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에 대한 몇가지 질문

서양 미학사의 거장들이란 책을 읽고 든 몇몇 의문이 있어서 이 책을 쓴 교수님께 이메일을 보내봤으나 답을 듣지 못 해 혹시 하는 마음으로 서강 올빼미에 물어봅니다. 제가 책을 읽으면서 든 의문은 이렇습니다.

  1. 칸트의 미적 판단에서 지성의 사용은 어떤 의미인가?

제가 읽고 생각한 바에 따르면 칸트는 숭고에 대한 미적 판단이 아닌 미적 판단을 할 시에는 지성이 함께 작용한다고 설명하는 걸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미적 판단은 "개념적"인 무언가와는 거리가 있는 판단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미적 판단 시에) 개념적 사유 능력인 지성이 작용하는 것은 어떤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1. 칸트의 천재론에서 '정신'과 '미적 이념'

이 책의 헤겔 파트를 보면 교수님께서 칸트와의 차이점을 설명하시면서 이념에 대한 부분을 언급하셨습니다. 헤겔은 이념을 인간이 도달해야할 목표로 생각했지만 칸트는 인간이 이념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밤하늘의 별과 같이 생각했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천재는 정신을 가지고 있고 그 정신이란 미적 이념을 산출하는 능력인데 어떻게 해서 그 미적 '이념'이란 것을 산출해낼 수 있는 것입니까?
그들이 천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이해를 해야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한 '이념'과 '미적이념'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해야하는지 궁금합니다.

  1. 헤겔은 왜 절대 정신이 드러나는 형식이 예술에서 철학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한 것인지 궁금합니다.

  2. 하이데거 철학에서 '존재'와 '존재함'

하이데거를 읽을 땐 저 두 가지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 겁니까? 존재는 '진리'정도로 해석되는 것 같은데 이것이 맞다면 서로 닮은 점이 크게 없어 보이는 두 단어인 '존재'와 '진리'라는 단어가 어째서 하이데거 철학에선 동의어처럼 해석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3개의 좋아요
  1. 판단력비판(이석윤 번역) 서론 VII. 자연의 합목적성의 미감적 표상에 관하여 에서는 미적 판단에서 지성이 왜 사용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직관의 대상의 형식의 한갓된 포착(apprehensio)에 결합되어 있고, 직관이 일정한 인식을 위하여 어떤 개념에 관계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로 인해서 표상은 객체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관에만 관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우에] 쾌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반성적 판단력에 있어서 유동하고 있는 인식능력들[오성과 구상력]에 대한(die in der reflektierenden Urteilskraft im Spiel sind), 그리고 반성적 판단력 안에 있는 한에 있어서의 인식능력들에 대한 객체의 적합성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단지 객체의 주관적 형식적 합목적성뿐이다. 왜냐하면 그처럼 [객체의] 형식들을 구상력에로 포착한다고 하는 것은, 반성적 판단력이 비록 무의도적으로나마 적어도 그 형식들을 자기의 능력과, 즉 직관을 개념에 관계시키는 자기의 능력비교하지 않는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KU, XLIV)

첫번째 문장은 칸트가 미적 판단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지를 보입니다. 우리는 직관의 대상의 형식을 포착하는데, 그것이 순수이성비판에서 기술되는 것처럼 대상의 이론적 인식에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쾌와 결부되어 있을 경우["표상은 객체에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주관에만 관계하는 것"], 그러한 판단을 칸트는 미적 판단으로 분류합니다.

두번째 문장은 그래서 미적 판단에 어떤 인식능력들이 관여하는지가 서술되는데, 일단 이 부분에서는 지성Verstand과 상상력Einbildungskraft이 언급됩니다. 그리고 미적 판단에서 표현되는 쾌는 인식능력들이 유동하는 가운데 대상의 합목적성과 결부된다고 말하며, 이 합목적성은 실제 객관적 목적에 대상이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목적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의미하며, 그래서 '주관적 형식적' 합목적성으로 불립니다.

