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와 데카르트(형이상학 서설 중)

요즘 형이상학 서설을 읽고 있는데 방금 영혼에 관한 파트를 읽다가 조금 오래 생각을 해보아도 아직 저의 수준으로서는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문단들을 마주했습니다. 제가 읽은 부분은 이렇습니다.

"공간 상에서 직관되는 것은 우리 밖의 경험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공간은 그것이 함유하는 모든 현상들과 함께 표상들에 속하며, 경험법칙들에 따른 이 표상들의 연결은 그것들의 객관적 진리를 증명하는 것으로, 그것은 내감의 현상들의 연결이(내감의 대상인) 나의 영혼의 현실성을 증명하는 것이나 같은 것이므로, 나는 외적 경험에 의거해서 공간상의 외적 현상들인 물체들의 현실성을 의식하거니와, 그것은 내적 경험에 의거해서 시간상에서 나의영혼의 현존을 의식하는 것과 같다,. 나는 나의 영혼을 닩지 내감의 대상으로서 내적 상태를 이루고 있는 현상들에 의해서만 인식하며, 이 현상들의 기초에 놓여잇는 그 존재자 그 자체는 나에게 알려져 잇지 않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관념론은 단지 외적 경험을 꿈과 구별하고, 전자의 진리의 표준으로서의 합법칙성을 후자의 무규칙서및 가짜 가상과 구별한다. 그는 이 양자에 있어서 공간과 시간을 대상들의 현존의 조건들로 전제하고, 다만 과연 내감의 대상, 즉 영혼이 시간상에 있듯이, 우리가 깨어 있을 때 공간상에 두는 외감의 대상들이 실제로 공간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경험이 상상과의 구별의 확실한 표준들을 지니는지를 묻는다, 여기서 이제 이 의문을 가볍게 제거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의문을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이 양자에서의 현상들의 연결을 경험의 보편적인 법칙들에 따라 연구함으로써 제거하며, 만약 외적 사물들의 표상이 이법칙들과 일관되게 합치하면, 그 사물들이 참된 경험을 이루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할 수 는 없다. 그러므로 질료적 관념론은 현상들은 오직 경험에서의 그것들의 연결에 따라서만 현상들로 여겨지므로 아주 쉽게 제거된다. 물체들이 우리 밖에(공간상에) 실존한다는 것은 나 자신이 내감의 표상에 따라 현존한다는 것과 똑같이 확실한 경험이다. 왜냐하면 우리 밖에라는 개념은 단지 공간상의 실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있다라는 명제에서 나는 한낱 내감의 대상이 아니라, 의식의 주체를 의미하고 마찬가지로 물체는 한낱 외적 직관이 아니라 이 현상의 기초에 놓여 있는 것인 사물 그 자체를 의미하고 마찬가지로 물체는 한낱 외적 직관이 아니라 이현상의 기초에 놓여 있는 것인 사물 그 자체를 의미하므로 그래서 과연 물체들이 나의 사유밖에 자연 안에서 물체로서 실존하는가 하는 물음은 아무런 주저없이 부정될 수 있다"

여기서 칸트는 제가 알고 있는 일명 데카르트의 "의심"이 주저없이 부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확실하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만약 데카르트가 우리의 현실에서 어떻게 객관적 실재성을 보장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사물들 자체에 대해선 나는 주장할 수 없지만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에 관해서는 감성적 형식과 지성을 토대로 내가 경험 가능한 것에 대해서는 객관성을 주장할 수 있다."라고 답을 할 것 같은데 만약 여기서 "감성적 형식과 지성"이 어떻게 객관적 실재성을 보장할 수 있냐고 되묻는다면 제대로 대답을 하지못할 것 같습니다. 분명 칸트의 말을 들을 땐 충분히 보장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형식과 지성이 어떻게 객관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지 되묻는다면, 어떻게 현실과 꿈을 구분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어떻게 정리할 수 있나요?

ps 칸트 철학에서 현실과 관계없이 공간과 시간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인가요? 아니면 우리와 상관없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인가요? 정말 기본적인 부분이고 엄청 많이 언급이 된것같으면서도 계속 헷갈리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런 개념 하나하나가 엇갈리지 않으려면 반복해서 읽는 것이 답일까요?

조금 급하게 적느라 글이 두서가 없습니다. 생각이 정리되면 다시 추가로 적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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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 양자에 있어서 공간과 시간을 대상들의 현존의 조건들로 전제하고, 다만 과연 내감의 대상, 즉 영혼이 시간상에 있듯이, 우리가 깨어 있을 때 공간상에 두는 외감의 대상들이 실제로 공간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지, 다시 말해 경험이 상상과의 구별의 확실한 표준들을 지니는지를 묻는다, 여기서 이제 이 의문을 가볍게 제거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의문을 일상생활에서도 항상 이 양자에서의 현상들의 연결을 경험의 보편적인 법칙들에 따라 연구함으로써 '제거'하며, 만약 외적 사물들의 표상이 이 법칙들과 일관되게 합치하면, 그 사물들이 참된 경험을 이루지 않을 것이라고 의심할 수 는 없다."

