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와 긍정심리학: 크리스찬 크리스찬슨, 「갈등, 실천적 지혜, 덕」 요약

1. 긍정심리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반복적인 비판

(1) 피터슨과 셀리그먼 같은 긍정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지닌 보편적 덕과 성품 감정의 종류를 분류하고자 하는 VIA(Value-in-Action)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그들의 분류법은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내려온 철학적 전통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피터슨과 셀리그먼의 분류법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practical wisdom)’ 혹은 ‘프로네시스(phronesis)’에 해당하는 덕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VIA 프로젝트의 지지자들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 사이의 논쟁은 주로 이 실천적 지혜를 둘러싸고서 벌어진다.

(2) 크리스찬슨은 실천적 지혜의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가 VIA 프로젝트에 제기하는 다른 네 가지 우려를 소개한다. (a) VIA 프로젝트의 분류법은 ‘자존감’, ‘정당한 분노’, ‘다른 사람의 자격 없는 행운에 대한 분개’, ‘자부심’, ‘수치심’, ‘경쟁심’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덕목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다. (b) VIA 프로젝트의 분류법에 등장하는 ‘초월’이라는 덕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덕 구조와는 잘 맞지 않는다. (c) 긍정심리학은 ‘자기 조절’이나 ‘자기 통제’를 덕의 강점이나 적용으로 보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덕’과 ‘자기 통제’를 구별한다. (d) 긍정심리학은 ‘잘못되고, 사악하고, 부정확하고, 심지어 반사회적인 사람’도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악한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3) 그러나 긍정심리학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비판적 반성(critical reflection)’ 혹은 ‘반성적 통일(reflective unity)’에서 발견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충분하게 덕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 ‘숙고(deliberation)’를 통해 우리 자신의 행동이 어떠한 덕을 따라야 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긍정심리학자는 이와 같은 반성이나 심의의 요소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한다. 덕에 대해 비판적 심의나 평가를 내리는 일이 과학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넘어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긍정심리학자는 전체적으로 유덕한 삶으로 간주되는 것에 관해 모든 것을 고려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엄격하게 거부[한다.] […] 일반적으로 긍정심리학자는 우선순위라는 가장 중요한 원리에 의해 안내되는 유덕한 일치를 유덕한 행위자에게 요구할 때 과학자로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고 생각한다.”(Kristjánsson, 2013: 154/2019: 268-269)


크리스찬 크리스찬슨, 『긍정심리학의 강점과 약점』

(4) 따라서 긍정심리학은 한 덕과 다른 덕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문제를 중재시켜 줄 ‘도덕적 통합자(moral integrator)’를 어떻게 발견해야 하는지에 대해 해명하지 못한다. 즉, 서로 다른 덕들을 어떻게 조화롭게 발전시켜야 전인성을 성취할 수 있는지에 대해 대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긍정심리학자는 다른 강점을 희생해서라도 ‘대표 강점(signature strength)’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한두 강점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좋은 성품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긍정심리학에서는 너무나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찬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그래서 피터슨과 셀리그먼(2004: 13)은 누군가가 덕 목록 가운데 하나 혹은 두 개의 강점을 드러낸다면, 그 사람은 좋은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편안하게 말한다. 이 이론에서 빠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도덕적 통합자(moral integrator), 즉 도덕적 정당화의 소재와 목적지이다. 한 덕이 다른 덕과 충돌하는 문제 또는 더 큰 적절성에 대해서는 관심이 주어지지 않는다. 긍정심리학자는 상이한 특징이 조화로운 삶과 어울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도덕적인 중재도 없고, 전인(whole person)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도 않다. (Kristjánsson, 2013: 154/2019: 269)

(5) 긍정심리학자는 이와 같은 비판에 대해 VIA 프로젝트의 분류법에도 비판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지혜’나 ‘지식’이라는 덕이 포함되어 있다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긍정심리학에서 지혜는 단지 여러 가지 덕들 중 하나로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문제는 그 여러 가지 지혜들을 중재시켜 줄 정당성의 기준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려의 핵심은 행위자가 그렇게 선택하는 경우 안내하는 데 요구되는 많은 것 가운데 하나의 덕의 부재에 대한 애도가 아니라 오히려 경쟁하는 덕을 본질적으로 감독하고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와 같은 통합적인 주덕(master virtue), 도덕적 통합자 또는 중재자의 부재에 관한 애도이다.”(Kristjánsson, 2013: 155/2019: 270)

