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 질문드립니다

<부정변증법> 공부 중인데 하이데거 관련 서술에서 계속 막히네요. 특히 다음의 두 구절에서 아도르노가 하이데거 철학에 대한 이러저러한 설명과 평가를 하는 듯한데, 도통 이해가 안 갑니다.
하이데거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가능하다면 쉽게 풀어서 설명 부탁드립니다. :joy:

기초존재론은 그 반향의 원인이 되었던 범주들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부정하거나 승화시키며, 이로써 그것들을 달갑지 않은 문제와 직면할 때 그다지 쓸모없게 된다. 그런데 이 범주들로부터는 그것들이 산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여되어 있는 것의 복제품들이라는 점, 또 그것들이 이 결여를 보상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 (홍승용, p. 128)
In the categories to which fundamental ontology owes its echo - and which it therefore either denies or sublimates until they will no longer serve for any unwelcome confrontation - we can read how much they are the imprints of something missing that is not to be produced, how much they are its complementary ideology. (ashton, p. 65)

그(하이데거)는 또 아주 신중하게 만인이 보는 앞에서 이념을 향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다시 역전시키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존재론을 객관주의와 구분했으며, 또 자신의 반관념론적 태도를 비판적인 것이든 순진한 것이든 실재론과 열심히 구분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존재론적 욕구는 강단에서 벌어지는 학파들 간의 논쟁에 따라 반관념론으로 평준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그 존재론적 욕구의 충동들 가운데 아마 가장 끈질긴 것이 관념론을 거부했을 것이다. (홍승용, p.130)
He prudently refrained from reversing the Copernican turn, the turn to the idea, in plain view of all. He zealously set off his version of ontology from objectivism, and his anti-idealistic stand from realism, whether critical or naive. Unquestionably, the ontological need could not be planed down to an anti-idealism along the battle lines of academic debate. And yet, of all the impulses given by that need the most enduring may have been the disavowal of idealism. (ashton,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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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아도르노 전공자는 전혀 아니지만 국역이 그다지 매끄러워 보이지 않네요. 특히 첫번째 문단 번역을 좀 수정해 보았습니다.

기초존재론은 그 반향의 원인이 되었던 범주들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부정하거나 승화시키며, 이로써 그것들을 달갑지 않은 문제와 직면할 때 그다지 쓸모없게 된다. 그런데 이 범주들로부터는 그것들이 산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결여되어 있는 것의 복제품들이라는 점, 또 그것들이 이 결여를 보상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간파할 수 있다. (홍승용 역)

기초존재론은 이러한 범주들에 대항해 그 반향을 일으켰고 따라서 이 범주들을 부정하거나 혹은 달갑지 않은 문제에 더이상 직면하지 않도록 이 범주들을 승화시킨다. [그러한 한에서] 이 범주들로부터, 이 범주들이 바로 '결여되어 있고 산출될 수 없는 어떤 것'의 흔적이라는 것을, 이 범주들이 바로 그것[결여되어 있고 산출될 수 없는 것]을 보충하는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읽어낼 수 있다. (수정 번역)

Jenen Kategorien, denen die Funda- mentalontologie ihren Widerhall verdankt und die sie darum entweder verleugnet oder so sublimiert, daß sie zu keiner unlieb- samen Konfrontation mehr taugen, ist abzulesen, wie sehr sie Abdrücke eines Fehlenden und nicht Herzustellenden, wie sehr sie dessen komplementäre Ideologie sind. (독어)

In the categories to which fundamental ontology owes its echo - and which it therefore either denies or sublimates until they will no longer serve for any unwelcome confrontation - we can read how much they are the imprints of something missing that is not to be produced, how much they are its complementary ideology. (ashton, p. 65)

해당 문단과 문단 앞뒤를 짜집어 상상의 해설을 감히 제시해보자면,

어떤 욕구나 결핍을 지적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기존의 철학에서 결여되어 있고 산출될 수 없는 “존재론적 욕구”를 지적함으로써 반향을 일으켰지만, 그것을 지적한다고 해서 존재론적 욕구가 채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지 못했다. 오히려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욕구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데 까지만 나아감으로써, 사실상 기존의 문제를 다른 종류의 이데올로기로 그저 보충하는 효과만을 보였을 뿐이다.

두번째 번역문단은 사실 인용한 부분보다 그 앞 부분이 더 중요한 것 같아요. (그 앞 문단이 사실 국역이 별로 좋진 않네요.) 하이데거가 존재론으로 전환한 배경에는 기존의 관념론적 전통에서 주체가 이데올로기화된다는 점을 문제시했을 것이라는 거죠. 그런데 이러한 진단 자체는 아도르노 역시 공감하고 있는 듯해요. 다만 아도르노가 주목하는 지점은 "존재론적 필요"가 아니라, 주체의 관념론이 "사회의 객관적 기능연관을 은폐하면서 사회 속에서 겪는 주체들의 고통을 무마"한다는 점인 것 같아요. 또한 이 점에 하이데거가 무신경했다는 것 역시 하이데거 비판의 포인트게 될 수 있겠네요. 즉 하이데거는 주체의 사회적/객관적 연관에 관심이 있다기 보다는, 관념론에 대한 혐오가 주된 동기가 되어 nicht-Ich로 향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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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수정 감사합니다! 그리고 말끔히 정리해주신 전체적인 요지도 수긍이 가는데, 문장 하나하나가 세밀히 이해되지가 않네요. :sob: 특히 ‘범주 승화’라던가 ‘실재론과의 구분’, ‘아카데믹 논쟁에서 ~~~’가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가네요.

