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진리성 문제에 대한 현상학의 대답?

현상학을 입문한지 1년 가까이 된 고등학생입니다. 얼마 전 학교에서 "과학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진리인가?"라는 주제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현상학에 관심을 두었기에, 위 주제에 대한 현상학의 입장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발표 내용이 정확한지 그리고 논리적 오류는 없는지 의문이 들었고, 서강올빼미 회원님들께 도움을 청하고자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탐구한 내용을 아래와 같습니다.

(1) "과학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진리인가?"라는 물음은 다음의 내용을 함축한다.
a. 인간의 인식이나 해석으로부터 독립적인 진리가 존재하는가?
b. 과학 이론은 a의 진리를 틀림없이 표상하는가?
(위 물음으로부터 a가 도출될 수 있는 이유는, 진리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인 '절대적으로 보편적이고 불변적인 타당한 사실'의 관점에서 진리가 인간의 인식이나 해석에 달려있다면 진리는 절대성을 취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따라서 위 물음의 내용은 일종의 과학적 실재론을 함축하고 있다. 과학적 실재론은 1) 인간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인 객관적 세계를 상정하고, 2) 과학 이론이 객관적 세계를 완전히 또는 근사적으로 올바르게 표상함을 주장하는 이론이다.

(3) 현상학의 입장에서 (1)의 물음과 (2)의 과학적 실재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부정적 답변이 도출된다.
a. 인간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인 객관적 세계를 상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식과 대상을 분리하여 둘 중 하나를 순수한 '그 자체'로서 탐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b. 과학을 절대적 진리로 인정하는 것은 다양한 사태 영역에 대한 다양한 태도를 존중하지 않고, 모든 영역에 과학적 태도를 적용하는 환원주의를 초래한다.
c. 과학을 절대적 진리로 인정하는 것은 과학적 세계의 기초로서 생활세계를 존중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한다.

(4) 결론적으로, 현상학의 입장에서 "과학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진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아니다."라는 입장이 도출된다.

혹시 중간에 오류가 보이거나 조언할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개의 좋아요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인 객관적 실재(이하 "실재")를 "상정"하는 것과 실재를 의식-독립적으로 "탐구"하는 것은 구분되어야 할 필요가 있어보입니다. 과학주의에 대한 반론으로서 후자를 논박하는 것은 설득력이 꽤 있어보이는 반면, 전자를 논박하게 되면 (버클리적) 관념론의 공격을 받을 여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과학적 환원주의에 반대하는 실재론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의식으로부터 독립된 실재 그 자체를 탐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인정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실재의 "존재"를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즉 순수 실재에 대한 "탐구"를 부정하면서도 순수 실재를 "상정"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러한 공격이 과학주의자에게 먹힐지 의문입니다. 과학주의자는 다양한 태도와 생활세계를 "존중"하면서도 과학의 절대적 진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과학적 진리는 실재에 대한 사실적/절대적 진리를 담지하는 것이고, 생활세계 및 다른 다양한 태도들은 실재에 대한 해석적/주관적/상대적 관점을 담지합니다. 따라서 과학주의에 대한 논박으로 그리 매력적이지 않아보입니다.

5개의 좋아요

(1) '과학', '과학적 실재론', '과학주의'를 구분하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상학을 통해 과학주의 혹은 자연주의를 비판할 수는 있어도 과학을 비판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또, 과학적 실재론은 (물론, '과학적 실재론'이라는 이름으로도 온갖 상이한 입장이 가능하긴 하지만) 현상학이 정당화할 수 있는 철학적 입장이라고 생각하고요. 애초에 후설의 현상학은 상대주의에 반대하여 나온 학문이기도 하거든요. 모든 것을 자연과학으로 환원하려 하는 자연주의만큼이나, 어떠한 본질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상대주의 역시 현상학의 비판 대상이 되는 거죠. (구체적으로, 후설은 이러한 양날의 비판을 심리학주의와 역사주의에 대해 수행하죠.)