  • "여기서 칸트는 제가 알고 있는 일명 데카르트의 "의심"이 주저없이 부정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확실하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 꿈과 현실에서 외적 대상의 현실성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하는 대상들이 사실 꿈이 아닌가 하는 물음에 대해 칸트의 대답은 제가 인용하신 부분에서 굵은 글씨로 강조표시했듯이, 우리는 둘의 차이를 '대상의 합법칙성'을 통해 의식한다는 것입니다. 꿈 속 대상은 지성의 규칙대로, 합법칙적이지 않으나, 실재 대상, 경험세계의 대상은 합법칙적이라는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내감만을 확실한 것으로 여기는 것에 반해, 칸트 자신은 외감 또한 내감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것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관련된 부분은 순수이성비판 재판에서 추가된 부분인 **'관념론 반박'**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 중 언급되고 있는 영혼에 관한 부분("나는 나의 영혼을 닩지 내감의 대상으로서 내적 상태를 이루고 있는 현상들에 의해서만 인식하며, 이 현상들의 기초에 놓여잇는 그 존재자 그 자체는 나에게 알려져 잇지 않다.")은, 변증론 **'오류추리'**Paralogismen 부분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 "ps 칸트 철학에서 현실과 관계없이 공간과 시간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인가요?"
    -> 칸트철학 내에서는 공간과 시간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고, 바로 그러한 공간과 시간의 형식으로 인간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을 구성한다고 말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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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의 여지가 있을 것 같아 적어봅니다.

꿈 속 대상은 무규칙적으로 나타나는 반면, 외부대상은 법칙성에 맞게 나타나므로 꿈-실재가 구별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은 칸트가 아니라 (칸트가 독해한) 데카르트입니다. 이는 질문자 님이 인용하신 문단에 나와 있습니다.

칸트의 요지는, 데카르트 식대로 구별하게 되면 관념론의 오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대상의 "법칙성"을 아무리 말해봤자, 법칙적으로 현상하는 "꿈"이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혹은 법칙적인 대상이 한낱 "사유"에 불과하다는 버클리적 관념론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칸트가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은

여기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보편법칙들" 뿐만 아니라 "경험"의 보편법칙들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인식 혹은 경험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1. 대상이 직관을 통해 주어져야 하고, 2. 이러한 주어진 직관(현상)에 순수범주들을 적용하는 판단력의 실천을 통해 "대상"을 규정해야 합니다. 현상에 주어진 직관에다가 순수범주들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연구한 것이 칸트가 말하는 "경험의 보편법칙들"입니다. 즉 "경험의 보편법칙들"을 받아들인다면, 대상의 "법칙성"은 이미 경험 속 대상(외부대상)에 적용되는 그러한 법칙성입니다. 즉 실재 외부대상을 전제하지 않은 "경험의 보편법칙들"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외부대상 혹은 직관에 주어지는 것을 고려하지 않은 보편법칙들은 "논리적" 보편법칙이겠죠).

따라서 프로레고메나와 순수이성비판 <관념론반박> 챕터의 요지는, 데카르트가 내감을 확실한 것으로 여기고 외감은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긴 반면, 칸트에 따르면 외부대상(외감)을 전제하지 않은 내적 인식(데카르트적 내감)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데카르트가 내감을 확실하다고 여기는 한에서 이미 데카르트는 외부 실재를 인정하고 있다고 칸트는 주장하는 것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공간과 시간의 "형식"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지만, 공간과 시간의 "질료"는 외부대상으로부터 주어져야 합니다. 공간과 시간의 형식만으로는 경험적 현실을 구성할 수 없습니다. 만약 공간과 시간의 형식"만"으로 경험의 현실을 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것이 바로 관념론에 빠지게 됩니다.
칸트는 프로레고메나에서

엘레아 학파에서 버클리 주교에 이르는, 모든 [부정적 의미에서] 진짜 관념론자들의 명제는 다음의 정식에 담겨 있다: "감각과 경험을 통한 모든 인식은 한낱 가상에 다름 아니며, 진리는 오직 순수지성과 순수이성 속의 관념들 속에서만 존재한다."
반면에 나의 [선험적] 관념론을 일반적으로 규정하는 근본명제는 다음이다: "순수지성과 순수이성에서 비롯한 사물들에 대한 모든 인식은 한낱 가상에 다름 아니며, 진리는 오직 경험 속에 있다." (AA 374)

즉 "우리 안"에 있는 것(형식)만을 강조하게 되면 데카르트/버클리의 관념론을 피할 수 없으므로, 칸트는 거꾸로 외부 대상이 경험 속에서 주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반대로 경험적 대상만을 강조하게 되면(로크/흄) 회의주의에 빠진다고 칸트는 경계합니다.)

여기에서 두가지 질문을 구별해야 합니다.

  1. 칸트가 말한 시공간의 형식과 지성의 종합의 "객관성"이 타당한가?

이것은 순수이성비판에서 선험적 감성론과 분석론에서 제시한 칸트의 논변이 타당한지를 묻는 것입니다. 칸트는 인식이 도대체 가능하기 위한 필연적 조건을 다루는 바, 자신의 논변을 거부하게 되면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논변이 구체적으로 타당한 논변인지를 따지는 것은 당연히 의미있는 질문이겠으나, 여기에서 대답될 수 없는 너무 큰 질문입니다.

  1. 어떻게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오해의 여지가 있습니다. 칸트가 프로레고메나와 <관념론 반박>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설령 꿈 역시 외부현실을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지, 꿈/현실을 구별할 수 있는 "기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 <관념론 반박>에서 후자가 자신이 다루는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면서, 꿈/현실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해당 경험이 "모든 현실적 경험의 기준들과 부합"하는지를 다루어야 될 것이라며 넌지시 암시하고 끝냅니다 (B278). 다만, 외부 현실이 없다면 꿈 역시 불가능하므로, 이를 통해 칸트는 적어도 외부 현실의 존재를 선험철학적으로 증명했으며 따라서 데카르트/버클리의 관념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특정시점의 경험이 과연 꿈인지 실재인지를 구별하는 문제와, 한갓 꿈이 아닌 실재 외부세계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는 다른 문제이며 칸트는 후자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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