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인의 번역 불확정성 원리 적용 (물리적 실체 & 감각 경험에 대한 문장)

슈토이프 <현대인식론 입문>을 읽던 중 콰인이 전통 인식론을 비판하며 번역 불확정성 원리를 언급한 까닭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질문 올립니다.

p368 "감각 경험은 외견상 감각 경험을 일으키는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기에는 전혀 충분치 못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임무는 감각 경험과 물리 세계에 관한 믿음 사이의 논리적 틈에 다리를 놓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식은 물리적 대상에 대한 믿음을 감각 경험만을 언급하는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다. 콰인에 따르면 이 기획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물리적 대상에 관한 문장을 감각 경험에 관한 문장으로 번역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왜 물리적 대상에 관한 문장은 감각 경험에 관한 문장으로 번역될 수 없을까요?
예를 들어 ‘물은 투명하다.’라는 문장이 있다고 했을 때, 이 문장의 주어를 물에 대한 우리의 시각적 표상으로 바꾸고 술어를 색깔에 대한 우리의 시각적 표상으로 바꾸면 되지 않을까요..? 제가 콰인의 의도대로 이해를 못한 것 같은데 답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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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설명이 (슈토이프가 의도한) 콰인에 대한 설명인지는 불확실하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해봄직합니다.

질문 주신 의견대로 바꿔보겠습니다. '(내가 보는) 물에 대한 시각적 표상은 투명함이라는 표상이다.'
이렇게 치환한다하더라도, 여전히 물리적 대상 = 감각 경험와 일치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려면, 여러 부수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감각 경험, 특히 시각 경험에서 물리적 대상/감각 경험의 불일치를 논하는 유구한 예시는 착시와 망상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젓가락을 물컵에 넣으면 젓가락이 휘어보이는 '착시'를 경험합니다. 또한 몇몇 신경학적/정신과적 이상이 생길 경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보는 '망상'을 경험하기도 하죠.

물리적 대상 = 감각 경험이 일치할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착시/망상처럼 감각 경험과 물리적 대상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효과적으로 설명해야 할 듯합니다. 이것이 "논리적 틈"이겠죠.

슈토이프가 보기에 (콰인을 가져와서) 감각 경험만으로는 이 '논리적 틈'을 매울 수 없으니, 다른 '인식론적 수단'을 동원해야 한다 (뭐, 직관일 수도 있고, 상식적인 공리들일 수도 있고 타인의 증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콰인을 경유한만큼] 고도화된 과학 체계 등등이 후보군일 듯합니다.), 본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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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dal님, 우선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각주를 보니 콰인의 번역 불확정성 신조에 그 근거가 있다고 되어 있어 조금 헷갈리네요. 위와 같이 이해해도 번역 불확정성 원리를 적용해서 이해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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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콰인의 번역 불확정성 원리를 '적용한 이해'인지는 저도 조심스럽네요.
제가 SEP를 통해 이해한 바에 따르면 적어도 '번역 불확정성의 원리'는 과학 철학의 '미결정성' 문제를 언어로 확장한 테제 같습니다.

미결정성이란, 말 그대로 같은 경험적 현상에 대한 '여러 다른' '동등한 정합성을 가진' 이론을 제시할 수 있기에,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죠.

우리는 언어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는데, 언어를 '동등한 정합성을 가진' 여러 가지 형태로 '번역'할 수 있기에, '불확정되어 있다'라는 겁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기인하는데.

(a) 지칭의 불확정성 ; 예를 들어 토끼라는 대상을 보았을 때, 저희는 "저건 토끼다." 나아가 "저건 토끼성을 가진 물체다." 뭐든 말할 수 있죠. 여기서는 (어떠한 형이상학적 이론을 가정하느나에 따라) 지칭될 수 있는 대상이 다양해지고, 이 중 무엇이 '옳다' 정하기에는 난감한 구석이 있어 보입니다.
(b) 다른 하나는 (콰인 당시에는 없었지만) 일종의 초내포적 문장처럼 보입니다. "저 사건은 40% 확률로 일어난다." "저 사건은 60% 확률로 일어나지 않는다." 둘은 동일한 지칭에 동일한 내포지만, 묘하게 다른 인지적 기능을 수행하는 듯합니다. 이 경우, 무엇이 더 '옳은 인지적 기능인지' 결정하기 어렵겠죠.

(2)

콰인의 번역 불확정성에 대한 제 이해는 이정도입니다. 이 정도 이해가 옳은지 사실 확신이 없네요. 그리고 이 이해가 옳다고 해도, 이 중 무엇이 슈토이프가 의도한 것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추측하기로는 둘 다 아닐까요? 감각 지각에 대한 어떠한 태도를 취하듯, 사실 무슨 이론이 옳은지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측면에서 번역 불확정성을 말했다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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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잘 아는 주제가 아니라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는대로 간단히 설명해 볼게요.

