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테일러, 『윤리학의 기본 원리』, 「공리주의」

0.

공리주의란 사실에 대한 지식과 더불어 도덕적 표준과 행위의 규칙이 체계적으로 짜인 집합을 뜻하는 규범윤리적 체계의 일종이다. 이 규범윤리적 체계는 공리주의와 형식주의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목적론적이며, 행동의 옳고 그름을 그 행동이 갖는 결과의 유용성에 기초해 판단한다. 반면 후자는 의무론적이며, 행동의 옳고 그름을 어떠한 도덕규칙에 따랐는지의 여부에 기초해 판단한다.

(물론, 의무론적 도덕규칙에 의해 요구되거나 또는 금지되는 행동의 종류를 확인하는 데 행동의 결과 자체는 밀접히 관련될 수 있다. 그리고 공리주의와 의무론 중 하나의 체계에만 의거하는 경우를 일원론적 윤리체계라고 부르고, 상황에 맞추어 상대적 중요성을 저울질하여 체계를 선택하는 경우를 윤리적 다원론이라고 한다.)

1.

공리주의는 두 기준을 두고 구별 가능하다. 첫째 기준은 <무엇에 대해 좋은가>이고, 둘째는 <유용성이라는 척도를 어디에 적용할 것인가>이다.


2.

첫째, 공리주의는 '무엇에 대해 좋은가'를 기준으로 세부적으로 나누어진다. 이는 행위의 결과가 '어떤 목적에 유용한가' 혹은 '어떤 본래적 가치에 좋은가'를 따지는 것인 바, 본래적 가치의 표준을 기준으로 분화하는 셈이다. 본래적 가치의 표준으로 벤담이 쾌락을, 밀이 행복을, 무어가 쾌락과 행복 그 어느 것에 의해서도 정의될 수 없는 독특한 무엇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공리주의는 쾌락주의적 공리주의, 행복주의적 공리주의, 이상적 공리주의로 나누어진다.

그럼에도 모든 공리주의가 지키는 원리는 존재한다. 그것이 무엇이 됐든, 행동의 결과를 판단할 가치의 표준은 적용될 때 반드시 공평하고 본편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공평성의 원리'이다. 이 원리에 따라 각 개인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주어진 선택지에 뒤따르는 결과를 계산하고, 최고의 유용성을 산출하는 선택지를 택한다. 그러니 공리주의에 따르는 개인에게는 어떠한 행위도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그르지 않다.


3.

둘째, 공리주의는 유용성이라는 척도를 적용할 때 '개별적 행위에 직접 적용할 것이냐' 혹은 '행위의 규칙에만 제한적으로 적용시켜서 행위규칙으로 하여금 개별적 행위의 옳고 그름을 결정할 것이냐'를 기준으로도 나누어진다. 전자를 행위공리주의, 후자가 규칙공리주의다. 구체적으로 말해, 행위공리주의에서 옳은 행위는 어떤 가능한 행위보다 더 큰 유용성을 산출하는 행위로 정의된다. 그러니 여기서 유용성의 원리는 개별적 행위의 옳음을 결정하기 위해 개별적 행위에 직접 적용되는 셈이다. 반면, 규칙공리주의에서 옳은 행위는 타당한 행위 규칙에 일치하는 행위로 정의되고, 바로 이 행위 규칙의 타당성이 유용성의 원리에 입각한다.

(물론 행위공리주의자들이 규칙을 일체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 매 순간 모든 선택지를 합리적으로 고려할 수는 없으니 일반적인 행동규칙에 따른다. 그러니 이때의 규칙이란 과거에 대체로 최대의 유용성을 산출한 것으로 알려진 행동을 귀납적으로 일반화하거나 또는 통계적으로 확률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규칙공리주의자들이 말하는 규칙과 상이한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규칙공리주의자들이 말하는 규칙이란 일반적으로 그것을 따를 때가 다른 어떤 규칙을 따를 경우보다 모든 사람에게 더 많은 본래적 가치를 일으키는 규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행위공리주의와 규칙공리주의는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행위공리주의에 의하면 옳고 규칙공리주의에 의하면 그른 그러한 개별적 행위가, 또 그 역도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문제를 정식화하자면 다음과 같다. <'개인이 개별적 행위를 하는 것의 유용성'과 '사회가 모든 사람이 어떤 종류의 행동을 하거나 또는 하지 말도록 요구하는 일련의 일반적 규칙을 갖는 것의 유용성'은 매우 다르다> 그러니 두 대립은 <유용성이란 개별적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한 적절한 척도인가 아니면 사회가 어떠한 사회적 관습과 제도를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적절한 척도인가?>에 관련된 문제이다.