세번째 문장에서는 비로소 지성이 왜 관여하는지에 대한 서술이 나오는데, 간단히 말해 지성이 없으면 대상이 포착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성은 개념의 능력입니다. 이론적 인식(세계의 앎을 구성하는 인식)에서 지성은 자신의 범주에 따라 감관을 통해 주어진 잡다(질서지워지지 않은 감각자료)를 결합하여 대상을 구성합니다. 순수이성비판 재판의 '범주의 연역'장에선 지성을 가장 추상적으로 '결합'Verbindung의 능력으로 칸트는 묘사합니다(KrV B129-130). 그런데 이론적 인식이 아닌 상황에서도 지성이 사용된다고 한다면, 미적 판단에서와 같이, 그렇다면 어찌됐든 무질서한 감각자료들을 '하나의 대상'으로 '결합'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어찌됐든 감각자료를 하나의 상으로 결합했다는 점에서 지성이 관여한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것을 대상의 이론적 인식을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에(그렇다면 그것은 규정적 판단이 되겠죠), 상상력과 지성의 관계는 상상력이 다만 지성에 따르는 그러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동하는 관계'(이석윤 번역본에서는 유동하는 관계라고 번역했지만 즉자적으로 im Spiel을 번역했을 때, 유희 속에 있는 관계, 즉 특정한 규칙에 얽매이지 않는 관계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이며, 이론적 인식을 위한 규칙에 엄격하게 얽매이지 않고 감각자료를 결합하여 '하나의 대상'을 만들었다고, 그리하여 그것을 '포착'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제 개인적으론 해당 책을 쓰신 교수님의 헤겔 해석이 적합한지 의문스럽네요. 적어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발언으로 읽힙니다. 정확한 위치는 기억나지 않지만, 헤겔의 논리학에서 헤겔은 칸트의 이념과 자신의 이념의 차이를 정확히 반대되는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칸트의 이념이 '목표'의 의미라면, 헤겔 본인의 이념은 언제나 실제하고 있는, 그러니까 현실화되고 있는 그러한 것으로요. 칸트가 이념을 도달 불가능하다고 말할 땐, 과학적 인식에서처럼, 그것을 경험세계에서 보일 수 없다는 의미로, 그리하여 칸트적 의미에서 '이론적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말한 것이나, 이념을 생각할 수 조차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천재는 이 세계 속에서 어떠한 예증도 찾을 수 없는 이념을 감각화하는 자로, 이때 이념의 감각화는 물론 실제로 '이념을 실현'한다는 의미(칸트에서의 이념은 언제나 되어야 하는 사태, 사태의 규범성과 결부되며, 도덕성과 결부할 때에만 의미있기 때문에)라기보다, 인간인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의 판단력을 통해 천재가 만들어낸 '상'을 '이념이 현실화된 것'으로 본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 칸트의 이념들은(영혼, 자유, 신) (도덕적) 실천의 영역에서 목표로서의 적극적 역할을 수행합니다. 자유는 도덕이 가능하기 위한 근본조건으로서, 영혼과 신은 도덕의 동기를 이루는 것으로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념들은 이론철학에선 가상을 일으키는 것으로, 오류의 원천이며, 그것을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상응하는 직관이 없기 때문에. 칸트 체계 속에서 미적 이념은, 이념에는 그 내용의 무제약성 덕분에 비록 상응하는 직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마치 그 이념이 세계 속에서 상으로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즉 실제로 그것이 목적에 합치하는지와는 관계 없이, 단지 감각적 형태만을 보고도 그것이 목적에 합치한다고 판단하는 우리 자신의 판단력 덕분에, 천재에게도 우리에게도 미적 이념이 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2. 정신의 고유성은 자기 자신을 보는 것, 자기인식에 있으며, 인식에 적합한 형식은 예술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감각적 형상이라기보다, 개념이기 때문에, 헤겔은 철학을 정신을 인식하는데 가장 적합한 상위의 인식형태로 봅니다.