(6) 크리스찬슨은 긍정심리학이 도덕적 평가(evaluation)과 도덕적 처방(prescription)을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으로, 긍정심리학은 도덕 상대주의를 반박하고, 도덕적 자연주의를 지지하고, 웰빙에 대한 객관적이며 자기실현적 이해를 성취하기 위하여 단순한 경험주의를 넘어서고자 한다. 다른 한편으로, 긍정심리학은 자신의 논의가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 사람들에게 도덕적 처방을 내리는 활동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덕에 대한 어떠한 평가도 내리지 않고자 한다. 그러나 덕에 대한 평가가 반드시 도덕에 대한 처방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긍정심리학의 염려는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 “덕의 균형과 교섭에 대해 평가적인 도덕 판단을 내리는 것은 […] 도덕적 처방을 내리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아래로 떨어질 미끄러운 경사길이 없다. 우리는 도덕적 처방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비규범적이면서도, 경험에 근거한 평가적 판단을 내린다는 점에서는 규범적일 수 있다.”(Kristjánsson, 2013: 155/2019: 271)

(7) 긍정심리학자가 주덕에 대해 논의하기를 꺼려하는 다른 이유로는 문화와 개인마다 무엇이 주덕인지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는 점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태도는 ‘주덕’이라는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주덕으로서 실천적 지혜란 여러 가지 ‘도덕적(moral)’ 덕들 중에서 가장 우월한 덕이 아니다. 오히려 실천적 지혜란 그 덕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중재하는 ‘지성적(intellectual)’ 덕이다. “긍정심리학자를 비난하는 이론가는 도덕적 덕과 성품 강점,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목표를 올바르게 만드는’ 성품의 상태들 중에서의 위계적 우선성에 대해 요구하는 것 아니다. 오히려 다른 종류의 중재자, 즉 목표를 증진하는 것을 올바르게 만드는 지성적이며 실천적인 덕을 요구하는 것이다.”(Kristjánsson, 2013: 156/2019:271-272)

(8) 크리스찬슨은 덕들을 중재하고 평가하기 위한 기준으로서 주덕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긍정심리학자에게 납득시키고자 한다. 덕 이론이 주덕에 대한 논의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계속되는 논의 사항은 긍정심리학자에게 그러한 주덕에 대한 요구가 자연스럽고 그럴듯한 덕 이론에 적합한 것임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덕 윤리학, 철학, 사회과학의 어떤 형태도 주덕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으며(Russell, 2009: 3), 또한 주덕을 요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덜 급진적이고 덜 힘겨운 것이다.”(Kristjánsson, 2013: 156/2019: 272)

2.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실천적 지혜

(1)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에서 ‘실천적 지혜’란 서로 다른 성향, 가치, 중요성 등을 비판적으로 비교하여 에우다이모니아를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하는 능력이다. 즉, 실천적 지혜는 삶의 제한된 영역과 일반적 영역에서 숙고를 가능하게 한다. “실천적 지혜의 기능은 경쟁적인 가치의 상대성, 중요성, 행동 방안, 정서를 인간의 궁극적인 선이자 목적인 에우다이모니아와 비교하는 것이다. 실천적 지혜는 어떤 제한된 영역에서 좋은 것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잘 사는 것을 촉진하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가 정교하게 숙고할 수 있도록 해 준다.”(Kristjánsson, 2013: 156/2019: 272)

(2) 크리스찬슨은 도덕적 판단 없이 덕 윤리학 체계를 세우고자 하는 입장에 반대하여 실천적 지혜가 덕에 대한 논의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덕과 실천적 지혜가 분리될 수 없는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로, 실천적 지혜가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덕이 성립할 수조차 없다. 가령, 다른 사람을 돕기를 원하면서도 어떠한 상황에서 어떻게 도움을 제공하는 것이 적절한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이러한 사람은 ‘동정심이 있지만 서투른’ 사람이라기보다는 ‘적절한 덕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라고 흔히 여겨진다. 도덕적 덕이 있다는 것이란 적절한 목표와 함께 적절한 수단을 알고 있는 상태로 주어진 상황에서 실제로 좋은 선택을 내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우리는 실천적 지혜 없이는 완전히 선할 수 없고, 성품의 덕이 없이는 실천적 지혜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Kristjánsson, 2013: 157/2019: 273-274)

