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에 대한 나의 견해 (드래프트?)

(-) 여러 가지를 궁리하다보니, 일종의 논문? 단행본과 같은 개요가 만들어져서 기록하고자 여기에 적습니다. 의견을 남겨주셔도 좋고 아니어도 좋습니다.

(0) 개요

  1. 도와 도를 탐구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 실용주의적 기준과 황금기라는 예시
  2. 장자의 회의주의는 정확히 무엇인가? ; 보편적 지식에 대한 회의
  3. 이 회의주의적 인식론의 토대로서의 형이상학 ; 화(化)의 형이상학
  4. 안전한 지식을 구획짓고자 하는 시도로서의 장자 철학

(1) 도와 도를 탐구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도'란 무엇인가? 참(truth)인가? 아니면 궁극적인 좋음(good)이라는 추상적인 무언가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이는 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왜냐하면 (i) 문헌의 용례는 참인 경우와 좋음인 경우 모두 존재하는 듯하며 (ii) 때로는 좋음과 참을 구분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예컨대, 현실에 대한 참인 지식은 좋은 행동-결과를 위한 토대로서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좋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제자백가 시대 사상가들은 무엇을 '도'인지 서로 논쟁할 때, 그 기준으로 삼았던 것은 있어 보인다. 이는 이 '도'를 따르는 것 (혹은 구현한 것이) 얼마나 사회적/정치적 태평성대를 가져왔는지이다. <맹자>와 <순자>는 성선/성악으로 성에 대한 입장이 다르지만, 둘 다 유가의 전통을 확립한 요순시대가 가장 '황금기'이며 도가 이루어진 시기라 주장한다. 한편 <장자> 외편의 저자들은 요순시대 이전, 유가의 전통이 '억지로 세워지기' 이전의 시대가 도가 이루어진 황금기라 주장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도'가 무엇인지 확답하긴 어렵지만, '도'에 대한 탐구가 사회적/정치적 태평성대, 즉 실용주의적 함의가 있음을 우선 지적할 수 있겠다.
따라서 도에 대한 장자의 탐구 역시도 기본적으로 실용주의적 목적이라는 점을 인지하는 것으로 논문을 시작하겠다.

(2) 장자의 회의주의는 정확히 무엇인가?

장자가 회의주의자였다는 점은 두루 지적되는 사항이지만, 정확히 어떤 종류의 회의주의자였는지는 다루는 텍스트는 드물어보인다. 그는 특정한 종류의 지식 (예컨대, 증언이나 감각 지각?)을 부정했는가? 아니면 정당화되는 지식이 없다 주장했는가?

나는 장자가 (i) x에 대해 모든 상황적 차이를 초월한 보편적인 지식을 회의한 사람이라 주장할 것이다.

<장자> 내편에서 우리는 지식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볼 수 있지만,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a) 여러 편에 흩어져있는, 회의주의적 논변을 통해 지식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례들 (b) <제물론>에서 묵가/명가의 학문을 대상으로 쓴 듯한 긴 논설문.

(b) <제물론>의 논설에서 장자는 모든 종류의 지식이 불가능하다는, 철저한 회의주의자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제물론>은 명제[변]이 옳음/그름 혹은 이것/저것이라는 값을 가져야 한다는 묵가의 견해에 반대하며, 변이란 옳을수도 그를수도 있다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순처럼 보이는 장자의 이러한 주장은 어떠한 것에 기인하는가? 이는 모순율을 허용하는 것인가?

내가 볼 땐 아니다. 왜냐하면 이는 (a)의 여러 사례들과 정합적이지 않다. <소요유>의 여러 단락들에서, 장자는 혜시가 말하는 무용한 것들 (거대한 박, 구부러진 나무)이 '항상 무용하지 않다.'라고 주장할 뿐, 혜시가 말하는 상황에서 '무용하지 않다'는 반박을 하진 않는다.

