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슨과 김재권의 근본적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박정희의 「사건에 관한 두 가지 견해」에 대한 비평적 독해

심리철학에서 사건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물리적 존재론의 내용이 달라진다. 사건은 두 가지 방식으로 파악될 수 있다.

(1) 개별자 물리주의(Token Physicalism) : 어떤 정신적 사건 아래에 포섭되는 사건은 물리적 사건 아래에도 포섭된다.
(2) 유형 물리주의(Type Physicalism) : 정신적 사건 유형과 물리적 사건 유형은 동일하다.

개별자 물리주의에 따르면 정신적 사건은 물리적 사건이다. 즉, 개별자의 차원에서 모든 정신적 사건은 물리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개별자 물리주의는 정신적 사건이 물리적 사건과 체계적으로 연결돼있다는 주장은 부정한다. 심적 사건은 물리적 사건이지만 이것은 법칙적으로 반복되거나 구조화돼있지 않다.

반면 유형 물리주의에 입각한 사건 이해는 사건을 어떤 대상이 어떤 시간에 어떤 속성을 예화하는 것으로 정식화한다. 통증을 느끼는 정신적 사건을 예로 들어보자. 통증을 느끼는 주체를 변항 x로 두고 고통을 느낀 시점을 t, 고통을 속성 P라고 해보자. x는 시점 t에 속성 P를 예화한다. 그리고 이는 x가 시점 t`에 물리적 속성 Q를 예화하는 사건과 동일하다. 이렇게 유형 물리주의는 정신적 사건이 구조적으로 물리적 사건과 동일하며, 곧 물리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데이비슨은 개별자 물리주의를 지지한다. 데이비슨은 사건과 기술, 인과문제에 있어 존재론적인 것과 언어적인 것을 나눈다. 사건은 시/공간 안에 위치를 차지하는 물리적인 개별자이다. 그리고 이는 일회적이고 외연적이라 사건은 술어로서만 존재할 뿐 객관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기에 속성이 개입하지 않는다. 속성의 문제는 기술의 차원에서 대두된다. 언어적으로 우리는 "나는 고통을 느꼈다"라고 할 수도 있고 "C-섬유가 뇌에 고통 신호를 보냈다"라고 기술할 수 있다. 이 둘은 사건의 차원, 외연의 차원에서는 동일하지만 기술의 차원에서 정신적 사건과 물리적 사건으로 나뉜다.

김재권은 데이비슨의 개별자 물리주의가 심적 사건의 인과적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존재론의 차원, 사건 자체의 차원에서 심적 속성은 인과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김재권은 개별적 사건을 실체, 실체가 예화하는 속성, 시간으로 구성된 복합체로 본다. 이를 속성 예화이론(Property-exemplication account)라 한다.

김재권은 사건을 [x, P, t]라는 기호로 대체하면서 사건이론에 대한 두 가지 기본 원리를 제시한다.

① 존재성 조건 : 사건 [x, P, t]는 실체 x가 시간 t에 속성 P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 존재한다.
② 동일성 조건 : 사건 [x, P, t]와 사건 [y, P, t]는 x=y, P=Q, t=t인 경우에 동일하다.

그런데 이렇게 할 경우 크산티페의 남편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크산티페가 과부가 된 사건은 동일하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시점을 제외하면 실체와 속성 둘 다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브루투스가 시저를 찌른 것과 브루투스가 시저를 죽인 것도 다른 사건이다. 왜냐하면 찌르는 것과 죽이는 것은 엄연히 다른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이 맞다면, 김재권의 속성 예화이론은 불필요한 존재자를 늘리는 이론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이에 김재권은 방어에 나선다. 먼저 소크라테스와 크산티페의 경우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크산티페의 과부됨은 공간적 속성, 구성적 속성에서 다르기 때문에 다른 사건이 맞다. 그리고 또 시저를 찌른 브루투스와 시저를 죽인 브루투스도 공간적 속성 등 다른 구성적 속성이 같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것이 예화하는 속성이 다르다는 점에서 다른 사건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결국 김재권에 따르면 구성적 속성이 전부 동일한 상위 사건이 있고 그 밑에 다양한 속성들을 예화하는 하부 사건들이 있다. 김재권은 구성적 속성을 변경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다양한 속성을 예화하는 모든 사건들은 실재하는 각각의 다양한 사건으로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외연적으로 개별적 사건은 단 한번, 반복되지 않기에 사건은 단일하며 그에 대한 상이한 기술만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이비슨과 달리 김재권은 사건의 구조를 나누고 구성적 속성이 같더라도 다를 수 있는 복수의 사건을 인정하는 것이다.

논문 저자는 데이비슨과 김재권의 근본적 차이가 "데이비슨은 사건에 관한 언어적 기술과 논리적 구조를 명백하게 구분하고자 했지만, 김재권은 사건자체의 구조를 파악하고자 했다. 나아가 데이비슨은 사건의 속성 동일성보다는 사건 자체의 동일성을 명확히 한다."(텍스트, 171)는 점에서 온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사건의 존재론적 관점에서는 데이비슨의 해명이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사건의 발생론적인 관점에서는 김재권의 속성 예화이론은 사건의 구조를 파악하는데 더 적합하다고 할 수 있겠다."(텍스트, 171)라며 평가를 한다.

그런데 이 평가에 대한 근거가 제시돼있지 않다. 아마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데이비슨은 사건의 언어적 기술과 사건의 논리적 구조를 철저히 구분해서 사건이 동일하면서도 다양하게 기술될 수 있는 존재론적 근거를 제시했고, 반면 김재권은 사건의 구조를 보다 철저히 분석해서 사건이 사건일 수 있는 조건을 보다 명확히 제시한 점이 좋았다라고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식의 평가는 이 둘 사이의 근본적인 논쟁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단순 감상에 불과하다.

김재권-데이비슨 논쟁의 핵심은 두 가지이다. (1) 데이비슨의 사건 존재론은 심적 사건의 인과성을 제시할 수 있는가? (2) 김재권의 속성 예화이론의 기반이 되는 속성이 유형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은 타당한가? 속성 예화이론은 사건의 차원에서 유형 동일론을 정식화하는 하나의 이론이다. 궁극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무법칙적 일원론과 유형동일론 중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의 문제이고 사건동일론, 사건존재론과 속성 예화이론은 그런 논쟁의 연장 선에서 평가돼야 한다.

최소한 논문 저자는 그런 부분을 짚고, 또 사건의 차원에서 두 이론 중 어느 쪽이 더 설명력이 높거나 논증이 타당한지에 대해서 평가를 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특히 데이비슨에 관한 논의를 할 때는 데이비슨의 이론이 정신 인과에 대한 부수현상론이라는 지적을 제대로 짚었으면서 정작 김재권의 이론에 근본적으로 의문시되는, "유형이 동일하다"는 문제를 해명하지 않은 채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에 대해 검증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이 전혀 다뤄지지 않았다. 김재권이 사건론을 다루면서 불필요한 존재자를 상정하게 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가 유형 동일론을 고수하기 위해 무리한 이론을 도입한 것이 아닌가 하는 최소한의 의문을 제기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룬 논문 출처 : 박정희. (2005). 사건에 관한 두 가지 견해. 철학논총, 41(3), 151-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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