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적 연구방법이란 무엇인가

현상학적 연구방법이란 무엇인가

(0) 최근 ‘용기’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를 수행하시는 @HARIBO 선생님께서 던져주신 질문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현상학적 연구방법’을 구체적으로 수행하는 것은 어떤 것이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이 혼란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따라서 질문해주신 선생님께 폐를 끼친 것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염려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 혼란스러웠던 생각을 정리하고 철학적 현상학적 방법론에 대한 간단한 정식적 이해를 위한 개요를 기존에 발표된 논문 등을 참조해서 제시하고자 한다. 특히 이남인의 ”현상학과 질적 연구 방법“ (Phenomenology and Qualitative Research Method, 철학과 현상학 연구 제24집, 2005.01, 91 – 121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밝힌다.

(1) 사회학이나 간호학, 기타 수많은 경험과학적인 학문 분야의 연구자들이 작성한 논문들 중에, “~~~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현상학적 판단중지 및 환원’의 방법을 사용하고, 자료분석과정에서 ‘본질 직관’을 사용한다. 이러한 연구논문들은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을 엄밀하게 적용한 ‘현상학적 연구’일까?

Paley를 비롯한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연구들이 사용한 방법은 후설이 말한 현상학적 방법과 같지 않다고 한다. 위에서 이런 연구자들이 “‘현상학적 판단중지 및 환원’의 방법을 사용하고, 자료 분석과정에서 ‘본질 직관’을 사용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는 후설이 말한 현상학적 판단 중지, 환원, 본질 직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Paley 등은 후설의 현상학적 판단중지 및 환원은 초월론적 현상학의 방법으로서 철학의 방법임에 비해 이들 경험적/체험적 연구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또, 이들이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본질 직관’은 실은 자료를 수집하고 이로부터 추론을 하는 경험적인 것이며, 후설이 말한 본질 직관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한다. 후설에 있어서 본질 직관은 보편자에 대한 ‘직관’이므로 경험적 추론은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본질 직관은 타인과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 아니라 혼자서 의식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solipsism의 과정인데 비해, 이들 소위 “~~~현상학적 연구”들은 상호주관적 수행을 지향하고 있다.

(2) 이남인 교수는 이에 대하여 반대하는 견해를 개진한다. 그에 의하면 후설은 ‘현상학적 심리학’과 ‘초월론적 현상학’이라는 두가지의 다른 현상학을 발전시켰는데 이 둘은 서로 다른 유형의 현상학적 판단중지와 환원이 요구되지만, 본질 직관에 있어서는 동일한 방법을 사용한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본질 직관이란 ‘바로 그 어떤 본질을 구현하고 있는 대상에서 출발해 자유변경을 통해 그 어떤 본질을 구현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개별적 대상을 상상 속에서 산출해 나가면서 저 모든 개별적 대상들에 공통적인 보편적 속성으로서의 본질을 파악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면 이를테면 ‘용기에 대한 현상학적 (체험)연구’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이남인의 논문에서 인용해 본다.

“현상학적 체험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작업은 앞서 살펴본 현상학적 심리학적 판단 중지 및 환원이다. 그 이유는 이러한 판단중지 및 환원이 이루어져야 만 자연적 인과관계의 틀에 속박되어 있지 않은, 지향성을 본성으로 하는 심리현상 혹은 체험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현상학적 심리학적 판단중지를 수행하지 않을 경우 우리가 파악한 심리현상은 자연적 인과관계의 틀 속에서 존재하는, 자연적 사실로서의 심리현상이 될 수 있는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현상학적 심리학적 판단중지 및 환원은 현상학적 체험연구가 수행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상학적 체험연구를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현상학적 심리학적 판단중지 및 환원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현상학적 체험연구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현상학적 심리학적 판단중지 및 환원을 수행한 후 또 다른 유형의 현상학적 판단중지 및 환원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서로 본질구조를 달리하는 다양한 유형의 체험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다양한 유형의 체험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한 유형의 체험을 연구하고자 시도할 경우 이미 앞서 우리가 수행한 다른 체험에 대한 연구를 통해 획득된 지식이 일종의 “선입견”으로 작용하면서 저 체험에 대한 올바른 파악을 방해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체험의 구조를 올바로 파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체험과 관련해 우리가 앞서 가지고 들어갈 수도 있는 “선입견”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며 바로 이러한 선입견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선입견에 대해 판단을 유보하고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체험의 영역으로 시선을 돌려야 하는데 이러한 방법적 절차 역시 일종의 현상학적 판단중지 및 환원이라 불릴 수 있다.“

