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 공부 방법에 대한 질문

안녕하세요:) 철학 석사 진학을 희망하고 있는 학부생인데요, 새벽에 철학 관련하여 이것저것 검색하고 읽다가 흘러흘러 들어와 가입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민망해서 숨겨두었던 질문을 익명의 힘을 빌려 해보려 합니다ㅎㅎ
아직 석사 때 연구하고 싶은 분야를 하나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철학사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도 졸업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철학사 연구를 하려면 대체 얼마나 많은 1차 문헌을 알아야 하는 것이지??? 라는 아주 유치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철학사 공부를 하고 계신 분들은 관심을 두고 계신 학자의 문헌을 얼마나 아시는 건가요? 처음엔 단순하게 다 아시겠지~ 했는데 헤겔 등을 떠올려 보면 불가능해 보이기도 합니다. (<헤겔의 '진짜' 예술관에 신경쓸 필요가 있나?를 번역한 자료와 댓글들도 조금 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논문 출판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1차문헌을 알게 되시는 경우도 있는 것 같구요...
그래서 궁금합니다. 공부를 대체 얼마나 하시는 건가요??ㅎㅎㅎㅠㅠ 또는, 이 분야에 입문(?)하려면 얼마나 공부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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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자가 아니라 조언을 드릴 자격은 없지만 옛날에 봤던 글이 하나 생각나서 공유합니다. history of philosophy without any gaps시리즈의 저자이자 동명의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철학사가인 피터 애덤슨(Peter Adamson)의 글을 어떤 분이 일부 번역하신 건데 흥미가 있으실 것 같아요.

원문은 여기! 댓글도 보면 좋을 것 같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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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연구 방향과 관심사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아주 거칠게 분류하면 과거 철학자들을 연구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a) 한쪽에는 고전학에 가까운 학풍이 있죠. 고대 문헌 비평본을 만든다거나 이제는 많이 달라진 의미에서 당대의 의미를 추론하거나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b) 다른 한쪽에는 재해석이 있습니다. 오늘날 활발히 논의되는 현대 철학의 프리즘으로 문헌을 보는 것이죠. 예컨대 과거 철학자의 주장을 현대 철학에 비추어 좀 더 정합적으로 만든다거나, 비교해본다거나 그런 작업이 있습니다.

(2)

대체로 (a) 학풍을 추구하시는 분들의 공부량이 무지막지합니다. 철학사 중에서 "사"에 초점이 있다보니 사학과처럼 읽으시더라고요.

그래도 본인들이 정한 스코프 내에서 관심사에 따라 조금씩 이동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handak 님이 데카르트 관련해서 올리셨던 걸 상기하면서 말해보면 이렇습니다.
누구는 데카르트 저서 한 개만 볼수도, 누군 데카르트 저서 전체를 통해 데카르트의 철학 전체를 할 수도 있겠죠. 나아가 누구는 데카르트와 당대 철학자들의 논쟁을 비교하거나 과거 무슨 철학자들이 영향을 주었는지 후대 무슨 철학자들이 영향을 받았는지 말할 수도 있겠죠.
이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랍철학이나 유대철학, 후대에 나온 독일관념론으로 가기도 하겠죠.

(3)

아무래도 모든 것을 읽고 안다는 것은 이상적이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라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기본적으로 연구자도 사람이다보니 이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되, 자신이 흥미로운 길을 따라 조금씩 움직이시면 될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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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얼마나 해야 하는지'도 매우 중요하지만,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더욱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1차 문헌 조사를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 문헌으로부터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쟁점이 무엇인지가 곧바로 도출되는 것은 아니라서요.

가령, 저는 이번 학기 대학원 수업을 들으면서 데카르트에 대한 '표상주의적 해석'과 '직접적 실재론적 해석' 사이의 논쟁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어요. 데카르트의 철학이 일종의 표상주의라는 것이 정통적인 해석이지만, 그 주장에 반대해서 데카르트를 직접적 실재론자로 읽어야 한다는 반론을 제기하는 연구자들도 있는 거죠.

그런데 연구자들 사이에서 데카르트 해석을 둘러싸고서 이런 논쟁이 벌어진다는 사실은 데카르트의 텍스트만 읽어서는 결코 알 수가 없어요. 오히려 관련 연구 논문들을 읽은 다음에 데카르트 텍스트를 다시 볼 때에야 '이 부분에서 이런 해석적 문제가 제기되는구나!'하고 알 수 있죠.

이건 '해석'이라는 활동이 단순히 텍스트에 쓰인 내용을 있는 그대로 읽어내기만 하면 되는 활동이 아니라서 발생하는 현상이에요. 데카르트의 텍스트에서 어느 부분이 중요하고 어느 부분이 중요하지 않은지, 어느 구절에서 해석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열려 있고 어느 부분에서 상대적으로 닫혀 있는지 등은 연구자의 관점이 깊게 개입하는 문제거든요. 그래서 '연구사'를 살펴보지 않고서는 텍스트만으로 결코 이런 문제들을 알 수 없는 거죠.

저는 바로 이 점에서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의 차이가 나누어진다고 생각해요. 사실, 1차 문헌을 직접 읽는 작업 자체는 그다지 어렵지 않을 수도 있어요. 자잘한 서지 정보나 배경사적 지식을 암기하는 것도 연구에 있어서 핵심은 아닐 때가 많아요. 정말 어려운 건, 텍스트를 둘러싼 연구사적 논쟁을 파악하고 정리해서 그 논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는 일이에요. 이 작업은 단순히 정보량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거든요. 많은 정보 중에서 유의미한 것들을 선별하여 재구성하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 거죠.

대학원에서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철학사를 공부하려 하시더라도, 철학 텍스트 해석과 관련된 연구사적 논쟁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공부가 방향을 잃기 쉽다는 점을 유의하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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