몇몇 학자들은 행위공리주의자들은 옳다고 여기지만 규칙공리주의자들은 그르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도, 사실 뜯어보면 후자도 옳다고 여길 것이라 주장한다. 이는 규칙공리주의자들이 보기에 일견 그른 행위가, 달리 말해 도덕규칙을 위반한 어떤 행위가, 정당한 예외로 여겨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각각의 행위가 어떤 도덕규칙의 정당한 예외가 될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①해당 행위는 사실 더 높은, 더 상위의 도덕규칙에 따른다. ②규칙에 따르지 않은 해당 행위가 갖는 유용성이 규칙을 준수했을 때보다 크다. 이를 정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①고차적 도덕규칙에 의거하여 하나의 일차적 규칙이 다른 것보다 더 큰 의무를 우리에게 부과한다. ②만약 모든 사람이 그 원리를 따르는 결과가 모든 사람이 어떤 다른 가능한 원리를 따르는 결과보다 더 낫다면 그것은 타당한 도덕원리이다.

(첫째의 예시는 유대인이 어디있냐고 밝히라는 독일의 비밀경찰에게 거짓말을 하여 '진실을 말하라'라는 도덕규칙이 아니라 '죄 없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라'라는 상위의 도덕규칙에 따르는 경우이다. 둘째의 예시는 우리는 '도둑질을 하지마라'라는 도덕규칙에 따라야만 하지만 내 가족을 굶겨 죽이는 해악이 백만장자에겐 쥐꼬리만한 돈을 훔치는 것보다 덜 나쁘기 때문에 훔치는 것이 옳은 경우이다.)

(그럼에도 행위공리주의와 규칙공리주의가 대립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쪽도 있다. 이들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예시는 '운전수가 경찰관에게 속도위반 딱지를 떼지 말도록 뇌물을 주는 경우'와 '한 교사가 고의적으로 학생으로 하여금 부정행위를 하도록 하고도 이를 그냥 덮어두는 경우'이다.)


4.

공리주의가 어떤 형태를 취하건 간에, 그와 상관없이 공리주의를 규범윤리학의 체계로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에 따르면 공리주의는 정의의 의무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정의의 개념은 기본적인 도덕개념이기에 정의의 의무에 대한 기초를 제공하지 않는 공리주의는 거부돼야 한다. 이들이 '공리주의는 정의의 의무에 대한 충분한 근거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공리주의에 따를 경우, 어떤 사람들을 차별 대우하는 행동이나 규칙이 옹호 가능하다. 즉, 공리주의에 따르면 전체의 본래적 가치(ex. 행복)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회의 총순수대차 혹은 순유용성(=행복-불행)을 늘려야 하는데, 이에 관한 제한이 없다. 그리하여 어떠한 개인도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한 단순한 도구나 수단이 될 수 없음을 요구하는 정의의 개념과 공리주의는 대립한다.

이에 대해 공리주의 옹호자들은 우리가 세계에 대한 빈틈없는 관찰과 인간 본성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 수준이 높아지면, 부정의가 정의보다 장기적으로는 더 큰 유용성을 갖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되기 때문에, 공리주의와 정의가 대립된다는 자들의 주장은 틀렸다. 즉, 공리주의(자)들은 유용성을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의가 부정의보다 훨씬 유용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므로, 대립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주장을 결국엔 반박하게 된다.

이보다 더 강력한 반박도 있다. 공리주의 옹호자들 중 일부는 '정의의 규칙을 포함해서 도덕의 전체적인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좋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라고 말한다. 그들에 따르면 정의의 규칙을 포함하여 도덕 규칙들은 개인의 행동을 제한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①이때 그 규칙을 시행해서 나올 결과의 좋음이 이러한 제한들의 본래적인 나쁨을 능가해야만 하고, ②도덕 규칙은 목적 자체로서 좋은 것이 아니라 단지 문화를 가능케 하는 사회생활의 조건을 실현시키기 위해 필요한 수단으로서만 좋은 것이기에 사회적 기능에 있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는 한 정당화된다. 쉽게 말해, 합리적인 인간들이 취하는 도덕이라는 것 자체가 애초에 유용성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공리주의에 입각했을 때에만 도덕에 따른 제한에 좋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만약 도덕규칙에 의해 인간의 행위에 주어지는 제약이 그것이 없을 경우보다 더 큰 행복이나 쾌락을 산출하는 것으로 입증되지 않는다면 정당화될 수 없다. 반면, 한 사회가 유용성을 그 사회의 기본적 도덕원리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비합리적이다.


출처: 폴 테일러 2018, pp. 91-126.

※볼드체는 본 글 필자의 강조 처리.

4개의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