장자는 여러 가지 형태의 회의주의를 주장한다.

(i) 인간의 물리적 한계에 호소하는 '일상적 회의주의' ; <소요유>에서 지속적으로 말하는 것은, 우리는 '모든 상황에 대한 지식'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거짓말처럼 들리는 신선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증언도, 엄청나게 긴 수명을 살아간다는 팽조에 대한 증언도 우리는 검증할 방법이 없다.

(ii)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x에 대한 지식 (부분 - 전체의 문제) ; 무용한 것에 대한 혜시와의 담론. <칙양>편에 나오는 영공에 대한 평가. (영공은 (a) 술고래에 쾌락을 남닉하는 등등 안 좋은 일은 다 했지만 (b) 현인을 대할 때는 기품이 있었다거나 검증할 수 없는 신화적인 이유 때문에 영공으로 불린다.)

(iii) 변화로 인해 달라지는 x에 대한 지식 ; <제물론>에서 혜시의 패러독스 중 "오늘 월나라에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는 장자에 의해 단호하게 헛소리로 취급된다. (혜시의 이러한 패러독스를 해석할 방법은 여러 가지 있으나, 문헌상 정확히 혜시가 무엇을 의도했는지 판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오늘"과 "어제"의 지표사적 표현을 이용한 말장난이라는 해석을 따를 경우, 장자는 지표사의 자의적 활용에 대해서는 부정했다 볼 수 있다.)

다만 장자가 굉장히 진지하게 받아드리는 것은 "우리는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간다."라는 시간적 변화다. x가 살아있을 때에 대한 지식은 언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는가? 우리는 알 수 없다.

(3) 화의 형이상학

그렇다면 적어도 '구부러진 나무가 도구로 쓸 때는 무용하다.'는 지식 정도는 우리가 아는 것 아닌가? 장자는 이 지식조차 '보편적 지식'으로 불릴 수 있는지 의심하는 듯하다.

화에 대한 이야기 - 변화 - 묵가/회남자/순자에 나오는 예시.
(제자백가에서 변화는 중요한 문제 중 하다. 왜냐하면 전혀 범주가 다른 것으로 동일한 x가 변하기 때문. 과거에는 개구리가 메추라기도 변한다 여기기도 했음. 동일한 x일지라도, 개구리일 적에 대한 사실과 메추라기일 적에 대한 사실이 동일한가? 동일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이 변화가 어떻게 진행될지 추측할 수도 없다.)

이는 <소요유>에서 곤이라는 물고기가 붕이라는 새로 '화'한다는 표현에서도, <제물론> 말미에 장주라는 사람이 나비로 '화'한다 혹은 그 역이다라는 인식에서도 나타난다.

(또한 이는 의존[시]라는 개념으로 장자에게서 지속적으로 드러난다.)

(4) 안전한 지식

<대종사>의 서두는 이러한 천의 화에 대한 지식을 인간이 얻을 수 없다는 한계에 대한 인정으로 시작한다. 우리의 지식은 대상에 의존하지만, 대상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대상이 놓은 상황의 변화일수도, 대상 자체의 변화일 수도 있다) 인간의 안전한 영역을 넘어서려는 지식은 '언제나 틀릴 수 있으며' 그렇기에 자신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위험한' 지식이다.
그렇다면 안전한 영역의 지식이란 무엇인가? 바로 <양생주>에서 나오듯, 이러한 지식을 잊는 것. 그리고 자신의 (원초적) 본능에 따르는 지식들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지나치게 신중한 자세처럼 보일 수 있다. 이는 장자가 기본적으로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제물론>의 서두 장자는 인간이란 태어나서 끊임없이 노동을 하다가 죽는 비참한 존재로 묘사한다. [여기에는 노동을 통한 성취와 같은 긍정적인 가치들은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장자에게 '행복'이란 기본적으로 에피쿠리언처럼 고통의 최소화를 기반으로 조금씩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적극적으로 사회 생활에 나서지 않는 것을 기본적인 입장으로 선언하는 <인간세>나 <소요유>의 여러 편에서도 알 수 있다.)
(동시에 장자에게는 묘한 숙명론의 뉘앙스가 있다. 장자는 하늘이 선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엄청한 고통을 안겨주는 악이라 여기지도 않는다. 하늘은 그저 인간이 수용해야 할 '운명'이며, 고통을 늘리는 것은 이 숙명을 깨닫지 못하고 반항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일 뿐이다.)

