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에 대한 두서없는 잡념 (도덕 인식론, 셀라스, 형이상학, 행위철학 등)

(1)

셀라스의 두 세계 구분은 항상 나에게 오묘한 것이었다. 과학적 세계와 현상적 세계.
과학적 세계야 모두들 의문의 여지가 (거의) 없을테지만, 현상적 세계가 과연 '단일한' 세계인지 항상 의문스러웠다. (사실 셀라스가 단일한 세계라 주장했는지도 잘 모른다.)

(셀라스의 입장은 모르겠지만) 여러 형이상학적 주장들은 현상적 세계에 속할 수도 있다. 동시에 규범적인 여러 영역들도 현상적 세계에 속할 수 있다.

예컨대, 피터 웅거처럼 우리가 일상 언어를 통해 표현하는 존재자들은 사실, 과학적 세계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니힐리스트들이 있다. 예를 들어, '구름'이라는 것은 사실 과학적으로 정확히 기술하면, 특정 시공간 속에 있는 물분자들의 분포 같은 것인데, 이것의 경계를 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경우, '구름'이라는 표현과 이에 대한 지칭은 엄밀한 과학의 영역으로 환원할 수 없고, 설사 환원된다 하더라도, 일상적 용례가 여전히 유의미하게 남아있다는 점에서, 현상적 영역에 속한다.
(아마 자연 언어 존재론이라 스트로슨의 기술적 형이상학도 비슷할 것이다.)

(테드 사이더 같은 콰인류 형이상학자들은 자신들이 과학적 영역에 속한다 생각할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과학적 영역이 기술하는 것의 토대/근본성을 자신들이 기술한다 주장할 것이다. 킷 파인이나 로위[Lowe] 같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학자들은, 어느쪽이든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냥 이 사람들은 우리가 쓰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이 [실제든 아니든] 어떤 정의이며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인다.)

(1-1)

여튼 자연 언어 존재론 같은 (형이상학적) 사실의 주장과 규범적 영역은 단일한가? 가치와 사실의 구분이 없다 여기면 그럴 수 있다.

두 영역에 대한 흔한 구분은 다음과 같다.
(i) 두 인지자는 같은 대상에 대해 동일하게 모든 사실을 알더라도, 그에 대한 규범적/가치적 판단은 다를 수 있다. (그러므로 사실과 규범은 구분된다.)

근데, 이와 같은 인식론에 기반한 주장은 오묘한 지점이 있다.
예를 들어, 시각 장애인을 생각해보자. 일반인과 시각 장애인은 시각으로 전달되는 속성를 인식하는데 있어서 큰 차이를 가질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시각적 속성이 없다는 주장으로 도약하긴 어렵다. 규범적 속성도 동일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우리는 어떠한 능력의 부족으로 인해 규범적 속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매사냥꾼들은 감각 지각 능력을 극도로 훈련해, 짧은 시간 안에 원하는 감각 정보를 파악한다. 운동 선수도 이러하다. (perception learning이라 한다.)

이 주장은 이상적 주관주의로 분류된 여러 메타윤리학적 입장과 상통한다. 이들은 이상적인 사람이 '아는 것'이 도덕적 속성이라 주장한다. (도덕 전문가 moral expert에 대한 논의나 네오-아리스토텔리안 덕 윤리학의 입장과도 상통한다.)

(2)

도덕이란 무엇인가?
흔히 도덕적인 것인 '도덕적 속성'을 가지고 있는 대상으로 정의한다. 이는 20세기 평서문-기술적 언어철학에 기반한 형이상학적 주장을 통해, 도덕적 발화를 분석한 결과다.

도덕적 속성을 어찌 아는가, 에 따라서 크게 두 입장으로 나뉜다. 도덕 감정주의는 감정을 통해 느낀다 주장한다. (그래서 이들은 도덕적 속성을 자연적 속성 - 즉 우리가 타인에게 느끼는 동정심 같은 것으로 환원하기 수월하다.) 도덕 이성주의는 반대로 어떠한 직관이나 믿음이라 주장한다.

도덕적 속성은 우리의 '행위'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 가지 문제에 봉착한다. '행위'라는 것이 굉장히 복잡해서, 행위의 한 단위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맹자에서 나오는 그 유명한 유자입정을 생각해보자. 아이가 떨어졌다. 그걸 인식한다. 그래서 아이를 구하려 뛰어든다. 이 행위는 사건의 인식 - 어떠한 동기부여 - 행위까지 즉각적으로 이어진다.

