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중세적 상황과 철학

*최근 떠오른 생각들을 넌아카데믹하게 간략히 적은 글입니다. 가볍게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새로운 중세적 상황과 철학 : 환경, 반출생주의, 트랜스휴머니즘 등.

언젠가부터 환경문제는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심오한 과제로 자리잡았고,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거의 범죄시되거나, 음모론자로 몰리거나, 적어도 학계에서 무시를 받는 요인이 되었다. 사실상 이의를 용납하지 않고, 어떤 절대적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어떤 논자는 현재 환경보호운동과 이와 연관된 이론들의 체계가 사실상 ‘세속종교’가 되었다고 평한다. (실제로 핀란드의 헬싱키 대학에서는 그레타 툰베리에게 명예 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였다)

VHEMT

최근 들어 VHEMT (Voluntary Human Extinction Movement) 즉, 자발적 인류 절멸 운동이 문제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문자 그대로 인류는 사라져야 할 존재이며 더 이상 출산을 해서는 안 된다고도 한다. 극단적인 주장임이 분명하지만 의외로 수긍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이 운동은 상당히 세를 불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VHEMT 운동가는 Antinatalism이 인류 절멸/멸종을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Antinatalism(반출생주의)과 VHEMT의 주장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반출생주의는 근원적으로 인간의 고통과 해악, 도덕에 관한 주장이다. 즉, 태어나서 아무도 삶의 고통을 피할 수 없고, 타인을 그런 고통에 빠트리는 것은 비도덕적이므로, 출생을 통해 한 사람을 고통으로 가득한 세상에 살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자발적 인류 절멸 운동은 환경을 오염과 오염의 원인인 인간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인간이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주장 모두 극단적이지만, 그렇다고 방법까지 극단적인 것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자살이나 강제적 불임 수술, 대량 학살 등의 방법을 권고하거나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환경 파시즘적인 정치 권력이 출현한다면 반출생주의와 같은 철학적 견해나 VHEMT의 주장은 권력을 위해 이용될 가능성이 무척 크다.

Calico (calicolabs.com)

흥미로운 것은 위에서 말한 것과 완전히 반대되는 취지의 연구, 즉 인류의 영생을 위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데,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아는 형태의 인간의 사라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구글이 투자한 California Life Company, 즉 Calico에서 인간의 수명연장과 영생을 연구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간략히 말해 영생의 형태는 몇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몸이 늙지 않도록 하는 방법, 신체를 사이보그화하는 방법 (이것은 종국에는 세 번째 방법으로 귀결된다), 인간의 의식만을 추출해 기계에 업로드하는 방법 등이다. 첫 번째를 제외한 이 방법들은 사실상 현재 우리가 아는 형태의 인간의 소멸로 귀결될 것이다. 어쩌면 초대형 슈퍼컴퓨터가 있는 빌딩 하나에 전 인류가 담기게 될지도 모르겠다. 거칠게 말해 이런 경향의 현실과 관련되는 논의가 트랜스 휴머니즘 철학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실정에서 철학은 환경을 위하여 위의 반출생주의나 자발적 인류 절멸 운동을 지지할 수도 있고, 이를 극단적인 주장이라 비판할 수도 있다. 또 트랜스휴머니즘을 지지하거나 반대할 수 있다. 혹은 전통적인 철학의 거인들 연구나 철학사 연구에 매진할 수도 있고, 새로운 철학적 주장을 제시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이제 철학은 이 시대의 실천적인 과제로 제시된 환경문제와 미래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인공지능 등이 가져온 철학적 문제를 무시하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제 생태철학은 21세기의 제1철학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현재 철학이 처한 난국이 보인다. 철학이 세속종교의 신학을 위한 시녀가 되어버릴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여전히 학자들은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으나 새로운 세속적 무신론이나 이단적 주장은 배척될 것이다. 그리고 과학은 이 세속종교를 유지하는 신학으로 기능하게 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중세적 질서를 연상시키며, 이 질서는 환경문제의 장기화와 더불어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

여기서 이런 상황을 일거에 극복할 방법을 제시할 수는 없다. 어쩌면 내가 ‘세속종교’와 ‘새로운 중세적 상황’이라며 상황을 과장하거나 성급한 일반화를 저질렀거나 너무 비관적인 시각을 가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철학자들이 현시대를 사유하고 철학적/반성적 주장과 논의를 아직 자유롭고 유효하게 할 수 있다면, 아직 캄캄한 밤은 오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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