아니고, 스포츠나 수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활동에서 단일한 스텟/재능이 결과물에 압도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의외로 드뭅니다.

철학과 거리가 멀어보이는 사교성조차, 따져보면 차후 대학원과 교수 생활에서 네트워킹하는데 몇배는 유리할 것이고, 이는 보다 좋은 환경에 영향을 미쳐 장차 결과물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 분석력이 좋다하더라도, 고집이 강하고 다른 연구들을 무의미하다 생각하면, 논문 중심으로 돌아가는 학계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겠죠.

이런 문제가 다 해결되고, 재능이 있더라도 철학에 흥미를 잃고 다른 길로 갈 수도 있고요.

사람은 저마다의 강점/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영역이 딱 그것과 일치하진 않을 수도 있죠. 하지만 그 영역 안에서도 자신의 강점이 어떻게 좋데 작용할 수 있는지는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생각합니다.

(2)

또한 생각보다 철학은 별 것 아닙니다. 다양한 걸 해보세요. 철학보다 재미있는 것이 있을수도 있고, 의미있는게 있을 수도 있고, 혹은 도저히 이게 부족한 삶을 살고 싶지 않기에 철학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언제나 삶은 철학보다 거대합니다. 철학 없이도 삶은 살아지고, 그것도 행복하게 살아질 수 있습니다.

저도 중학교 때부터 철학과를 희망했고, 결국 갔고 대학원까지 나왔지만 제 선택으로 더 이상 학계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딱히 후회는 없어요.

(3)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적어도 포기하는 순간이 온다면,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이유에서 기꺼이 포기하게 되길 바랍니다. 아니라면 성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14개의 좋아요

(1) 생각보다 학부, 나아가 석사과정, 어쩌면 박사과정까지의 기간은 별 게 아닙니다. (특히 학부 전공이라는 게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쌓을 학력 다 쌓고 이쯤이면 더 시간을 투자할 마음이 안 생긴다, 싶을 즈음 포기하고 다른 일을 하셔도 늦지는 않을 겁니다. (돈이 좀 아깝긴 합니다 ㅋㅋㅋ.)

(2) @Mandala 님의 말씀에 상당 부분 동의합니다. 반대 방향에서, 철학적 관심이나 재능을 살려서 직업 철학자가 아닌 삶을 사는 것도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학계와 대중을 잇는 종류의 사업에 참여하는 것도 큰 기여이겠고요. (돈 많이 버셔서 이런거 하면 얼마나 좋아요(?))

(3) 철학 공부의 즐거움이 아무리 크더라도, 철학을 굳이 업으로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을 취미로 하면서 철학적 탐구에 진지하게 관심갖는 것도 가능한 선택입니다. 화이팅!

8개의 좋아요

수학을 좋아하는 것과 직업수학자가 되는 것 사이에 무시못할 간극이 있는 것처럼, 철학을 좋아하는 것과 직업철학자가 되는 것 사이에도 무시못할 간극이 있습니다. 철학을 좋아하는 것은 개인적인 향유의 영역이고, 직업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연구를 통해서 학문공동체 및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성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이죠. 철학을 직업으로서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 "연구자"로서 내가 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고민해보세요. 흔히 돈을 많이 못번다는 경제적 현실만이 고려되는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윗분들이 말씀하셨듯이 학부전공으로서 철학을 선택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고 도전적인 것이 아닙니다. 철학을 좋아하신다면, 그리고 철학과로 진학하고 싶으신다면, 철학과 안가면 후회할 것 같다면 (!), 철학과에 진학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것이 오히려 힘들지 않을까요? 재능을 말씀하셨는데요. 만약 직업철학자의 길을 선택하신다면 앞으로 학석박 통합 약 10년 정도의 트레이닝을 받으셔야 할 텐데, 이 긴 과정에 비추어본다면 지금의 재능 차이(이것이 뭔지도 모르겠거니와)는 대부분의 경우 정말정말 사소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10개의 좋아요

정말 결정해야할 시기가 오니
생각이 많아져 남긴 주저리였는 데
좋은 말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까진 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무언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보단 내가 좋아하는 걸
연구해 보고 싶고 이걸 업으로까지 하면
행복하지 않을까라는 단순한 알고리즘인 것
같습니다.. (연구를 하게 된다면 더 생각해 봐야 할
질문이겠죠.)

해주신 말들 처럼 지금 당장으로써 해보고 싶은
공부가 철학이니 일단 해보고 싶은 데까지 해보고
정말 그만해도 되겠다 싶어지는 날 그만두겠습니다..