둘째로, 실천적 지혜가 없으면 우리는 갈등하는 덕들 사이에서 에우다이모니아에 도달할 방법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이러한 경우 에우다이모니아 자체가 이루지 못할 공허한 목표가 되어버리고 만다. “서로 다른 덕의 경쟁적인 요구 사이에서 우리가 판결할 수 있는 일반적인 실천적 지혜를 갖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끊임없는 이질성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며 끝장나게 될 것이다.”(Kristjánsson, 2013: 157/2019: 274)

(3) 실천적 지혜는 덕의 통일성 논제와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 덕이 본질에서 통일되어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은 실천적 지혜가 서로 다른 덕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통일성 논제에 대한 더욱 합당한 이해는 덕을 감독하고, 갈등 시나리오에서 각 덕의 상대적인 무게를 판결할 때 실천적 지혜가 수행하는 조정 역할에 근거하는 것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의 상태인 실천적 지혜가 있을 때 우리는 모든 덕을 소유한다는 식으로 덕의 통일성에 대해 말한다.”(Kristjánsson, 2013: 158/2019: 275)

(4) 실천적 지혜의 작용은 이질적인 문화의 통합을 통해 창조되는 ‘시너지 정체성(synergic identity)’에 비유될 수 있다. 두 문화가 진정으로 통합되는 상황에서 형성되는 정체성이란 그 문화들 중 어느 한쪽으로도 환원되지 않는다. “그들[서로 다른 문화들]은 이중적인 배경을 장애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경험을 파악할 수 있는 독특한 해석 도구의 원천으로 간주한다.”(Kristjánsson, 2013: 158/2019: 275) 실천적 지혜는 갈등하는 덕들 사이의 바로 이와 같은 조화를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실천적 지혜를 가진 사람은 (허스트하우스가 주장한 것처럼) 세속에 만연한 갈등에 현명하게 적응하는 사람이자 (슈워츠가 샤프가 주장한 것처럼) 일종의 ‘도덕적 재즈’를 연주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5) 크리스찬슨은 자신이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에서 ‘일반주의자(generalist)’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일반주의자는 덕들 사이의 갈등을 조절하는 최선의 해결책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다. 특별히, 그는 최선의 해결책이 언제나 명확한 형태로 법전화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법전화 자체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해 이러한 일반주의자의 해석에 따르면, 윤리학의 궁극 목적인 인간 번영의 본질에 관해 완전히 이해한다면, 원칙적으로 모순되는 요구를 하나의 척도로 비교하고 최선의 해결책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Kristjánsson, 2013: 159/2019: 277) 그러나 ‘특수주의자(particularist)’는 최선의 해결책에 대한 법전화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들은 직관적 수완 이외에는 도덕적 문제에 통용되는 일반적 법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특수주의자는 상황의 요구에 대처할 때 일반적이고 상황 독립적인 도덕적 진리에 대한 어떤 호소도 거부하면서 유덕한 행위자의 직관적인 수완에 의존한다. […] 그들은 상이한 덕의 요구 사항을 통약 불가능한 가치 그리고 본질적으로 법전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Kristjánsson, 2013: 158/2019: 277)

(6) 크리스찬슨은 긍정심리학의 덕 이론을 비판하는 것만큼이나 특수주의적 해석의 한계 역시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특수주의적 해석이 우리의 행동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점을 그 해석의 이론적 결함이라고 평가한다. 오히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일종의 ‘체계화주의자(systemiser)’로서 인간의 번영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고자 하였고, 도덕적 덕의 통약 불가능성을 거부하였으며, 도덕적 딜레마에 대답하고자 하였다고 해석한다. “[…] 그[아리스토텔레스]는 어려운 도덕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방법에 관해 조언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으며, 도덕적 덕은 통약 불가능하거나 또는 동 등한 것이라는 논제를 거부하면서 오히려 도덕적 덕은 타인을 가장 이롭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완고한 체계화주의자이고, 전반적인 도덕적 덕을 사랑하는 사람이다.”(Kristjánsson, 2013: 160/2019: 278)