  3. 다른 분들이 더 자세하게 서술하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만, 간단하게는 하이데거는 통념적 진리 개념 '우리 자신의 진술과 세계의 사태의 일치'로서의 통념적 진리개념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4개의 좋아요

쓰고나니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서 2번과 관련하여 몇자 더 적습니다. 미적 이념이 실제 이념도 아니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념'이라는 말이 붙는지와 관련해서는 칸트는 상응할 직관이 부재하는 이성의 개념으로서의 이념과 상응할 개념이 부재하는 상상력의 표상으로서의 미적 이념이 이러한 '부정성'을 매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러나 내가 미감적 이념이라고 하는 것은 구상력의 표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표상은 많은 사유를 유발하지만, 그러나 어떠한 특정한 사상, 즉 개념도 이 표상을 감당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어떠한 언어도 이 표상에 완전히 도달하여, 그것을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미감적 이념이 이성이념의 대립물(대칭물)임은 우리가 용이하게 알 수 있는 일이거니와, 이 이성이념은 반대로 어떠한 직관(구상력의 표상)도 감당할 수가 없는 개념인 것이다." KU 192-193 (이석윤 번역, 판단력비판, 강조는 칸트 본인의 것)

2개의 좋아요

이 질문은 판단력비판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제대로 된 해답을 주지 않고 스윽 넘어가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하 개인적인 해석에 따른 설명을 드려보겠습니다.

미적판단에서 지성의 사용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그 실마리로서 상상력과 지성 사이의 "자유로운 유희"라는 개념을 먼저 검토해야 합니다. 이 개념은 판단력비판 9절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지지만, 놀랍게도 칸트는 왜 미적판단에서의 마음 속 반응이 상상력과 지성 사이의 자유로운 유희라고 규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변"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추정해보자면, 아마도 칸트는 18세기의 미학적 전통 (영국의 심리학적 전통)에 따라, 미적판단이 이루어질 때 상상력-지성 의 "자유로운 유희"가 일어난다는 것을 일종의 심리학적 혹은 생리학적 사태로서 전제하고 있는 듯 합니다..

아무튼 미적판다에서 상상력-지성 사이의 심리학적 반응으로서 자유로운 유희가 일어난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여기서 지성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칸트가 지성에 대해 논함으로써 무엇을 얻고자 했는지를 보는 것이 좋습니다. 즉 칸트는 지성의 사용을 통해서 미적판단의 특수성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1. 미적판단은 한편으로는 사적인 쾌-판단 (이것은 "나에게" 쾌를 준다)과 구별됩니다. 왜냐하면 미적판단에서 우리는 "마치" 이 대상의 아름다움이 나 뿐만 아니라, 모든 판단자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해야할 무언가처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즉 만약 내가 아름다운 대상이라고 판단한 것에 대해 상대가 다르게 판단하면 우리는 이에 대해서 논쟁하고는 합니다. 만약 미적판단이 단순 사적인 쾌-판단이라면, 이러한 논쟁은 이해불가능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흔히 말하듯 "취향 존중"을 외치고 각자 갈길 가면 되지, 왜 굳이 이에 대해서 따지고 논쟁하는지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2. 미적판단은 다른 한편으로는 개념적/이론적 판단과 구별됩니다. 개념적/이론적 판단은 예컨대 "이것은 책상이다"라는 형식일텐데, 이러한 판단은 보편적 판단 그 자체입니다.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을 이러한 보편적 개념이라고 이해하는 것 역시 불합리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 "아름다움"이 이론적/보편적 개념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미적판단에 대해서 논쟁하는 것이 이해불가능하게 됩니다. 이것이 책상인지 아닌지에 대한 보편적/이론적 판단 기준이 존재하는 것처럼, 해당 대상이 아름다운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보편적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적어도 직관적으로 불합리하기 때문입니다.
  3. 이러한 점에서 미적판단에 지성이 개입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개념적/이론적 "규정"이 주어지지 않지만 (따라서 이론적 의미에서의 지성의 사용은 아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적판단에서 우리는 다른 이들에 대해서 무언가 공적인(public) 진술을 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무언가의 "보편성"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양면성, 즉 보편성에 호소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보편성(개념)에 의해 규정되지는 않는, 이러한 양면성을 칸트가 지성의 개입을 통해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Nahverkehr 님의 인식론적인 설명에 제가 약간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은,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틀린 설명은 아닐지라도 미적판단의 고유성을 설명하지 못하게 됩니다 (trivially true but irrelevant). 즉 사적인 쾌-판단(이것은 나에게 쾌를 준다), 사적인 지각판단(이것은 따뜻하다) 같은 판단들 역시 이론적인 판단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하나의 대상"으로 "결합"되어야 합니다. 즉 다른 종류의 사적인 판단들 역시 (순수이성비판에서 말하는) 근원적 결합(통각)은 작동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성의 사용이 비단 미적판단 뿐만 아니라 다른 사적인 판단들에게까지 확장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칸트의 의도(미적판단을 다른 종류의 판단들로부터 구분하기)와 어긋나게 됩니다.