여기서 (a) 물리적 대상에 관한 문장을 (b) 감각 경험에 관한 문장으로 번역한다는 것은,

(a) 나는 투명하고 액체이며 컵 안에 담겨 있는 것에 관한 인상이 있다

(b) 나는 컵에 담긴 투명한 물을 보고 있다

이 두 문장이 있다고 할 때, (a)로부터 (b)를 연역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콰인은 번역불확정성 신조를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번역을 위한 편람이 미결정적이라는 것이죠. 나아가 콰인은 물리적 대상에 대해 생각해 보았을 때 이를 감각 경험으로 번역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미결정된 편람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전통적인 인식론은 이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콰인의 번역불확정성을 설명할 때 보통 나오는 토끼와 Gavagai에 대한 내용을 이미 아신다고 전제한 설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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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지적되어야 할 것은 콰인이 Gavagai에 대한 괴랄한 사고실험의 예시 말고 실제로 어떤 구체적인 예시가 있는지에 대한 언급을 한 것이 제가 알기로 없습니다. 연구자들이 콰인의 불확정성 테제의 (받아들일만한) 실제 예시들을 제시하려고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그리 성공적이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콰인의 테제를 인용하는 것은 언제나 추상성을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콰인이 주장하고자 한 테제는 결국 의미(혹은 동일한 의미)를 결정해주는 객관적 사실(objective fact)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1. 여러가지 번역들 중에서 무엇이 더 나은 번역인지를 결정할 수 없다
  2. 해당 번역을 지지할만한 경험적 데이터를 충분히 가지고 있지 못하다

라는 주장 등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콰인이 테제는 훨씬 급진적입니다. 오히려 콰인의 테제는

  1. "모든" 객관적 사실에 들어맞으면서도 서로 상충하는 번역이 (심지어 단일한 언어 안에서도) 가능하다.
  2. 특정한 번역 매뉴얼을 지지할 수 있는 그러한 경험적 사실이 "없다"

슈토이프의 예시는 다음과 같은 의미인 것 같습니다.
물리적 대상의 체계를 P라고 하고, 우리의 가능한 감각경험의 체계를 S라고 합시다. 물리적 대상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일부 이론가들은 만약 P의 외부존재를 우리가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없더라도, 모든 P의 사실들을 S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면 대충 P=S가 성립하므로 P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감각경험은 외부대상에 비해 certain하니까요.)

모든 P의 사실들을 S의 언어로 번역하는 매뉴얼을 L이라고 합시다. L에 따라 모든 P의 사실들은 S로 번역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콰인이 주장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모든 P의 사실들에 들어맞으면서 L과 상충하는 번역 매뉴얼 M이 언제나 가능합니다. 심지어 어떤 물리적 사실 P1을 L에 따라 번역한 L1과 M에 따라 번역한 M1는 그 의미상 서로 모순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극단적일 경우 동일한 물리적 대상 P1에 대해서 L1은 "투명한 물"에 대한 감각경험을, M1는 "불투명한 물"에 대한 감각경험을 의미하게 될 수 있습니다. L과 M 모두 모든 P의 사실에 들어맞기 때문에, P는 L과 M중에서 하나를 결정해줄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P=S의 일대일 번역은 실패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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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맥락을 몰라서 확실치는 않습니다만, 인용해주신 내용만 보면 어쩌면 저자는 <두 독단>의 다음 부분을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합니다.

Radical reductionism, conceived now with statements as units, sets itself the task of specifying a sense-datum language and showing how to translate the rest of significant discourse, statement by statement, into it. Carnap embarked on this project in the Aufbau.
[...]
Carnap did not seem to recognize, however, that his treatment of physical objects fell short of reduction not merely through sketchiness, but in principle. Statements of the form 'Quality q is at point-instant x; y; z; t' were, according to his canons, to be apportioned truth values in such a way as to maximize and minimize certain over-all features, and with growth of experience the truth values were to be progressively revised in the same spirit. I think this is a good schematization (deliberately oversimplified, to be sure) of what science really does; but it provides no indication, not even the sketchiest, of how a statement of the form 'Quality q is at x; y; z; t' could ever be translated into Carnap's initial language of sense data and logic. The connective 'is at' remains an added undefined connective; the canons counsel us in its use but not in its elimination.

만약 저자가 염두에 두는게 콰인의 해당 논변이라면, 이는 반드시 그 자체로 보다 일반적인 번역 불확정성 원리에 의존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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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b님이 아주 잘 설명해주셨고, wildbunny님이 적절한 구절을 잘 찾아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Mandala님과 FrancesYates님이 '미결정성' 문제를 언급한 점에 대해 짧게 보충 설명을 드리고 싶네요.

사실, 콰인의 논증을 정확히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습니다. 그 해석 중 하나가, 콰인의 '지시체 불가투시성', '번역 불확정성', '의미의 불확정성' 테제가 상호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다음 그림처럼요.


이승종, 「의미와 해석에 관한 콰인/데이빗슨 논쟁」, 『철학』, 제39집, 1993, 328쪽.

이런 해석이 옳다면, 번역 불확정성은 결국 콰인이 '불확정성' 혹은 '미결정성'에 대해 주장한 다른 논의들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거에요. 또, 콰인에게 반대하는 입장이라면, 콰인의 논제가 결국 일종의 순환논증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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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콰인이 제시한 번역 불확정성의 문제는 참 난해한 문제 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댓글 남겨주신 회원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이따금 시간이 날 때마다 다시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