3. 정서적 양면성이 지닌 특별한 문제

(1)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은 정서에 대해서도 다룬다. 어떠한 행위를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지뿐만 아니라 어떠한 정서를 느끼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지도 덕 이론이 대답하고자 하는 중요한 사안이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덕 윤리학은 단순히 행동하는 것에만 국한 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정서에 관한 것이다. 실제로 덕 윤리학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어떤 경우에는 올바른 것을 느끼는 것이 덕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주장이다.”(Kristjánsson, 2013: 160/2019: 279)

(2) 정서와 관련한 중요한 고민거리 중 하나가 바로 잠재적으로 유덕한 두 가지 정서의 갈등 상황에서 발생하는 ‘정서적 양면성(emotional ambivalence)’이다. 가령, 나와 내 친구가 같은 직장에 입사 지원 서류를 넣었다고 하자. 또한 내가 친구보다 그 직업에 더 적합한데도 나는 입사에 실패하고 친구는 성공하였다고 하자. 이때, 내가 친구의 성공을 기뻐해야 하는지 친구의 성공이 부당하다고 느껴야 하는지를 둘러싼 도덕적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문제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이 어떻게 대답할 것인지 질문해 볼 수 있다. “이 절에서는 정서적 양면성이 지닌 도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덕 윤리학의 역량을 탐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덕 윤리학이 이 역량을 갖추고 있다면 긍정심리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명백한 교훈을 끌어내야 할 또 다른 이유로 여겨질 것이다.”(Kristjánsson, 2013: 161/2019: 280)

(3) 크리스찬슨은 정서적 양면성의 문제가 올바른 행위의 문제보다 크게 세 가지 이유에서 더욱 심각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첫째로, 상충하는 덕들 중 우리가 무엇을 따라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규범이나 관습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도 있고 적절한 행동을 선택하기 위한 충분한 고민 시간도 가질 수 있는 반면, 상충하는 정서들 중 우리가 무엇을 느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규범이나 관습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할뿐더러 충분한 고민 시간을 가질 수가 없다. 둘째로, 정서는 행동보다 개인의 본질적 성품이나 자기화와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경험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 셋째로, 덕 윤리학은 정서가 도덕에서 지니는 의의를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은 만큼 정서적 양면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4) 크리스찬슨은 몇 가지 가정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덕 윤리학이 정서적 양면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검토한다. 우선, 우리가 겪는 감정들이 모두 합리적일 수 있다는 가정

(a) “동일한 상황에서 두 개의 상충하고 경쟁적인 정서가 도덕적으로 적절한 것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합리적으로 보장될 수 있다.”(Kristjánsson, 2013: 162/2019: 282)

를 고려하자. 아리스토텔레스주의 덕 윤리학은 이러한 가정과 결합하기 어려워 보이는 일련의 다른 가정들을 제시한다. 즉, 그 가정들이란

(b) “우리는 일단 발생하는 정서를 경험하는 데 관련된 정서적 성향이 확립되면, 발생하는 정서의 경험을 통제할 수 없다.”
(c) “발생한 정서는 적어도 미약하게 동기 부여적인 것이다.”
(d) “각각의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느껴야 할 도덕적으로 최적의 방법이 있고, 도덕적으로 유덕한 사람은 그러한 방식으로 느끼도록 동기화 되어 있다.”
(e) “단순한 자제력을 지닌 사람이나 또는 자제력이 없는 사람과는 달리, 유덕한 사람은 동기부여에서 통일되어 있다.”
(f) “자제력이 있는 사람과 달리 유덕한 사람은 최적이 아닌 자신의 정서를 억압할 필요가 없다.”

(Kristjánsson, 2013: 162/2019: 282-283)

