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드는 것과 참이라고 믿는 것

특히나 근대 이전의 텍스트를 읽으면서 드는 생각인데, '오 이 생각 좀 마음에 든다!' 그리고 '오 이 생각이 맞는 것 같아!'라는 생각이 항상 동시에 들지만은 않는 것 같아서요...

이 세상을 진짜 잘 설명해주는 것 같은 건 언제나 제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고, 반대로 제 마음에 드는 건 반드시 세상을 제대로 설명해주는 것 같지는 않더라고요... 아주 거칠게 예를 들자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립에서 저는 플라톤의 생각이 되게 미학적으로(?)는 마음에 들지만 그걸 진짜로 믿게 되지는 않는 것 같고 반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게 진짜인 것 같으면서도 그게 제 마음을 설레게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이럴 때 선생님들은 어떤 태도를 갖게 되시나요...?
가령, 마음에 드는 걸 다듬어서 세상을 잘 설명할 수 있게 하고자 한다거나 거꾸로 세상을 잘 설명하는 걸 다듬어서 마음에 들게 한다거나...
근데 이럴 경우에 이도저도 아닌 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도 들기는 하네요...

여하튼 선생님들의 개인적인 경험이나 생각들이 궁금해서 여쭙게 되었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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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a. 마음에 드는 철학을 추구하는 것과 b. 세상을 잘 설명하는 이론을 추구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대립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제가 철학이라는 학문을 기존 이론을 반박하고 자신 주장을 펼치는 게임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 마음에 드는 철학은 니체인데, 니체를 어느정도 공박하며 탄생한 비판이론이 훨씬 더 세상을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저는 비판이론이 니체를 어느정도는 오독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만약 제가 니체에 대한 더 좋은 설명을 개발해내고(a), 바로 이것을 공박하는 것이 옳다며 비판이론에 반박하고, 또 비판이론이 반박에 대해 좋은 재반박을 제시한다면 비판이론의 타당성이 더욱 높아질 것입니다(b). 그렇다면 저는 마음에 드는 것을 잘 설명하면서도, 세상을 잘 설명하는 이론을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조금 재구성하는데 성공한게 아닐까 싶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는 철학을 일종의 대화(상호 비판)의 게임으로 받아들였을 경우에만 성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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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말씀하신 것을 비추어 보면,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플라톤을 어느정도 공박 및 재구성하여 탄생한 것으로 본다면 그 대립이 항상 있다고는 말할 수 없게 되겠군요. 어쩌면 제가 영향사적 측면을 간과한 것도 같습니다.
생각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오후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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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마음에 드는 이론'과 '맞는 것 같은 이론' 중에서 어느 한쪽만을 골라야 한다면, 저는 마음에 드는 이론을 정당화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편입니다. '맞는 것 같은 이론'이란 대개 기성의 이데올로기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이론이라고 생각해서요. 가령, 저는 현대인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과학주의, 자본주의, 개인주의, 염세주의, 냉소주의, 허무주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인 채 세계를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대개 이런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이론들이 우리에게는 '맞는 것 같아' 보이게 되죠. 그 이론들이 정말 정당화되었기 때문에 '맞는 것 같아' 보이는 게 아니라, 단지 사회가 암묵적으로 전제하는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니까 '맞는 것 같아' 보이는 거죠. 적어도, 저는 이렇게 맹목적으로 당연시되는 이데올로기들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이 철학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라고 봐요. 그래서 '맞는 것 같은 이론'이야말로 사실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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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답변이지만 전 마음에 드는것보다 맞는것 같은것을 선호합니다. 될수 있으면 이걸 구분하는것 같아요. 공부라는게 누군가의 생각을 수용하는게 아니라 검토하고 사유하고 결론짓는 과정이라고 알고있거든요. 물론 마음에 드는것이라도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공감하는 것이기에 어쩔수없이 따라가는 것도 분명 있긴합니다. 이럴때 참 괴롭습니다.