부가하자면, 이는 묵가의 행위 철학과도 관련이 있다.

<경> 76에 묵가는 '행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행함. 앎이 막히는 것은 욕망에 묶였기(縣) 때문이다.
해설 ; 손가락을 자르려고 하는데 앎이 그 해로움을 알지 못한다면, 이것은 앎의 죄다. (중략) 포를 뜨는 것은 지혜가 아니고, 손가락을 자르는 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다.

이 부분은 사실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손가락 자르기'와 묵가의 예시는 <열자>의 양주편에 아주 흥미로운 형태의 담론으로 제시된다. 한 터럭의 털로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구하겠냐는 질문에 양주가 대답하지 않는다.

그러자 양주의 제자인 맹손양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한 가닥의 터럭은 살갗보다는 작고 살갗은 몸의 한 마디보다 작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 가닥의 터럭이 쌓여서 살갗을 이르고 살갗이 쌓여서 몸의 한 마디를 이룹니다." (따라서 자해해서 만금을 얻는다면 한다는 당신의 대답과 사지 중 하나를 끊어서 한 나라를 얻을 수 있다면 그건 하지 않겠다는 당신의 대답은 모순이다?)

[어딘가 꼬였다.]

5개의 좋아요

전문적 지식은 전무하지만, 논점은 매력적인 것 같아 관련 논쟁사를 곁들인다면 분명 좋은 논문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각각의 논지들을 하나의 테제로 삼아서 각각 하나의 논문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 같습니다. 홧팅.

3개의 좋아요

참고로 도교에 대한 문헌정리로는 아래와 같은 자료가 있어요,

"중국 도교의 문헌학적 연구 : 고대 종합목록을 중심으로" (朴卿希), 중국학 연구, 제32집, 2005.6
"조선시대 해제목록에 나타난 도가서적(道家書籍) 연구" (리상용), 한국비블리아학회지. 제24권 제1호 (2013년 3월), pp.63-81
"文獻의 發見과 道家" (金德三), 書誌學硏究, 21(2001.6) pp.251-278

박물지에 관한 자료에요.

<<博物志>> 試論 (金映植), 中國文學, 제31집 (1999. 5), pp.47-64
《博物志》試論 및 譯註/ 盧敏鈴,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 논문, 1997

의학서는...

中國醫學書目의 分類에 關한 硏究/ 嚴晳祺, 원광대학교 석사 논문, 1998
老, 莊子와 황제내경의 양생론에 관한 문헌적 고찰/ 徐在哲, 우석대학교 석사논문, 1996

그리고 산서로는 이런 자료가 있네요,

<<五經算術>> 初探 / 金昌煥, 中國文學. 제53집 (2007. 11), pp.35-54
선진(先秦)시대 수학과 제자철학(諸子哲學) / 周瀚光 著 ; 임진호 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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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에 대해 잘 몰라서 제 말씀이 틀릴 수도 있음을 감안해 주셔요...

제 짧은 생각으론...만약 보편적 지식, 혹은 보편적 참이 존재/가능하다고 한다면 이는 장자의 기본적 태도인 비관론/회의론적인 시각을 형이상학적으로 극복해 버리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어 보입니다. '化의 형이상학'은 어쩌면 그러한 보편적 지식을 미리 픽션 혹은 판타지 같은 것(의미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치환해버리는 개념적 장치는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