이다. (a)~(f)라는 가정들의 결합은 ‘사라진 동기 부여의 신비(The Mystery of the Missing Motivation)’를 발생시킨다. 가령, 유덕한 사람이 느껴야 하는 최적의 정서는 친구의 성공에 대한 기쁨이다. 그러나 그는 실망감 역시 느끼도록 미약하게나마 동기 부여를 받는다. 문제는 그가 반드시 실망감을 억누르지 않고서도 최적의 정서를 느낄 수 있는 아주 신비로운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 덕 윤리학이 주장한다는 점이다. 크리스찬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비록 (a)에서처럼 행복과 실망 모두 거기에서 합리적으로 보장되지만, 도덕적으로 느껴야 할 최적의 방식은 (d)에서처럼 친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가설 (d)에 따르면, 유덕한 사람은 그런 식으로 느끼도록 동기화 된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합리적인 삶의 계획이 부당하게 좌절되었을 때 실망감을 느끼는 유덕한 성향도 갖고 있다. (b)에 따르면, 그 사람은 그런 정서를 느끼지 않을 수 없고, (c)에서처럼 그 정서는 적어도 미약하게 동기 부여적인 것이다. 그런데도, (e)에서처럼 동기 부여가 통합되어 있으므로 유덕한 사람은 (f)에서처럼 최적이 아닌 취약한 동기 부여를 억누를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신비는 이것이다. 최적이 아닌 동기 부여에 어떤 일이 생기는가? (Kristjánsson, 2013: 163/2019: 283)

(5) 이러한 신비를 해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이 이루어졌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덕 윤리학에 대한 최근의 많은 기여가 그 신비를 풀기 위해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Kristjánsson, 2013: 163/2019: 284) 크리스찬슨은 그 중 두 가지 사례로 스타크와 카아의 해석을 제시한다.

스타크는 동기 외재주의를 지지하면서 (c)라는 가정을 거부한다. 즉, 그에 따르면, 모든 발생하는 정서가 그 자체로 우리에게 그렇게 느껴야만 하는 동기적 이유를 주는 것은 아니다. 유덕한 사람은 규범적 이유만을 따른다. “스타크의 제안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위하여 동기 내재주의를 거부하고, 유덕한 행위자의 경우에는 규범적인 이유에서 나오는 도덕적 평가로서 정서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이 본래적으로 동기적인 힘을 가진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다.”(Kristjánsson, 2013: 163/2019: 284) 따라서 규범적 이유에 의해서만 동기가 부여된 ‘유덕한 사람’과 상충하는 두 가지 정서 각각에 의해서 동기가 부여된 ‘자제력 있는 사람’은 서로 구분된다. 유덕한 사람은 규범에서 나오는 한 가지 동기만을 따르기 때문에 갈등을 겪지 않는 반면, 자제력 있는 사람은 상충하는 정서에서 나오는 두 가지 분리된 동기를 따르기 때문에 그 중 한 가지를 억압해야 하는 갈등을 겪는다.

카아는 스타크의 해석이 ‘유덕한 사람’, ‘자제력 있는 사람’, ‘자제력 없는 사람’을 혼동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그에 따르면, 규범적 이유만을 따르기 위해 동기적 이유를 침묵시키는 행위자는 ‘유덕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자제력 있는 사람’이다. 또한 두 가지 분리된 동기 사이에서 갈등하는 행위자는 ‘자제력 있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자제력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스타크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e)라는 가정을 문제 삼아 유덕한 사람이 지닌 통일성이 사실 매우 복잡하다고 주장한다. “카아는 유덕한 사람의 동기 부여적인 통일성에 관한 가정 (e)를 거부하고, 그것을 실천적 지혜를 통해 매개된 유덕한 통일성에 관한 더욱 풍부하지만 매우 복잡한 이해로 대체한다.”(Kristjánsson, 2013: 164/2019: 285)

(6) 크리스찬슨은 스타크에 대한 카아의 비판이 적절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우선, 어떤 사람이 ‘동기적 이유(motivating reason)’와 ‘규범적 이유(normative reason)’라는 두 가지 이유를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자제력 있는 사람이라고 평가받을 수는 없다. 오히려 자제력 있는 사람이란 저급한 욕망을 갖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취직 사례에서 그 사람이 유덕하다고 생각하면 실망감 정서와 행복감 정서 모두는 이성과 융합되고 도덕적으로 적절한 성향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정서는 저급하지 않다.”(Kristjánsson, 2013: 164/2019: 286) 또한 최적의 정서와 실망감 사이에서 싸우는 사람을 자제력 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할 수도 없다. 오히려 자제력 없는 사람은 쾌락에 굴복하는 사람이다.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쾌락에 대한 저항이 부족하여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취직 사례에서 자제력이 있는 사람은 최적의 정서가 아닌 실망감과 싸우고 있다. 실망감은 유쾌한 정서가 아니다.”(Kristjánsson, 2013: 164-165/2019: 286)