사실 저 또한 아도르노 전공자가 아니라서 전체적인 요지만 짚고 넘어가도 되겠으나, 읽는 파트에서 계속 하이데거가 나오는 것 같아 참다못해 질문했습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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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를 깊게 공부해 본 적이 없어서 충분한 답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아도르노가 이해한 하이데거라는 관점에서 한번 시도해보겠습니다.

아도르노가 보기에 존재론적 욕구는 존재를 그 자체로 파악하려는 욕구, 혹은 있는 그대로의 객체에 대한 파악의 열망을 그 배후에 숨기고 있습니다. 이 욕구는 충족되기 어려워 보이는데, 왜냐하면 존재에 대한 인식은 어찌 되었건 우리가 파악하기에 의미 있는 것으로 드러나야 할 텐데, 주체의 관점에서 포착된 것은 주체가 인식한 대로의 객체일 뿐 객체 자체는 아닐 터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체와 존재, 혹은 역사와 자연 사이의 대립으로 특징 지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도르노가 파악하기에 20세기 초반 현상학적 존재론에서 대두되었던 문제틀입니다.

그는 또 아주 신중하게도 만인이 보는 앞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이념을 향한 전회를 되돌리는 일을 경계했다. 그는 열심히 자신의 버전의 존재론을 객관주의와 구분했으며, 비판적 실재론이든 소박한 실재론이든 실재론과 구분했다. 의심의 여지 없이 존재론적 욕구는 강단의 학파논쟁에 따라 반관념론으로 평준화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욕구의 충동들 중 강한 충동이 관념론을 부인했을 터이다.

하이데거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순히 관념론으로 회귀하지도 않고, 전비판적 형이상학에서처럼 우리가 존재를 있는 그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존재규정들 자체에 역사성의 구조를 부여함으로써 이원론적 대립을 극복하고 존재물음에 답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해결책은 주체 우위의 관념론에 반해 존재 그 자체에 대해 물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유지하면서도, 존재를 어떤 무역사적이고 영원한 것으로 치부하는 단순한 실재론 혹은 객관주의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강단의 학파논쟁"이 정확히 무엇을 지시하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앞서 언급되었던 당시 현상학적 존재론의 문제 속에서 벌어졌던 논쟁들이 아닐까 추측해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기초존재론의 반향은 저 범주들에 기인하는데, 기초존재론은 그 때문에 범주들을 부인하거나 승화해서, 달갑지 않은 직면에 더 이상 적합하지 않게 되었다. 저 범주들에서는 이들이 결여된 것이자 산출될 수 없는 것의 흔적들이라는 점, 이들이 그것을 보충하는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읽어낼 수 있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제시하는 역사성이나 현존재의 기투 같은 범주들은 정말로 구체적 개별적인 역사적 사건들의 존재를 드러내기에는 여전히 너무 보편적입니다. 나아가 주체성 개념을 도입하지는 않더라도, 기초존재론은 개별 존재자들 일반의 파악 가능성을 존재와 존재구성틀의 어떤 구조적 전체성으로부터 근거 지우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하이데거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대립을 적극적으로 사유하지 않고 해소하는 실책을 저질렀으며, 따라서 진정한 철학적 인식의 대상인 “결여된 것이자 산출될 수 없는 것”을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 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일화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컨대 아도르노가 보기에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욕구와 주체-객체, 역사-자연 대립의 극복이라는 올바른 동기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은폐된 관념론적 입장을 떠안고 말았으며, 양자의 대립과 불화를 적극적으로 사유함으로써만 비로소 가능한 객체에 대한 인식을 놓쳐버리고 말았습니다.

Ps. 해당 구절을 이해할 때 「자연사의 이념」을 참조했습니다. 아도르노의 핵심적인 철학적 아이디어들을 담고 있는 두 개의 초기 강연문 중 하나인데, 애석하게도 번역이 안 돼 있습니다. Adorno, Th. (1990). Idee der Naturgeschichte. In Gesammelte Schriften, Band I: Philosophische Frühschriften (hrsg. Rolf Tiedemann & Gretel Adorno). Suhrkamp. 345-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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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분들이 이미 좋은 의견들을 주셔서 덧붙일 것이 많지 않네요.

(1) 첫 번째 구절에서는 아도르노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알기 힘드네요. 특별히, '범주'라는 용어로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의 실존 범주를 지시하고자 한 것인지, 아니면 전통적 형이상학의 범주를 지시하고자 한 것인지가 불분명해서요.

(2) 두 번째 구절에 대해서는 TheNewHegel님의 상세한 설명에 동의합니다. 하이데거는 관념론/객관주의라는 이분법적 구도 자체를 거부하는 철학자입니다. 『존재와 시간』 제43절 '현존재, 세계성, 실재성'에 이와 관련된 하이데거 본인의 입장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죠. 그래서 아도르노도 하이데거에 대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다시 역전시키는 일은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이데거가 칸트 이후의 관념론을 비판하기 위해 무작정 '객관주의'나 '반관념론' 같은 반대편 극단을 지지하는 순진한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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