이남인은 이를 ”경험적 판단중지 및 환원“이라고 부른다. 이 ”경험적 판단중지 및 환원“에 대해 후설은 말한 적이 없지만, 이남인은 후설이 그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했음을 지적한다. 여기서 중요하게 지적해야 할 것은 이러한 ”경험적 판단중지 및 환원“은 ‘초월론적 현상학의 판단중지 및 환원’과 다른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경험적 판단중지 및 환원“을 위한 본질 직관은 위에서 말한 자유변경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지는데, 여기에는 ‘추론과도 유사한 절차’가 사용될 수 있다고 한다.

(3) 그러면 ‘현상학적 체험연구’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현상학적 체험연구’는 체험의 본질 구조에 대한 해명이 주된 과제이지만 경험적인 사실로서의 체험에 관한 연구도 포함한다. 체험의 본질 구조에만 국한되어야 한다면 결코 ”호스피스 병동 환자의 체험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와 같은 연구는 존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즉, 연구 자체는 가능하지만 그것을 현상학적 연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는 분명 잘못된 것으로서 현상학적 체험연구는 체험의 본질에 대한 연구 이외에 사실로서의 체험에 관한 연구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한다. ‘용기에 대해 현상학적 연구’를 수행한다면 구체적으로 자기 자신의 체험에서 ‘용기’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 주위 사람들의 ‘용기’에 대한 경험을 인터뷰한 자료를 사용하거나 각종 기록물을 통해 ‘용기’에 대한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물론 내적 직관에 의하여 ‘용기’ 체험의 본질 구조를 기술하려는 노력도 포함될 것이다.

이외에 이남인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해석’의 필요성이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용기 체험에 대하여 해석할 수도 있고, 타인들의 체험을 해석할 수도 있다. 나아가 체험의 사회적, 역사적 맥락까지도 분석할 수 있다.

(4) 이 글을 쓰기 전, 내가 @HARIBO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을 모색했던 것은, 이 글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정치하고 논리정연하게 제시되지 못하였으며, 오류라고 보아야 할 내용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이에 대해 질문자 @HARIBO 님께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리며, 조금 늦게라도 이 글을 통해 도움이 되는 정보를 얻으실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좋은 연구결과물로 만족하실 수 있는 결과를 얻으시길 기원함으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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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Yates 님, 이렇게 함께 고민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고, 사과하실 필요 전혀 없어요. 말씀해주신 것과 같이 현상학이란 이름 하에 너무나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있고 이루어져왔기에, 현상학적 연구 방법이 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 자체가 큰 논의거리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멋진 연구 성과로 먼 훗날에라도 해주신 고민에 보답 드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네요.

흥미로운 것은 용기를 경험적인 차원 너머 존재론적이거나 (제가 생각하기에) 초월론적인 차원에서 다루는 연구들도 있다는 것이에요(e.g. Tillich 1952). 아직은 맹아 상태의 사유이지만 니체의 저작들이나 ⟪존재와 시간⟫ 역시 존재론적 용기의 언어로 읽힐 수 있을 것 같고요. 어렵겠지만 그러한 연구들과도 제가 궤를 함께 하고자 할지, 아니면 Yates 님께서 상기시켜주신 현상학적 심리학의 차원에 머무를지는 고심할 문제일 것 같습니다. 어떤 어프로치를 취하든, 경험적인 자료를 참고해야 한다는 것도 감사한 지적인 것 같습니다. :slight_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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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감사합니다. 용기라는 것에 대해 그다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덕분에 '생각해 볼 용기'가 생긴 것 같아요. 철학적 견해나 해석, 이런 것을 떠나서 제가 용기 있는 행동 중에 꼽고 싶은 것이 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저는 "진실을 고수할 용기"라고 말하고 싶네요. 자신에게 어떤 피해가 올 수 있더라도 이를 감수하고서 진실만을 고집할 용기 말이죠. 권력과 부와 명성을 쫓는 세상에서 이런 용기는 어리석음의 발현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어리석어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법도 하네요. "좁은 문으로 가길 힘써라"