(7) 그러나 크리스찬슨은 ‘유덕한 사람’, ‘자제력 있는 사람’, ‘자제력 없는 사람’에 대한 카아의 해석보다 ‘동기 외재주의’에 대한 스타크의 입장에 대해 더욱 비판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정서가 능동적 요소와 인지적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이러한 입장에서는 정서가 단순히 판단에서 인지되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판단에 이유를 주는 토대가 되기도 한다. 정서에서 능동적 요소를 배제하려는 동기 외재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맞지 않는다. “정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에서 서로 다른 이유가 되는 것이고, 고통과 즐거움을 동반하는 것이다(Aristotle, 1991: 121. [1378a20-1378a22]). 그래서 이 반응은, 스타크가 시작했던 것처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덕 윤리학에서 정서적 양면성이 지닌 도덕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Kristjánsson, 2013: 165/2019: 287)

(8) 크리스찬슨은 실천적 지혜가 일종의 메타 정서(meta-emotion)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다. 즉, 실천적 지혜는 행위자의 정서적 성향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정서적 성향이 서로 충돌하는 상황에서 행위자가 적절한 정서를 다시 느끼도록 조정하기도 한다. 크리스찬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실천적 지혜는 나중에 정서적인 덕으로 변모할 수 있는 개인의 정서적인 성향을 먼저 형성한다. 만약 두 가지 정서적인 덕이 주어진 상황 속에서 충돌한다면, 실천적 지혜는 경계를 서서 다시 도움을 준다. 실천적 지혜는 그 경우에 최적이 아닌 정서를 억압하지 않는다. 앞에 나온 가정 (b)에서처럼 정서는 여전히 느껴지지만, 최적이 아닌 정서는 행위자의 에우다이모니아라는 전반적인 관점에서 최적의 정서와 비교되는 것이 허용된다. 실천적 지혜는 행위자의 심의 과정에 다시 한 번 이성을 불어넣어 행위자가 느껴야 할 적절한 방식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렇게 느끼도록 동기를 부여한다. 여기서 실천적 지혜는 2차적인 메타 정서(다른 정서와 성향을 지향하는 인지-욕망의 조합)와 매우 흡사하다. (Kristjánsson, 2013: 165/2019: 288)

(9) 이러한 실천적 지혜의 역할은 사라진 동기 부여의 신비를 해명한다. 즉, 크리스찬슨에 따르면, (e)라는 가정을 거부하고자 한 카아의 기본 입장은 적절하다. 최적의 정서와 최적이 아닌 정서 사이의 딜레마는 우리에게 항상 존재한다. 다만, 우리는 ‘실천적 지혜’라는 메타 정서를 통해 일차 정서를 다시 느낀다. “취직 사례 및 여타의 유사한 경우에서 최적이 아닌 정서는 계속 존재하며, 그것은 우리가 종종 직면하는 정서적 딜레마를 생생하게 상기시킨다. 그러나 실천적 지혜의 메타 정서는 유덕한 사람의 일차 정서가 다시 이성과 공유되어 이성에 의해 다른 정서보다 더 중시되는 것을 허용한다.”(Kristjánsson, 2013: 166/2019: 288) 이때, 일차 정서는 갈등을 거치고 나온 풍부하고 복잡한 심리적 삶의 결과물이다. 유덕한 사람은 두 정서 중 한 정서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두 정서의 변증법적 종합을 거쳐 일차 정서를 더욱 풍요롭게 체험하는 것이다. “유덕한 존재는 ‘서로 상충할지라도 풍부하고 복잡한 심리적 삶을 살 수 있는 채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그 심리적 삶을 통해 (유덕한) 행동의 대안적 가능성은 유효하게 남아 있다.’(Carr, 2002 18-20; Carr, 2009:37)”(Kristjánsson, 2013: 166/2019: 289)