또 포퍼의 열린토론을 선호하는데 저역시 진리란 반박에 견딜수 있는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공박이 중요한것은 스스로 반론을 하며 맞는말을 추구한답시고 팩트폭행 운운하지만 자신에 대한 재반박을 외면하며 소위 프로파간다를 실현하는 자도 경계합니다. 스스로 마음에 드는것이 아닌 맞는말임을 내세우지만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닫힌채 결과적으로 마음에 드는 말만을 결론내리는 사이비를 몇몇 봐왔습니다. 그럴수록 더욱 정신차리고 내가 검토하고 파악하는것을 믿으려고 합니다.
플라톤을 그렇게 많이 알지못하지만 그가 이데아론에 대해 스스로 비판적인 관점도 얼마든지 수용하려 했다면 나는 그를 높이 평가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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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한번도 '맞는 것 같은 이론'이 왜 '맞는 것 같은'지에 대해서는 고민해보지 않았는데, 어쩌면 YOUN 선생님의 지적처럼 이미 체화된 기성 이데올로기에 무의식적으로 대입해보려는 마음의 습관에 의한 것일 수도 있겠네요! 또한 말씀해주신 폭로와 비판으로서의 철학함을 마음에 다시 한번 새겨보려 합니다. 생각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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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인 관점을 스스로 고려해보는 것을 전제할 때 '맞는 것 같은 것'을 선호한다는 말씀이 진리의 추구라는 대범한 목표를 가진 철학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드네요! 물론 저는 아직 미천한... 학부생이지만 지혜를 사랑하려는 한 사람으로서 말씀해주신 내용도 항상 염두에 두겠습니다. 생각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안온한 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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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언하자면 물론 현실적인 플라톤이라면 이데아란 절대진리를 믿지는 않을겁니다. 플라톤은 최종 진리 즉 이데아 진리 때문에 비판을 받지만, 포퍼에게 최종 진리란 없습니다. <현실화된 플라톤>도 자기 진리만 주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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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생각나네요.
역시 균형을 잡는게 중요한게 아닌가 싶어요.
마음에 맞는것을 추구하되 휩쓸려버리지는 않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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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사이의 균형이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잘 새기겠습니다.
따뜻한 저녁 되세요:)

Strawson의 기술적 형이상학과 수정주의적 형이상학의 구분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이 구분에 따르면 기술적 형이상학은 세계의 구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기술하는 데 만족하고, 수정주의적 형이상학은 '더 나은' 구조를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스트로슨은 아리스토텔레스와 칸트를 전자로,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바클리를 후자로 칩니다. 물론 누구를 어떻게 볼지는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죠.

흥미로운 점은, 스트로슨은 수정주의 형이상학이 기술적 형이상학에 봉사한다고 주장합니다. 즉 플라톤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신화와 신비적 요소가 가득한 이론을 세우고 나면,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체계화하는 식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기술적 접근을 선호합니다만 말씀하신 것처럼 '설레는' 요소는 다소 떨어집니다. 하지만 이것도 얼핏 보기에만 그런 것 같고, 오히려 첫눈에 설레는 철학들은 저는 개인적으로 경계합니다. 제가 보기에 수정주의적 철학자들은 지식 자체보다는 어떤 교훈(대개 도덕적인 또는 종교적인)을 얻어내는 데 더 관심이 있고 그러한 관심에 따라 세계상을 그려내는 걸로 보입니다.

제 경험상 기술적 접근의 장점은, 여러 철학 체계에 흐르는 공통분모를 파악하는 데 용이하다는 겁니다(가령 범주의 문제 : Categories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반면 수정주의 접근은 해당 철학자의 '독특한' 관점을 강조하기 때문에 각자의 차별성이 중요시 되고, 한 명을 숙지한다고 해서 반드시 철학 일반의 문제를 익히게 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또한 철학사에 대한 시각도 해당 철학자의 시각에 따라 다소 일방적이 될 수 있다는 부작용이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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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확인했네요!

말씀해주신 Strawson의 구분은 정말 흥미롭네요.. 참고해서 공부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편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