이 행위를 좀 더 '긴 시간 선상의 계획으로' 치환해보자. 아이가 떨어졌다. 그걸 인식한다. 그래서 아이를 구하려 한다. 대신 뛰어드는 것은 위험하기 때문에, 사다리를 구하려 한다.
치환된 행위에서는 사건의 인식과 동기부여까지는 동일해 보인다. 다만 어떤 행위가 더 적절한지, 혹은 효용을 최대화하는지에 대한 고려가 달랐을 뿐이다.

이렇게 연장된 시간은 행위를 '지속시키려는' 최초의 동기 부여 (그게 감정이든 믿음이든)에 굉장한 부담감을 준다. 사다리를 찾는 과정에서 느끼는 피로, 짜증, 불안은 모두 최초의 동기 부여를 감소시키는 요인들이다.

(2-1)

(a) 유자입정과 (b) 사다리 찾기를 비교해보자.

아이를 보았는데 우물에 뛰어들지 않고 사다리를 찾지도 않는 것은 의지박약의 사례일 것이다. 그런데 사다리를 찾다가, 중간에 느끼는 여러 요소들로 인해 사다리를 찾는 것을 포기한다면? 의지박약인가? 아니면 다른 동기부여에 의한 합리적인 선택인가?

(그러면 애당초 최초의 의지박약 역시 합리적 선택으로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아이를 구하는 것과 위험성을 고려해서, 직관적으로 위험성이 더 높다 생각한 것 아닌가?)

(3)

이러한 패러독스의 상황에서, 도덕 감정주의와 도덕 이성주의는 다른 선택을 할 것을 요구한다. 도덕 감정주의는 도덕적 속성이 감정에 의해 인지되는 것이므로, 감정을 따르라 말할 것이다. 반대로 도덕 이성주의는 이성-직관-믿음에 의한 것이므로, 이러한 것을 따르라 할 것이다.

근데 과연 그러한가? (만약 이러한 것이 있다면) 도덕적 속성은 둘 중 하나에 의해서만 인지되는 것인가?

이러한 흄적 이분법에 대해서 난 의심스럽다.

이상적 행위자 이론은 어떤 의미에서 이를 통합시킨다. 이상적 행위자는 감정-이성을 통해서 얻은 여러 지식을 종합해, 도덕적 행동으로 나아간다.
(어떤 의미에서, 이상적 행위자에게 도덕적 속성이란, 자기가 '부여한 것'에 가깝다. 아마 형이상학적으로 다른 입장들과 좀 구분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복잡한 그림이 난 좀 더 맞다 생각한다. 행위 이론과 심리철학적 측면에서도 그렇고.

(4)

결국 규범 윤리학 중 결과론의 영역으로 돌아왔다. 도덕적 속성은 어디에 부여되는가? 최초의 사태? 아니면 행위? 아니면 예견된 행위의 결과? 아니면 동기 자체?

우리는 형이상학적으로 보다 엄밀한 그림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세상에 대한 (도덕적인) 대상에 대한 인지 -> (필요하다면 그 대상에 대한 특정한 속성/지식을 획득하는 인식[론]) -> 이에 동기부여되는 심적 상태 -> 행위 1. 계획과 선택 이론 -> 행위 2. 결과

도덕적 속성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이 과정 중 어느 과정에서부터 존재하는가? 아니면 세상의 어떠한 형이상학적 단위에 귀속되는가? 바위 같은 물리적 대상? 아니면 사건? 아니면 states of affair? 아니면 인간에게만?

(4-1)

이러면 우리는 메타윤리학과 규범 윤리학의 영역을 이렇게 재구성해볼 수 있다.

(i) 메타윤리학은 (만약 있다면) 도덕적 속성에 관한 논의다. (a) 도덕적 발화에 등장하는 도덕적 속성이 무엇이며 (b) 그것의 형이상학적 위치는 무엇이며 (c) 어떻게 행위에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 답해야 한다.
(ii) 규범 윤리학은 도덕적 속성이 '윤리적 과정' 전체 중 어디에 '양화'되는지에 대한 논의다.

(5)

사소한 사실 하나.
결정 이론/선택 이론(decision theory)를 연구하는 철학자들이 반복적으로 프린스턴 출신이길래, 누가 Phd 어드바이저인지 찾다가, 누군지 찾은 거 같은 기분이 든다.

리처드 제프리(Richard Jeffey, 1926 - 2002)로 보인다. 퍼트남/헴펠/카르납 밑에서 학위를 받았으며, 과학철학과 연역 논리, 베이지안 확률 등을 전공하여 이걸 선택 이론으로 넓힌 것으로 보인다.
Alan Hajek 등이 추도문을 쓴 걸로 보아, 제자인듯하다. (CV가 나오지 않아, 박사 지도를 누구 했는진 정확히 알 수 없다.)

(참고로 프린스턴에는 길버트 하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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