(10) 크리스찬슨은 정서적 양면성이 성품 형성에 기여하는 두 가지 방식을 이야기한다. 첫째로, 우리는 최적이 아닌 정서와 부딪히는 과정에서 최적의 정서를 더욱 날카롭게 체험할 수 있다. “최적의 정서가 최적이 아닌 정서와 정기적으로 상충하지 않는다면 최적의 정서로서의 긴박함과 신속함,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것의 동기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할 수 있다.”(Kristjánsson, 2013: 166/2019: 289) 둘째로, 최적의 정서는 최적이 아닌 정서를 포함하는 과정에서 더욱 원숙해질 수 있다. “우리는 취직 사례와 같은 시나리오에서 최적의 정서는 실천적 지혜가 고무하는 중재 과정 이후에도 최적 상태가 아닌 정서의 잔해에 의해 완화되거나 그것을 포함할 수 있으며, 따라서 성숙하고 원만한 정서 생활의 복잡성을 보다 적절하게 반영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Kristjánsson, 2013: 166/2019: 289-290)

4. 도덕적 최적성, 조화 그리고 덕

(1) 주덕이 필요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주장이 도덕적 옳음을 기계적으로 계산하고자 하는 공리주의의 주장과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긍정심리학은 종종 이와 같은 혼동으로 인해 주덕을 상정하길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일반론자의] 해석은 옳음에 대한 보편적인 기계적 계산이라는 생각을 암시할 수도 있으므로 긍정심리학자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 같다.”(Kristjánsson, 2013: 167/2019: 291) 그러나 크리스찬슨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도덕적 옳음을 기계적으로 계산하고자 하는 입장과 거리가 먼 이유를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한다. 즉, (a)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서 중용은 행위자에 따라 상대적이다. (b)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인간의 발달 단계에 따라 행위가 옳을 수 있는 많은 방식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c) 아리스토텔레스는 관대함이나 온화함의 덕에 대해 설명하면서 덕이 덕으로 유지되기 위해서조차 과잉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마틴 셀리그먼, 『성격 강점과 덕목의 분류』

(2) 크리스찬슨은 정서적으로 최적이 아닌 상태도 도덕적 의의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 예를 통해 설명하기도 한다. 그는 크게 세 가지 예를 제시한다.

2003년에 아이슬란드 정부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는 유지 연합에 가입한 적이 있다. 많은 아이슬란드 국민들이 아이슬란드 정부의 잘못된 결정에 대해 큰 수치심을 느꼈다. 사실, 당시 아이슬란드 정부에 상황을 판단할 자체 정보기관이 없었다는 점과 후세인이 실제로 잔인한 독재자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아이슬란드 국민들의 수치심은 과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과도한 수치심은 분명히 이라크전에 대한 반대 입장을 생성하고 유지하였다는 점에서 도덕적 의의를 지닌다. “여기에서 심리적인 문제는 도덕적으로 매우 귀중한 성향이 주어진 사건의 고립된 관점에서 최적이 아닌 특정한 개인의 행동이나 반응을 생성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지 여부다. 우리는 유지 연합의 목록 에서 아이슬란드의 위치를 절제 있게 우려하면서도 여전히 합당한 반전(反戰) 입장을 유지할 수 있는가?”(Kristjánsson, 2013: 169/2019: 293)

성경에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가사 노동을 잊고서 예수의 이야기를 들었던 마리아의 행동이 감정적으로 최선의 상태에서 일어났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녀의 행동이 올바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 마리아는 자신의 정서적인 구성을 완전히 전멸시키고, 마르타의 둔탁한 평정에 빠져들지 않으면서 자신의 열정을 풀 수 있었을까?”(Kristjánsson, 2013: 169/2019: 293) 오히려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중용의 실현을 위해 이와 같이 극단을 추구해야 한다고 종종 강조하기도 한다. “‘마치 사람들이 구부러진 막대기를 곧게 할 때 하는 것처럼’(1985: 51-52, [1109a30-1109b8]),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우리를 끌고 가서 더욱 반대되는 극단을 피하는 것이다.”(Kristjánsson, 2013: 169/2019: 293)

아내가 죽어가고 있는 사고 현장에 도착한 남편의 상황을 생각해 보자. 아내는 남편이 마지막으로 자신을 두 팔로 안아주기를 원한다. 이때, 남편은 아내를 안고 있는 대신 구조 활동에 참여하여 다른 희생자들을 다섯 명은 살려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공리주의적 관점에서는 남편이 다른 희생자를 구조하러 가는 것이 아내를 안아주는 것보다 더 옳은 일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이와 같은 단순한 결론을 거부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유형의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지만, 그의 구부러진 나무 예시는 그에게 도덕적 민감성의 일반적인 과정이 각 경우의 세부 사항에 대한 반추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낸다.”(Kristjánsson, 2013: 169/2019: 294)