말씀하신대로 단순한 "이념"과 "미적이념"은 서로 다른 것으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칸트에게 "이념"은 "이성"이 가지는 "개념"으로서,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ex "신" "영혼" "자유"). 반면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말하는 "미적 이념"은 "상상력"이 가지는 "표상"이라는 점에서 엄밀히 말해 "개념"이 아니라, 직관에 주어질 수 있는 그러한 표상입니다. (Cf. 49절). 칸트는 이러한 이념-미적이념의 구별을 판단력비판에서 "이성이념 Vernunftidee"과 "미적이념"으로 구별하고, 양자가 하나의 쌍을 이룬다고 말합니다. 이성이념은 경험의 한계를 넘어선 개념이기 때문에 사유가능하나 직관에 주어질 수 없습니다; 미적이념은 직관에 주어지고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사유하도록 추동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개념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한 표상입니다. 따라서 경험으로부터 접근불가능한 이성이념의 영역에 대해서, 우리는 미적이념을 통해 비록 불완전하지만 경험적으로 사유해보는 계기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각론적 설명보다는 철학사적 설명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칸트 이후 그리고 헤겔 이전의 많은 독일 관념론자들 및 독일 낭만주의자들은 칸트가 제시한 이분법적 세계를 다시 종합할 수 있는 통일적 매개체를 찾아 모색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 이들이 동의했던 생각은 아름다움과 예술이 이러한 통일적/종합적 매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쉴러, 쉘링, 횔덜린, 슐레겔 등 사실상 당대의 모든 사상가들이 공유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초기 헤겔 역시 이들의 영향을 받아 미학이 사유의 최종적인 심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점점 헤겔 본인의 사유가 발전되고 확장되면서 이러한 예술철학적 경향성(통칭 낭만주의)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헤겔이 낭만주의적 사유에서 가장 문제시했던 부분은, 예술과 아름다움이 종합적 통일적 작용을 하는 것은 어느 정도 분명하지만, 어떻게 해서 우리가 통일에 도달할 수 있는지의 "과정"에 대한 물음이 완전히 신비주의적으로 남게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쉘링은 "지적 직관"이라는 다소 신비스러운 개념을 통해서, 예술작품을 관조하는 행위로부터 절대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도달과정이 "개념적으로" 기술될 수 없는 한에서 예술철학은 비의적으로 남을수밖에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중후기 헤겔은 쉘링의 "지적직관" 개념을 버리고 개념의 이행과정을 다루는 "변증법"으로 넘어갑니다.
이러한 구도가 헤겔의 미학강의에서도 반복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헤겔 역시 예술의 종합능력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의 매체가 감각적 현현인 한에서, 개념적/변증법적인 철학에 비해 열등한 지위를 가질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4개의 좋아요

