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퍼런스는 생각이 안나는데 교육에 대해 논의할때 꽤 많이 들었던 이야기중 하나가 교육의 목표는 성숙한 민주주의 시민을 양성하는데 있다였습니다.
당연히 개인적으로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이러한 논의의 주된 비판지점은 우리나라의 교육(초중고부터 대학까지)이 지나치게 지엽적인 분야의 기능인들을 만들어 내는데 치중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능적으로 분화된 분업체계로 돌아가는 현대 자본주의에서 그러한 국소적 분야만 공부하는 교육체계는 필연적인데 듣다보니 이것이 왜 잘못인가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이를 필요악같은 것이라 보는 제가 잘못 생각하는 걸까요?
혹시 이런 부분에 대해 정리된 생각이나 의견이 있는 회원님들 계실까요 고견이 듣고 싶습니다.
혹은 이런 주제로 좋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교육쪽 철학서나 책이 있다면 추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비판 지점이 전제하는 바가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알기로 초중등 교육의 목표는 <지엽적 분야의 기능인 만들기>가 아닙니다. 실업계는 예외일지 몰라도, 실제로 학교에서 <지업적 분야의 기능인 만들기>가 이루어지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대학의 경우 전문가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교육기관이니 <지엽적 분야의 기능인 만들기>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지나치게 치중되어 있다>라고 비판할 수 있겠지만, 전공 필수 이수 학점을 제외하고 교양과목을 듣도록 정해져있으니 어느정도 비판을 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이구요. 물론 교양과목이 제대로 굴러가지 않거나 학생이 교양이라는 이유로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기능인 만들기에 치중되어 보인다>라고 말한다면 수긍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목표와 달리 현실에서 <교육기관의 기능인 만들기 치중>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말씀하신 <분업체계로 돌아가는 현대 자본주의>는 경제적 체계의 문제이고, 교육은 인간이 생활하며 살아가는 세계의 문제입니다. 서로 다른 두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한쪽의 논리를 다른 한쪽에 부여하는 것은 잘못이겠지요. 그러니 <국소적 분야만 공부하는 교육체계>가 현실적으로 <필연적>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규범적으로 정당화되기는 힘듭니다.
위 내용은 전적으로 제 의견인데, 제가 공부하는 <숙의 민주주의> 관련 담론에서 시민 교육에 관한 얘기가 종종 나옵니다. 하버마스, 롤스 등을 위시한 숙의 민주주의자들의 시민 교육, 민주 시민성에 관한 논의를 참고하시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현존하는 정치경제체제가 잘 돌아가는 데 필요한 기능인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능은 두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물질적 기능과 이데올로기적 기능입니다. 나는 한편으로는 현존하는 정치경제체제가 물질적으로 재생산되는 데 필요한 기능을 해야 합니다. 즉 그 체제의 물질적 재생산에 필요한 분업체계에서 어떤 역할을 할당받아 그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합니다. 나는 다른 한편으로는 현존하는 정치경제체제가 재생산되는 데 필요한 신념/사고/감성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사회와 인간에 대해서 비판적/총체적/역사적 사유를 할 줄 아는 인간, 독특한 자연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갖춘 인간, 물질적 향유만이 아니라 정신적 향유도 할 줄 아는 인간, 자기 자신의 한계에 민감한 인간, 즉 교양인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민주주의 시민의 양성'은 2에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1과 2는 양립가능하고 양립해야 하지만 1에 치중해서 2를 게을리 할 수는 있습니다.
한 사회의 퀄리티는 그 사회에서 이뤄지는 교육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1과 2 둘 다를 목표로 하는 질 높은 교육을 받을 기회의 평등함의 정도가 큰 사회일 수록 더 훌륭한 사회입니다.
초중고 과정의 공교육과 대학교 과정의 고등교육이 이념상 분리될 수 있는 것은 맞지만, 우리나라의 여건 상 양자가 분리되어 있다고 보기 힘들어 보입니다. 매우 높은 대학진학율이나, 심지어 사립대학의 입시 과정 역시 교육부의 정책에 강하게 얽매여 있는 우리나라 교육구조상, 초중고의 교육과정이 사실상 대학입시를 위한 준비과정의 역할을 하고 있고 반대로 대학 과정은 초중고 과정의 심화/연장선에 있다고 보는 것이죠. 예컨대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운영되는 실태만 보더라도 사실상 대학교 입시를 위한 준비과정처럼 운영되고 있습니다. 대학교 과정이 "지엽적 기능인 양성"에 목표를 두는 고등교육과정이라면, 대학교 입시를 위한 준비과정인 초중고 공교육 역시 "사실상" 기능인양성 과정의 준비단계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죠.
또한 저는 "기능인 양성"이라는 자본주의적 논리와 "성숙한 민주시민 양성" 이라는 규범적 이상이 마치 완벽하게 구분될 수 있는 것처럼 묘사하는 일부 철학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회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칸트적인 선험주의를 따르고 있는 도덕/정치철학자들의 경우 (하버마스나 롤스 역시 이에 속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도구적 이성"과 도덕적/윤리적 규범성을 담지하는 "실천이성"이 마치 엄밀히 구별될 수 있다는 듯 서술을 하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서술이 철학적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용이할지 몰라도 실재적 설명의 측면에서는 공상적 측면이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양자는 사실상 상호 의존적이기 때문입니다. Cittaa 님이 지적하셨듯, 현존 사회체제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지 않고서는 기능인 양성 역시 불가능합니다. 예컨대 현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체제에 전혀 순응하지 않는 기능인 양성이라는게 성립가능할까요? 반대로, 현존하는 경제체제 및 경제활동에 대한 기능적 이해가 없이, "숙의적"인 시민적 사유가 가능할까요?
기능주의적 질서와 규범적 질서를 서로 배타적인 것인양 엄격히 분리하려는 시도는, 철학을 현실과 유리된 이상론으로 보이게끔 하고 결과적으로 일반인들로 하여금 철학을 외면하게 하는 부정적 효과까지 있다고 봅니다. 저는 오늘날의 철학의 위기 어쩌구 하는 것들이 이러한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철학이 스스로를 기능주의적 질서로부터 계속해서 구분짓고 거리를 두는 한편, 현실의 삶 속에서 철학이 유용하다고 호소하면서 철학의 위기를 한탄하는 것이 자가당착이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의 목적, 그리고 그것의 정당화 논의는 언제나 재밌는 토론을 만들어 내는 듯합니다. 읽어보실 만한 책 몇 권 두고 갑니다.
존 듀이, <민주주의와 교육>
피터즈, <윤리학과 교육>
비에스타, <학습을 넘어>
이홍우, <교육의 개념>
이홍우, <교육의 목적과 난점>
짧은 강연문을 모아놓은 이홍우의 <교육의 목적과 난점>이 긴 호흡을 가진 다른 책들보다 원하는 주제를 중심으로 접근하기에 편리할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