정말 10년 후에 석박사를 밟으며 연구하고 있을지
아님 또 다른 길을 찾아 떠나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남겨주신 답변들은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bowing_man:t2:

7개의 좋아요

고등학교의 열정이 미래까지 이어지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때는 경제학 공부를 하고 싶었거든요. 근데 그 후 산업공학 - 순수수학 - 철학의 수순을 밟았고, 현재는 헤겔의 형이상학에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때 꿈꿨던 전공 (경제학) 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분야죠.

하지만 위에 분들이 말했던 것처럼, 학부 전공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꼭 전공을 살려서 살아갈 이유도 없을 뿐더러, 꼭 살리고 싶다해도 복수전공 - 석사 수순을 밟으며 진로를 틀기도 아주 어렵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로스쿨로 가는 방법도 있고요).

그리고, 재능에 있어서 제 생각을 간략히 말하자면, 압도적인 재능이 아니라면 크게 영향은 안 끼칠 것 같습니다.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은 재능에 비해 아주 크다고 생각하거든요 (압도적인 재능이 아니라면요). 물론 수치화하긴 힘들겠지만 수치적으로 말해볼게요. 누군가는 1에서 시작하고 다른 누구는 50에서 시작한다고 해봅시다. 처음에 2만큼 노력했을 때, 3과 52가 되면, 그 49의 차이는 너무나도 커보일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1만만큼을 노력해서 1만1, 1만50이 됐을 때 저 49의 차이는 크게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손흥민이 골 한 두 개 덜 넣었다고 덜 위대한 선수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처음 시작할 때 보이는 재능의 차이는 나중에 의미없는 차이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7개의 좋아요

대학원 시절에 연구실 교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이 생각나네요.

"OO씨, OO씨가 철학을 잘한다는 사실에 너무 의미부여 하지 말아요. OO씨는 다른 일도 충분히 잘할 수 있는데 철학도 잘하는 것 뿐이예요."

저는 이 조언에 크게 영향을 받아 대학원 졸업 후, 오만가지 일을 하다가 현재는 개발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20대의 10년을 철학하는 데 온전히 투자했는데 정작 아무 관련없는 일로 돈을 벌고 있네요.

철학에 재능이 없다고 느끼시거나 하기엔 이른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설사 철학에 재능이 없더라도 전혀 의외의 영역에서 재능을 발견하실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전 33살이 되어서야 제가 개발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철학은 분명 매력적인 학문입니다. 지금 일하는 과정에서도, 비즈니스적으로 여러 판단을 할 때도 철학공부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마들렌 먹는 사고방식은 도움이 안 되고, 논리학이나 형이상학, 언어철학은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가 투자한 10년이 엄청 아깝지는 않더라구요.

아직 젊으시니 너무 닫아놓지 마시고 여러가지 경험을 하시면서 천천히 결정하셔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13개의 좋아요

여러모로 응원합니다. 다만 다른 분들 말씀처럼 미리 앞으로 장래를 좁게 예단하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를테면 대학에 가실 경우, 복수전공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여러 선택지를 만들어두시는 것을 강력히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8개의 좋아요

철학은 역사도 길고, 매우 추상적인 학문이기에, 제도권 외에서는 제대로 교육을 받기 힘듭니다. 아마 지금은 그 후배가 많이 뛰어나다고 생각해도, 막상 학부 진학 후, 대학원 진학 후에 다시 보면 생각이 많이 바뀌어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실력이 뛰어나다는 평가 기준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학문의 매력은 타인과의 비교가 아닌, 자기 자신만의 길을 걷는다는 점에 있는 것 같습니다. 같은 철학 안에서도 분야가 매우 다양하고, 같은 분야 안에서도 각각의 논문마다 역할이 다릅니다.

엘리트 코스를 걷지 못하더라도, 엘리트가 놓치고 있는 부분을 파헤치고, 그것을 통해 다른 누군가에게 영감을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논문을 많이 쓰시는 교수님도 있고, 논문보다는 대중과 소통하시는 교수님도 계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철학이 너무 재밌어서, 단순하게 '내가 좋아하는 걸 전공해야지'라는 마음으로 철학과에 진학했습니다. 막상 대학교 1학년 때는 고등학교 때 생각했던 철학과 너무 달라서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2학년 때부터 철학에 다시 흥미를 붙였습니다. 그리고 석사 졸업 후, 직업으로서의 철학에 한계를 느끼고, 사회에 진출했습니다. 사회 진출 후, 미련이 남아 다시 철학에 도전 중입니다.

이렇듯,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내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하고 계시는 고민은 제 경험상 학부 졸업 후, 혹은 석사 졸업 후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비록 온라인이지만, 철학에 매력을 느끼시는 분을 만나 매우 반갑습니다.

예전에 제가 석사과정 1학기 때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내가 자네 나이일 땐, 칸트, 헤겔을 꿈꿨어."

어떤 길을 가시든지 당차게 나아가시길 응원합니다.

10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