(3) 크리스찬슨은 긍정심리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개념과 잘 조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랜트와 슈워츠처럼 긍정심리학이 유덕한 행동의 ‘U자형 효과’를 설명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들은 긍정심리학이 덕의 결핍에서 발생하는 해에는 주목하면서도 덕의 과도함에서 발생하는 해는 주목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크리스찬슨에 따르면, 이와 같은 비판은 일종의 허수아비 논증이다. “[…] 내가 보지 못한 것은 이러한 [그랜트와 슈워츠의] 요점이 특히 긍정심리학 프로젝트에 타격을 주어야만 하는 이유이다. 사실 나는 그랜트와 슈워츠가 허수아비와 싸우고 있다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8장에서 보듯이 긍정심리학자는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긍정성이 자신이 증진하려는 결과를 훼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Kristjánsson, 2013: 170/2019: 295)

5. 긍정심리학자를 위한 교훈

(1) 실천적 지혜는 덕의 체계에서 필수적이다. 실천적 지혜가 없이는 덕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부터 우리가 이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이다. “긍정심리학자가 생각하는 것처럼(Phoenix & Seligman, 2004: 89) 실천적 지혜는 우리가 주덕에 관 해 가용한 경험적 자료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덕 체계에서 포함하거나 배제하기로 결정할 수 있는 우연한 선택적 추가물이 아니다. 오히려 아나스(2011: 89)가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완전하고 적절한 덕의 본질은 우리의 자연적 성향이 실천적 지혜에 의해 형성되고 안내를 받을 것을 요구한다.”(Kristjánsson, 2013: 171/2019: 296)

(2) 크리스찬슨은 실천적 지혜에 관해 긍정심리학자가 참고하면 좋을 만한 몇 가지 추가적 자료를 언급한다. 그는 러셀의 학술 문헌, 슈워츠와 샤프의 매뉴얼,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지혜 평정을 추천한다. “나는 실천적 지혜가 우리에게 마땅한 것을 실행하기 위해 마땅한 방식을 찾는 데 도움을 주는 방식에 관한 러셀(2009)의 예리한 학술 문헌 그리고 좀 가벼운 것으로 슈워츠와 샤프(Schwartz & Sharpe, 2010)의 자조 매뉴얼을 긍정심리학자가 주의 깊게 읽어볼 것을 제안한다. […] 베를린 막스 플랑크 연구소(Berlin Max Planck Institute)의 연구진은 실천적 지혜를 식별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연구진이 개발한 지혜 등급(wisdom ratings)은 좋은 구인 타당도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Powers, 2005: 109).”(Kristjánsson, 2013: 171/2019: 296)

(3) 크리스찬슨은 비록 긍정심리학이 아직 실천적 지혜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는다는 한계를 지니기는 해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화해 불가능할 만큼 동떨어져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는 긍정심리학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화워스, 슈워츠, 샤프가 너무 지나치다고 비판한다. 또한 피터슨과 셀리그먼 같은 긍정심리학자들의 작업이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이론이 더 좋은 방향으로 완성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 크리스찬슨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관점에서 VIA 프로젝트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결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몰인정한 것이다. 화워스(2008), 슈워츠와 샤프(2006)와 같은 비평가는 긍정심리학을 얕고 불완전한 것으로 정면 공격할 때 너무 멀리 가는 위험이 있다. 한편으로 덕의 자연주의적 보편성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유덕한 삶과 행복 간의 경험적으로 근거가 있는 연결에 관한 긍정심리학의 기본 주장 가운데 2가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서 바로 꺼낸 낱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나머지는 아직 미완의 탐색 여정인 것 같다. 피터슨과 셀리그먼(20049)은 긍정심리학을 완성하기 위해 여전히 좋은 이론을 찾고 있음을 자유롭게 인정한다. (Kristjánsson, 2013 172/2019: 297)

참고

Kristjánsson, K., “Conflicts, Practical Wisdom and the Virtues”, Virtues and Vices in Positive Psychology,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3, Chap. 7.

Kristjánsson, K., 「갈등, 실천 지혜, 덕」, 『긍정심리학의 강점과 약점』, 추병완 옮김, 하우, 2019, 제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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