(2)

어떠한 의도로 쓰신 내용인지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질문 자체가 약간 어색합니다. '과학'은 학문 분야이고, 학문 분야에 대해서 "진리인가?"라고 묻는 것이 일반적이지는 않아서요. 가령, "중화요리는 진리인가?"라든가 "이종격투기는 진리인가?"라는 물음이 어색한 느낌을 주는 것과 비슷하죠. 아마도 글쓴이님의 의도를 살리고자 한다면, "과학적 명제는 필연적으로 진리인가?"라든가 "과학적 진리는 다른 종류의 진리들보다도 우월한가?" 정도로 질문을 더 다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3)

여기서도 'a의 진리'라는 용어가 갑작스럽게 등장해서 정확히 무엇을 질문하려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4)

이 부분에 쓰신 내용의 큰 요지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비판의 대상을 '과학적 실재론'보다는 '과학주의'나 '자연주의'로 잡는 편이 더 올바르다고 봅니다. 적어도, 후설은 과학이 탐구하는 대상이 일종의 '실재'라는 주장을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심지어, 근대 이후의 기술문명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하이데거 같은 사람도 이 주장을 딱히 거부할 것 같지는 않고요. 현상학자들은 "과학적 탐구의 대상은 실재가 아니다!"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과학만이 실재에 대한 탐구인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하는 것이니까요.

(5) 한 가지 점에서, 저는 Herb님과는 의견이 달라요.

저는 현상학이 이런 구분을 비판적으로 문제 삼는다고 봐요. 즉, "무엇인가 실재가 있기는 있지만, 무엇이 그 실재의 속성인지 알 수 없다."라는 생각 말이에요. 이건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실체/속성 이분법을 전제로 하고서만 제시될 수 있는 주장인데, 현상학은 '우리에게 전혀 주어지지 않는 실체' 같은 개념이 일종의 부조리이고 무의미라고 비판하거든요. (가령,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 7절에서 현상학의 '현상' 개념을 해설하면서 '사물 자체' 따위가 현상 뒤편에 존재한다는 입장을 비판하죠.)

저는 이런 비판이 현상학에서만 제기되는 특수한 '진영 논리'인 것은 아니라고 봐요. 오히려 순수한 실체나 사물 자체에 대한 비판은 철학사적으로 꽤나 연원이 오래되었어요. 가령, 야코비가 칸트의 '사물 자체' 개념이 모순적이라고 지적한 점이 대표적이죠. 칸트는 우리의 감성이 사물 자체에 의해 '촉발(affection)'된다고 주장하면서도, '원인-결과'는 지성의 범주가 만들어낸 현상계의 질서일 뿐 사물 자체에 실제로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하잖아요. 야코비는 바로 여기에 명백한 모순이 있다고 본 거죠. '촉발'이라는 것도 결국 사물 자체가 '원인'이 되어서 초래한 '결과'이니까요. 즉, "우리의 감성을 촉발하는 사물 자체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 자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라는 칸트의 주장은

(a) 사물 자체가 현상계라는 결과를 촉발한 원인이다.
(b) 원인-결과의 질서는 지성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두 가지 주장을 포함하고 있고, 이 두 주장은 각각

(a') 원인-결과의 질서는 사물 자체의 세계에서 성립한다.
(b') 원인-결과의 질서는 사물 자체의 세계에서 성립하지 않는다.

라는 모순적 주장들을 함의하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야코비는 "나는 사물 자체에 대한 가정 없이는 칸트의 체계 안으로 들어갈 수 없고, 또 나는 그 가정을 가지고서는 거기에 머무를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기도 해요. 칸트의 철학은 "우리의 감성을 촉발하는 사물 자체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 자체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라는 사고 방식 위에 세워져 있지만, 그 사고 방식이야말로 칸트의 철학을 붕괴시키는 균열 지점을 숨기고 있다는 거죠.

물론, 이런 야코비의 비판이 칸트 이외의 다른 형이상학적 입장들에까지 곧바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지만 저는 '실체/속성'의 구분을 순진하게 받아들이거나 '사물 자체' 개념을 손쉽게 상정하는 형이상학이 이와 유사한 비판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고 봐요. 적어도, 그런 형이상학적 입장들은 "x가 존재하기는 존재하는데, 다만 우리가 경험하지 못할 뿐이야!"라는 주장이 정확히 어떠한 의미인지를 해명해야 할 책임을 언제나 떠맡을 수밖에 없죠. 자신의 주장이 "푸른 요정은 존재하긴 존재하는데, 다만 우리가 경험하지 못할 뿐이야!"라는 허황된 주장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를 보여주어야 할 책임 말이에요.