질문하신 내용들, 즉 아름다움에 대한 미적 판단, 천재, 미적 이념, 절대정신과 예술, 존재와 진리 등은 서양 근현대 미학의 핵심 개념들이면서 참으로 어려운 내용들입니다. 저 개념들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오늘도 국내외 교수들과 연구자들은 (내 능력을 세상에 보여주겠어, 라고 속으로 외치며) 자기가 썼던 글을 고치고 고치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을 겁니다. 위에 몇 분이 원문 인용과 함께 상세한 답을 주셨는데, 답변을 추가해 보겠습니다.

  1. 칸트에 따르면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판단은 어떤 대상을 보거나 듣고 (인간의 인식 능력들인) 상상력과 지성이 맘속에서 자유롭게 유희할 때, 그 즐거운 상태에 대해 판단하는 것입니다. 어렵죠? 원래 지성은 개념 능력이라서 뭔가를 시각적으로 보거나 청각적으로 들으면 '저건 X다'라고 개념적으로 파악(규정)해야 하는데, 아름다운 것에 대한 판단에선 대상에 대한 반성만 일어날 뿐, 대상에 대한 개념 규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칸트는 상상력과 지성이 '인식'이라는 본업을 제쳐 놓고 자유롭게 '놀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2. '미적 이념'은 위에서 말한 미 판단, 즉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판단과 관련된 개념입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은 아름다운 대상(예컨대 꽃)을 보면서 맘속에 어떤 상(이미지)을 갖게 되는데 - 그것을 인식하는 경우가 아니라 - 그게 아름답다고 느낄 때는, 그것을 하나의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그때 인간은 '저게 뭐지? X인가? Y인가? Z인가? 아니면 MZ인가?'라고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미적 이념'은 감각적 직관과 관련됩니다. 반면에 '이성 이념'이란 오로지 머릿속으로 생각만 할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이념입니다. 직관과 상상력은 그러한 대상에 대해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신과 우주 같이 무한한 대상은 형태가 없기 때문에 감각적으로 직관할 수 없기 때문이죠.

  3. 헤겔에 따르면 절대정신이 드러나는 방식엔 3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술, 종교, 철학입니다. 예술에선 절대정신(또는 신적인 것)이 보거나 들리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고대 희랍인들에게 제우스 조각상은 절대정신(또는 신)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반면에 기독교 같은 (계시) 종교에선 신이 눈으로 볼 수 없고, 오직 맘속에서 생각만 할 수 있는(즉 표상할 수 있는) 대상이 됩니다. 그러던 신이 철학에선 (신 존재 증명과 같이) 개념적 사유의 대상이 됩니다. 요런 절대정신의 3가지 현상 방식은 대체로 역사적 발전에 상응합니다(예술은 고대, 종교는 중세, 철학은 근대). 그래서 근대 이후에 예술은 절대정신을 매개하는 역할이 아니라 교육(빌둥)과 같은 다른 역할을 하게 됩니다.

  4. '하이데거 철학에서 존재와 진리의 문제'는 제가 답하기 벅찬 질문이군요. 하이데거에 대한 다른 게시 글들을 읽어보세요.

