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형이상학 서설을 읽고 있는데 방금 영혼에 관한 파트를 읽다가 조금 오래 생각을 해보아도 아직 저의 수준으로서는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문단들을 마주했습니다. 제가 읽은 부분은 이렇습니다.
"공간 상에서 직관되는 것은 우리 밖의 경험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공간은 그것이 함유하는 모든 현상들과 함께 표상들에 속하며, 경험법칙들에 따른 이 표상들의 연결은 그것들의 객관적 진리를 증명하는 것으로, 그것은 내감의 현상들의 연결이(내감의 대상인) 나의 영혼의 현실성을 증명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므로, 나는 외적 경험에 의거해서 공간상의 외적 현상들인 물체들의 현실성을 의식하거니와, 그것은 내적 경험에 의거해서 시간상에서 나의영혼의 현존을 의식하는 것과 같다,. 나는 나의 영혼을 닩지 내감의 대상으로서 내적 상태를 이루고 있는 현상들에 의해서만 인식하며, 이 현상들의 기초에 놓여잇는 그 존재자 그 자체는 나에게 알려져 잇지 않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관념론은 단지 외적 경험을 꿈과 구별하고, 전자의 진리의 표준으로서의 합법칙성을 후자의 무규칙서및 가짜 가상과 구별한다. 그는 이 양자에 있어서 공간과 시간을 대상들의 현존의 조건들로 전제하고, 다만 과연 내감의 대상, 즉 영혼이 시간상에 있듯이, 우리가 깨어 있을 때 공간상에 두는 외감의 대상들이 실제로 공간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경험이 상상과의 구별의 확실한 표준들을 지니는지를 묻는다, 여기서 이제 이 의문을 가볍게 제거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의문을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이 양자에서의 현상들의 연결을 경험의 보편적인 법칙들에 따라 연구함으로써 제거하며, 만약 외적 사물들의 표상이 이법칙들과 일관되게 합치하면, 그 사물들이 참된 경험을 이루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할 수 는 없다. 그러므로 질료적 관념론은 현상들은 오직 경험에서의 그것들의 연결에 따라서만 현상들로 여겨지므로 아주 쉽게 제거된다. 물체들이 우리 밖에(공간상에) 실존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내감의 표상에 따라 현존한다는 것과 똑같이 확실한 경험이다. 왜냐하면 우리 밖에라는 개념은 단지 공간상의 실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있다라는 명제에서 나는 한낱 내감의 대상이 아니라, 의식의 주체를 의미하고 마찬가지로 물체는 한낱 외적 직관이 아니라 이 현상의 기초에 놓여 있는 것인 사물 그 자체를 의미하고 마찬가지로 물체는 한낱 외적 직관이 아니라 이현상의 기초에 놓여 있는 것인 사물 그 자체를 의미하므로 그래서 과연 물체들이 나의 사유밖에 자연 안에서 물체로서 실존하는가 하는 물음은 아무런 주저없이 부정될 수 있다"
여기서 칸트는 제가 알고 있는 일명 데카르트의 "의심"이 주저없이 부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확실하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만약 데카르트가 우리의 현실에서 어떻게 객관적 실재성을 보장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사물들 자체에 대해선 나는 주장할 수 없지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에 관해서는 감성적 형식과 지성을 토대로 내가 경험 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객관성을 주장할 수 있다."라고 답을 할 것 같은데 만약 여기서 "감성적 형식과 지성"이 어떻게 객관적 실재성을 보장할 수 있냐고 되묻는다면 제대로 대답을 하지못할 것 같습니다. 분명 칸트의 말을 들을 땐 충분히 보장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형식과 지성이 어떻게 객관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 되묻는다면, 어떻게 현실과 꿈을 구분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나요?
ps 칸트 철학에서 현실과 관계없이 공간과 시간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인가요? 아니면 우리와 상관없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인가요? 정말 기본적인 부분이고 엄청 많이 언급이 된것같으면서도 계속 헷갈리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런 개념 하나하나가 엇갈리지 않으려면 반복해서 읽는 것이 답일까요?
조금 급하게 적느라 글이 두서가 없습니다. 생각이 정리되면 다시 추가로 적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