4개의 좋아요

(1)

제가 제안한 구분은 생각보다 미묘한 구분이라 제 의도가 아마 잘못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있네요. 이러한 구분을 쓸 때 칸트가 고려될 수 있고 또 제가 고려한 것도 맞지만, 정확히 말하면 "칸트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와 관련해서는 후술하겠습니다).

이것은 위의 구분과 비슷해보이지만 저는 동의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구분을 @YOUN 님의 정의대로 이해한다면, 저는 YOUN님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설명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가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은,

  1. YOUN님의 정의는 칸트의 관념론에 대한 하나의 논쟁적인 해석에 기댄 정의입니다. 아마 "두 세계 이론"이니 "두 측면 이론"이니 하는 그 전장이죠. 그리고 이러한 프레임워크 속에서 논의가 계속된다면, 야코비의 오래된 비판에 노출되는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러한 프레임워크가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에 대한 잘못된 프레임워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YOUN 님의 정의에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간략히 후술하겠습니다.)
  2. 제가 제시한 구분은 칸트의 관념론적 주장을 직접적으로 끌어온다기 보다는, (칸트의 관념론적 주장에 대한) 회의주의적 공격에 대한 가능한 "칸트적" 논박을 다룹니다. 칸트의 관념론에 대한 (야코비의 공격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강력한 회의주의적 공격은, 칸트가 선험철학적 논변을 통해서 어떤 것을 증명했건 간에, 이것이 기껏해야 "사유"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실재"나 "존재"가 끝내 과소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즉 그 유명한 사유와 존재의 구별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칸트적 관념론은 끝내 (사유는 인정하나 실재는 인정하지 않는) 버클리적 관념론의 혐의를 벗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험적 논변의 관념론적 약점을 일평생 연구한 B. Stroud (1968)는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In particular, for any candidate S, proposed as a member of the privileged class, the sceptic can always very plausibly insist that it is enough to make language possible if we believe that S is true, or if it looks for all the world as if it is, but that S needn't actually be true.
특히, 확실한(privileged) 종류라고 제안된 어떤 명제 S에 대하여, 회의주의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이 매우 그럴듯하게 주장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S가 참이라고 "믿거나" 혹은 모든 세계에 대해서 그렇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러한 언어적 표현 S를 가능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S가 실재적으로(actually) 참일 필요는 없다.

이러한 공격의 요지는 주어진 사유 및 의식에서 출발하는 선험적 논변의 특성상, 그 결론이 "믿음" 즉 사유의 한계를 벗어나 "실재" 즉 존재의 영역에 닿기에 항상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의주의의 문제에 대해서, 칸트 뿐만 아니라 많은 현대 학자들 역시 대응하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하였습니다. 가령 퍼트남의 외재주의, 스트로슨의 검증주의적 칸트 해석, 데이빗슨 류의 정합론적 대응 등등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austere한 것은 정합론적 대응인데, 이러한 대응에 따르면 "실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의 사유의 확실성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혹은 "나의 사유의 확실성을 인정한다면, 정합적으로 실재의 존재가 인정되어야 한다" 등등의 주장을 포함합니다.

이제 차이점이 보이실 겁니다.

YOUN: "무엇인가 실재가 있기는 있지만, 무엇이 그 실재의 속성인지 알 수 없다."
나: "나의 사유의 확실성을 인정한다면, 정합적으로 실재의 존재가 인정되어야 한다."

즉 제가 제시한 구분은 사유/의식/"탐구"의 우선성을 인정하면서도 이와 독립된* 실재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독립된"*: 물론 이러한 논변 역시 사유 속에서 진행된다는 점에서 실재의 존재가 사유와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독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제가 말하는 독립성은 사유/가능성으로부터 구분되는 존재/현실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유와 구분된 실재가 "상정"될 수 있다면, 비록 사유가 언제나 우선한다는 현상학적 전제를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존재를 사실적으로 탐구하고자 하는 과학적 실재론의 길이 열려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
야코비의 비판에 대해 간략히 다루자면, 저는 칸트가

이 문장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비록 칸트가 때때로 잘못된 인상을 주는 서술을 하지만, 칸트는 촉발의 관계가 이론철학적으로 규정되지 않은 채(unbestimmt) 남아있다고 말합니다. (이미 초판에서부터 이렇게 말합니다; cf. A253). 이 경우 unbestimmt하다는 것은 촉발의 원인이라고 흔히 지목되는 "사물 자체"라는 것이 직관에 주어질 수 없고 따라서 범주적 종합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사물 자체가 현상계라는 결과를 촉발한 원인이다"라는 명제는 칸트적으로 말하면 이론적으로 unbestimmt하고,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의미론적인 객관적 타당성을 지니지 못합니다.