3개의 좋아요

말씀하신대로 칸트는 미적 판단의 보편성을 요구하고 있지, 미적 판단을 대상판단에서처럼 보편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언급하신 '양면성'은 지성만으로 해명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칸트는 미적판단이 판단력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며, 판단력의 원리를 '주관적 합목적성'으로 제시합니다. 주관적 합목적성은, 대상이 합목적적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즉 목적에 따라 구성된 것으로 생각되나, 우리가 구체적인 목적을 지시할 수도 없기에, 단지 주관적으로 '합목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목적'개념은 인간의 행위 영역에서 제기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연의 대상은 그러나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니, 합목적적이라고 판단할 이유가 없죠.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합목적적이라고 판단합니다.(적어도 칸트 체계 내에서는요) 그렇다면 합목적적이라고 판단하는 배경에는 자연이 초감성적 존재, 신에 의해 합목적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는 이론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그러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기도 합니다. 순수이성비판의 주요 주장이기도 하죠. 그러나 '실천이성비판-이성의 한계 내에서 종교'에서 신의 이념은 최고선(행복할만한 자가 행복한 것)과 결부되어 있고, 우리에게 실현해야할 목표로서 제시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 상황 속에서 세계는 비록 전적인 기계적 인과에 종속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세계를 다르게 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판단력), 그러한 다른 세계란, 자연을 이념이 실현되어 있는 세계로 보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런 도식 속에서 판단력이란 자연을 합법칙적 세계가 아니라 이념이 실현되어가고 있는 세계로 보는 능력이며, 실제로 이념이 실현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본다는 의미에서, '주관적 합목적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판단력의 원리에 따라 수행되는 미적 판단에서의 보편성이란, 보편성의 요구란, 지성이 대상의 이론적 인식에서 가지고 있는 보편성과 결부된다기보다, 우리가 실천적으로 이념적으로 '요구'하는 보편성과 결부된다고 생각합니다. 관련된 칸트의 진술은 판단력비판 서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성은 감관의 객체로서의 자연에 대하여 선천적으로 입법적이요, 가능적 경험에 있어서의 자연의 이론적 인식을 성립시킨다. 이성은 주관에 있어서의 초감성적인 것으로서의 자유와 자유의 고유한 인과성에 대하여 선천적으로 입법적이요, 무조건적-실천적 인식을 성립시킨다. 오성의 입법하에 있는 자연개념의 영역과 이성의 입법하에 있는 자유개념의 영역과는 (각자 자기의 원칙에 따라) 상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감성적인 것과 현상들을 분리시키는 커다란 심연에 의하여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자유개념은 자연의 이론적 인식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규정하지 못하며, 자연개념은 또한 자유의 실천적 법칙들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규정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 있어서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그러나 비록 자유개념에 따르는 (그리고 자유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실천적 규칙에 따르는) 인과성의 규정근거가 자연 안에 있지 않으며, 또 감성적인 것이 주관내의 초감성적인 것을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역은 가능하며(물론 자연의 [이론적] 인식에 관해서가 아니라, 자유개념에서 자연에 미치는 영향들에 관해서이지만), 또 그것은 자유에 의한 인과성의 개념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인과성의 결과는 이러한 자유의 형식적 법칙에 따라 이 세계에 일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 자유개념에 따른 결과란 궁극목적이요, 이 궁극목적(또는 감성계에 있어서의 이 궁극목적의 현상)은 현존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이 궁극목적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감성적 존재자로서의, 즉 인간으로서의 주관의) 자연적 본성 안에 전제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선천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인 것을 고려함이 없이, 전제하고 있는 것이 곧 판단력이며, 판단력은 자연개념과 자유개념을 매개하는 개념을 자연의 합목적성의 개념에 있어서 제공한다. 그리고 이 매개적 개념은 순수이론이성에서의 순수실천이성에로의 이행, 자연개념에 의한 합법칙성에서 자유개념에 의한 궁극목적에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에 있어서만, 그리고 자연의 법칙들과 조화함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는 궁극목적의 가능은 이 매개적 개념에 의해서 인식되기 때문이다." KU, LIII-LV

이 인용문이 함축하는 바를 저는 다음과 같이 봅니다.