니체는 저작에서 덕목 중 하나로 용기를 꼽기도 하지만 어쩌면 그의 삶의 여정 모두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또, 무리한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Sorge'도 용기의 variation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Transhumanism이라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변형을 추구하는 사상이 널리 퍼져가는 이 시점에서 용기는 불멸의 삶이라는 유혹을 거부하고 사멸하는 존재로 남고자 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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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남인 교수님이 주장하는 것처럼, 저도 사회학이나 간호학 등 인문사회과학에서 '현상학적 연구'라는 이름으로 제시되는 논의들이 후설의 현상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봐요. 종종 철학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현상학자들이 '현상학'이라는 명칭을 너무 협소하게 한정하거나, 응용현상학을 하시는 분들이 '현상학'이라는 명칭을 사용해도 되는지에 대해 스스로 자신 없어하는 모습을 보면, '현상학'이라는 말 자체가 너무 신비화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2) 특별히, 저는 종교현상학에 관심이 많은데, 가끔씩 "종교현상학과 후설류의 철학적 현상학은 전혀 다른 분야다!"라고 주장하는 분들을 볼 때마다 아쉽더라고요. 정작 후설 본인이나 막스 셸러 같은 철학적 현상학자들은 루돌프 오토 같은 종교현상학자들을 극찬하였는데 말이에요. 후설은 루돌프 오토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도 말했고요.

Through Heidegger and Oxner (I no longer know who took precedence in the matter) I became aware last summer of your book, Das Heilige [The Idea of the Holy], and it has had a strong effect on me as hardly no other book in years. Allow me to express my impressions in this way: It is a first beginning for a phenomenology of religion, at least with regard to everything that does not go beyond a pure description and analysis of the phenomena themselves. (E. Husserl, "Letter to Rudolf Otto (1919)", Heidegger, the Man and the Thinker, Thomas Sheehan (ed.), Chicago: Precedent Publishing, Inc., 1981, p. 24.)

(3) '틸리히'라는 이름을 접하니 반갑네요! 『존재에의 용기』는 정말 인상적으로 읽은 책들 중 하나라서요.

저는 『존재에의 용기』가 일종의 형이상학 위에서 '용기' 개념을 해명하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존재와 비존재의 뒤섞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틸리히의 기본 형이상학적 전제라서요. 인간의 실존적 차원에서는 그 뒤섞임이 '불안' 속에서도 삶을 계속해 나가려는 용기로 표현된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 독자가 틸리히의 형이상학을 얼마나 납득할 수 있는지에 따라, 이 책에 대한 평가가 크게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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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무 생각 없이 원어를 보고 '존재할 용기'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기존 번역본은 '존재의 용기'로, YOUN 님은 '존재에의 용기'로 번역하셨네요. 아직 절반밖에 읽지 못해서인지 자기긍정self-affirmation이라는 게 정확히 무엇인지 아리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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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 사실 ‘존재할 용기’가 제일 적절하긴 하죠. ‘존재의 용기’가 가장 최근에 번역된 제목이고, ‘존재에의 용기’가 아주 옛날 번역본 제목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저는 어떻게 번역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2) 제 기억으로는 죄책과 같은 삶의 부정적인 체험들 앞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이어나가고자 하는 노력을 self-affirmation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아래는 제가 학부생 시절 때 책을 읽고 쓴 글인데, 학부생 수준의 글인만큼 빈틈이 많지만 그래도 ‘용기 있게’ 올려 봅니다.

https://blog.naver.com/1019milk/80199590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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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히의 원서 제목이 " Der Mut zum Sein"이죠. 잘 아시다시피 'zu'는 '~쪽으로' 라는 방향을 나타내고요. 그래서 이 제목에서 '용기'라는 것이 '존재를 향하여 정향(定向)'되는데요, 틸리히는 Kapitel 4에서 이 제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Der Mut zum Sein ist der Mut, die Vergebung der Sünden anzunehmen, als fundamentale Begegnung mit Gott.'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용기'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구절이 있죠.

Selbstaffirmation des Seins trotz des Nicht-Seins

즉, 용기란 '비존재에 맞선 존재의 자기긍정'이라는 것인데요, 위에서 '죄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서의 용기'와 연결시켜 보면 이 용기란 '존재(자체)에 참여하고자 하는 용기'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래서 결론은 제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 중에 제목을 <존재에의 용기>로 보는 것이 그 중엔 제일 나아보인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용기>는 '존재가 가지고 발휘하는' 용기로 이해될 수 있고, <존재할 용기>는 존재의 존재계기로서의 용기라는 의미가 될 수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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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설이 루돌프 오토에게 보낸 편지는 처음 알았어요.

참고로 저도 종교현상학에 관심이 있는데요...최근들어 세계적으로 '종교현상학으로의 회귀'라고 할 만한 흐름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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