물자체의 촉발 문제에 관련해서는, 물자체를 촉발의 원인으로서 positve하게 표상하는 것보다는, "나의 감관을 촉발하는 실제 대상이 현상이 아닌 물자체라는 것을 알 수 없다"라는 식의 negative 표상이 좀더 칸트 해석으로서 적절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3개의 좋아요

주장하신 내용대로라면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저 역시 주관, 객관, 상호주관이 언제나 함께 간다는 데이비슨의 삼각측량 논증을 받아들입니다.)

다만, 칸트의 철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에서 관점이 다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특정한 '프레임워크' 속에서 칸트를 규정했죠. 야코비를 비롯한 많은 독일 관념론자들은 일종의 '두 세계 이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칸트를 비판하니까요. 저는 어떤 칸트 해석이 올바른 것인지 엄밀하게 평가할 능력은 없지만, (그래서 좀 더 널리 퍼져 있는 해석인 두 세계 이론을 일단 기본적으로는 수용하는 입장이지만) 적어도 『순수이성비판』의 '관념론 논박'과 같은 부분들이 Herb님의 주장처럼 독해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렇게 독해된 칸트는 전통적인 칸트보다도 훨씬 강점이 많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동의합니다.

3개의 좋아요

1. 다른 분들께서 자세히 말씀해 주셨듯이, 현상학이 과학적 실재론에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상학은 과학주의(환원주의)에 반대하는데, 과학주의는 심리학, 문화학, 논리학 같은 다른 학문들이 고유한 영역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학으로 흡수되고 환원된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의식-독립적인 자연세계가 존재한다는 과학적 실재론과 반-과학주의는 양립 가능합니다. 의식에 독립적인 자연세계도 존재하지만 그 밖에 자연세계의 층위로 환원되거나 자연과학에서 설명되지 않는 마음, 문화, 가치, 논리 등의 층위들도 존재한다는 입장을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상학의 입장은 이러한 다원주의에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현상학의 입장에서 반드시 (3)-a가 도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3)-a를 아래와 같이 고친다면 도출이 성립할 수 있습니다. 현상학(특히 후설)의 입장에서 의식에 대한 탐구는 다른 모든 탐구를 정초하기 때문입니다.

(3)-a. 세계에 대한 탐구는 궁극적으로 의식에 대한 탐구로부터 독립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대상에 대한 가장 엄밀한 탐구는 의식에 대한 탐구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글쓴이께서 ‘절대성’이라는 말을 ‘모든 것이 그것을 통해 설명되고 그것으로 환원되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계시다면, 현상학의 입장에서 (3)-b, c는 도출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의 ‘절대성’이 ‘의식-독립성’과 다르다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현상학은 자연세계가 ‘절대적이라는’ 것에 반대할 뿐 의식-독립적이라는'것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현상학의 입장에서 (4)가 도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학문들처럼 자연과학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진리’입니다. 그것이 다른 모든 진리를 포괄하거나 다른 모든 진리의 원천이 아닐 뿐입니다.

2. 현상학이 의식-독립적인 세계를 거부한다고 말하는 문헌들도 꽤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의식-독립적 세계의 거부’라는 말은 불만족스럽게 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수 있습니다.

(1) 세계는 의식에 독립적이지 않다. 따라서 다양한 의식이 있는 만큼 다양한 세계가 있다.
(2) 세계에 대한 인식은 의식에 독립적이지 않다. 따라서 다양한 의식이 있는 만큼 다양한 세계 인식이 있다. (나아가 의식에 대한 탐구를 통해 세계 인식을 비판할 수 있고 더 엄밀하게 만들 수 있다. 즉 정초할 수 있다.)

저는 후설과 다른 현상학자들은 (2)를 주장했을 뿐 (1)을 진지하게 주장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물론 여기에는 해석상의 이슈가 있기는 합니다. 후설 등이 (1)에 가까운 견해를 가졌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거든요.

4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