  • 지성은 자연에서의 법칙을 제시하며, 이성은 초감성적인 것, 실현되어야 하는 것과 관계하여 법칙을 제시합니다. 이 둘의 영역은 감성계와 초감성계로 엄격하게 나누어져 있습니다.
  • 판단력은 자연개념과 자유개념을 매개하는 개념, 합목적성의 개념을 제공합니다.
  • 도덕철학에서 사유되는 '궁극목적'은 '언젠가' 실현되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합니다.
  • 합목적성의 개념은 이론이성으로부터 실천이성으로의 이행을, 자연의 합법칙성으로부터 궁극목적으로의 이행을 가능케 합니다.
1개의 좋아요

질문에 대해서는 윗 분들이 공을 들여 정성스럽게 답을 주셨기 때문에 한 말씀만 덧붙이겠습니다.

reflex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제시하신 질문들이 너무 거대하고 포괄적입니다. 댓글을 다신 분들이 가능한 한 상세하게 답을 주셨지만, 질문들이 애초에 몇 문단의 짧은 글로 충분히 만족스럽게 답변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사실 말씀하신 것 하나하나가 논문이나 연구서의 주제거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책을 읽고 막연하게 떠오르는 의문들에 대해 시간을 들여 숙고하고 다른 문헌들을 스스로 찾아보면서 구체적인 형태로 정리하는 연습을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더구나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자 하신다면, 그런 연습이 도움이 될 것이라 봅니다.

2개의 좋아요

'실제 객관적 목적에 대상이 부합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객관적] 목적에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미적 판단에서의 지성에 대한 구상력의 주관적-형식적 합목적성에 대한 칸트의 이해가 아니라 자연의 합목적성에 대한 칸트의 이해에 해당합니다.

1개의 좋아요

숭고에 대한 미적 판단에도 지성이 작용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칸트에 따르면 숭고는 '지성/정신이 획득하는 정조'입니다:

그러니까 숭고하다고 불릴 수 있는 것은 반성적 판단력을 종사시키는 어떤 표상을 통해 정신이 획득하는 정조이지 객관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숭고한 것에 대한 앞서의 해명 정식들에 다음을 덧붙일 수 있다: 숭고한 것이란 그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관의 모든 척도를 뛰어넘는 마음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이다. (백종현 국역본, 살짝 수정, 256)

Mithin ist die Geistesstimmung durch eine gewisse die reflektierende Urteilskraft beschäftigende Vorstellung, nicht aber das Objekt erhaben zu nennen. Wir können also zu den vorigen Formeln der Erklärung des Erhabenen noch diese hinzutun: Erhaben ist, was auch nur denken zu können ein Vermögen des Gemüts beweiset, das jeden Maßstab der Sinne übertrifft. (독문 원본)

what is to be called sublime is not the object, but the attunement that the intellect [gets] through a certain presentation that occupies reflective judgment. Hence we may supplement the formulas already given to explicate the sublime by another one: Sublime is what even to be able to think proves that the mind has a power surpassing any standard of sense. (Werner S. Pluhar 영역판, 106)

Consequently it is the attunement of the spirit evoked by a particular representation engaging the attention of reflective judgement, and not the object, that is to be called sublime. The foregoing formulae defining the sublime may, therefore, be supplemented by yet another: The sublime is that, the mere capacity of thinking which evidences a faculty of mind transcending every standard of the senses. (James Creed Meredith 영역판, 81쪽)

1개의 좋아요

모두 너무 상세하게 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1개의 좋아요

저는 뭔가 아주 자연스럽게?
지성과 판단력이 작용한다고 받아들여졌었는데요.

2023년에 예술가가 피카소의 큐비즘이나 잭슨폴록의 액션 페인팅 기법을 사용한다면
미적으로 가치가 크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기존 방식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겠죠.

예술작품의 미적 가치를 평가함에도 그렇습니다.
진품명품에 나오는 다양한 물건들에 대해 미적 판단을 하거나 피아노 콩쿠르 심사위원이 된다고 생각해보면 이성의 사용은 자연스럽습니다.

지금은 예술계를 뒤엎은 걸로 유명한 뒤샹의 샘도 지성의 사용 없이 오로지 감성으로만 사용해 미적 가치를 판단하기란 어렵다고 생각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