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대 한국인 루뱅대학 철학과 유학생의 이야기

김형효 교수님의 책 앞부분에 인상적인 글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한국이 60년대 초반에 아직 매우 가난한 나라였을 당시, 벨기에 루뱅에서 유학 생활을 하였던 20대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입니다.

필자는 20대 청년시절 남들처럼 청운의 뜻을 품고 유럽 벨지움 루벵대학에 유학을 떠났다. 그때가 60년대 초반이었다. 어렵고 까다로운 그쪽 대학의 시험에 실패하고 돌아올까봐, 또 부님의 큰 기대에 실망을 안겨드릴까봐 유학기간 내내 정말 한눈 팔지 않고 주야로 매진하였다. 공부 이외에는 아무런 물질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던 필자의 20대 젊은 시절의 미숙한 눈에 비친 서양의 모습은 그 당시 우리와 비교하여 참으로 잘사는 나라였다. 그러나 우리는 문화적으로 동방의 문화민족이다라는 자부심은 있었다. 단지 지금은 전쟁으로 가난하지만, 언젠가 우리가 그 가난을 털고 일어서면 우리도 유럽처럼 선진문화 민주주의의 국가를 경영할 수 있으리라고 여겼었다. (김형효,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 인간사랑, 2008, 9쪽.)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유학생들이 유럽에서 얼마나 힘들게 공부했을지 생각하니, 뭔가 당시에 공부하신 분들이 안쓰러워지네요. 또 편하고 좋은 환경에서 빈둥빈둥 공부하는 제 모습이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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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격이 삐딱?해서 그런지 저는 이런 이야기가 그렇게 낭만적이라고 해야 하나, 휴메인하다 해야하나....그렇게 해석되지만은 않습니다.

(2)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유학생은 달리 말해, 귀국할 경우 그 나라에서 '상당히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기도 하죠. 달리 말해, 이들은 유학하고 돌아오면 못해도 인텔리요, 잘되면 사회 지도층이 되는 것인데, (이런 말하면 오만하긴 하지만) 제가 그 당시 사람이라면 한 번 투자할 만한 시도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이 인텔리/사회지도층이라는 의식은 김형효님의 글 중에서도

이 부분에서 잘 느껴진다고 여겨지네요.

(3)

이 생각은 국내 대학원에서 유학 중인 인도네시아분과 대화를 하다가 어느정도 확신?을 가진 생각이기도 합니다. 그 분은 그냥저냥한 대학의 '사회학과!'에 재학 중이신데, 학부는 인도네시아 꽤 명문대의 한국학과 출신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사회학과를 골랐냐 하니, 그저 한국으로 유학을 오고 싶었고 사회학과가 가장 '만만'했다고 하셨습니다. (네...일종의 간판보고 대학[원] 가기였던 것이죠.)

부모님도 딱히 반대를 안 한 것이, 한국에서 석사를 나왔다하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인도네시아에서는 굉장히 좋은 대우를 받을 것이였고, (그보다 잘 풀리면) 한국에서 취직할 테니깐요. (듣자하니, 인도네시아 대기업에서 일해서 받는 임금보다 여기서 인턴으로 받는 임금이 두배 정도 높다고 하더군요.)

(4)

유학의 어려움과 경제적 어려움을 과소평가하자는 건 아니지만, 그 당시나 지금이나 '비교할 수 없는' 각기 다른 어떠한 어려움과 어떠한 쉬움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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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요. 당시에 서울대 출신에다 유학까지 갈 수 있었다면, 단순히 안쓰럽게 보기만은 어렵죠. 다만, 이런 글을 볼 때마다, '나도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하고 개인적으로 다짐하곤 합니다. 굳이 제가 그 당시 유학 갔던 분들을 비판할 필요까지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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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다른 얘기지만... 우리나라 윗윗세대 철학자분들을 보면 해외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하였으면서도 동양철학 혹은 한국철학(?)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놓지 않으셨던 분들을 심심치않게 볼 수 있는 것 같아요. 김형효 교수 역시 그 중 하나겠지요. (다른 대표적인 예시는 역시 연세대의 박동환 교수 같습니다.)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골고루 공부하고 서로 학문적 교류를 하는 것이 매우 생산적이라는 것을 상기하는 것과 별개로, 저는 윗윗세대 서양철학자들의 동양/한국철학 연구가 역사적/생애적 경험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언급하신 김형효 교수의 글에도 암시되어 있듯이, 동양철학 혹은 한국철학이 "지금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동방의 문화민족")의 철학이 서양철학에 비해 결코 덜떨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다는 확신 내지 신념이죠. 즉 이들의 동양/한국철학 연구가 순수하게 지적인 관심 - 이런 것이 있다면 - 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다는 거죠. ad hominem의 우려가 있지만, 이 분들의 글을 읽을 때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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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윗세대 분들에게는 동양사상에 대한 향수가 꽤 많이 남아 있었던 것 같아요. 또, 그것과는 별개로, 동양철학을 전략적(?)으로 택하신 분들도 꽤 있는 것 같더라고요.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과거에는 동양인 학생이 동양철학을 인용하면서 비교연구 형식으로 학위논문을 쓰면 서양인 지도교수가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글을 통과시켜줬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외에도, 어떤 분은 예전에 이렇게 말씀해 주시기도 하셨어요. 유학을 하면서 서양권 학생들과 동일한 주제로 경쟁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고, 그래서 그 친구들이 안 하는 동양철학을 블루오션 전략으로 선택하게 되었다고요. (이 말씀을 해주신 분은 상당히 실력 있는 선생님이셔서,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충격받았던 기억이 나요.)

동양철학에 관심을 가졌던 1세대 학자분들을 비하하려는 건 결코 아니지만, 한국에서는 다들 실력 있는 분들이 외국에서 경쟁하며 그렇게나 깨져서 동양철학을 일종의 도피처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철학판에서 살아남기가 참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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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예전 분들이 유럽으로 유학 가서 유럽 철학이 아니라 한국 철학에 대해 박사 논문을 썼던 것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당시 유럽이 한국 철학에 대해 수준 높은 연구를 하던 곳도 아니었는데, 거기서 한국 불교나 유교에 관한 논문을 쓸 이유가 박사 학위 받아서 귀국하는 것 외에 다른 무엇이 있었을까요? 물론 그걸 잘못이라고까지 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그렇다면 한국에서 유럽 철학이 아니라 한국 철학 전공자로 활동하고 연구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한국뿐 아니라 다른 동아시아 학생들도 유럽에 유학 가서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엄청 고생합니다. 그럼에도 그들 중 일부는 그곳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박사 논문을 완성하기도 합니다. 결국 그렇게 유럽 철학과 맞대결한 사람들만이 자국의 철학 수준을 높이게 되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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