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자유주의 이전의 민주정'이라는 정치 이론이 환상이 아니라며, 고전기 아테네 민주정이 그 역사적 사례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1) 아테네의 정치발전사를 개관하고, (2) 그리스어 dēmokratía의 본래적 의미와 (3) 그것이 획득한 성숙한 의미를 살펴보는 것을 이번 장의 목표로 삼는다. (1)에 대해서는 간략히 논하고, (2)와 (3)에 더욱 집중하여 요약 및 정리한다.
- 아테네의 정치 발전사
오버는 아테네의 정치 발전사에 대한 대략적인 그림을 제공한다. 핵심만 추려내자면 아테네 민주정은 시민들의 집단적 자기 통치라는 본연의 의미를 잃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이때의 민주정의 정의가 원초적 민주정의 예비적 정의로 사용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고전기 아테네가 당대의 국가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아주 대규모 국가였지만 근대 국민국가에 비하면 작으며 현대에 견주어 다원주의적이라고 하기는 힘들다고 한계를 인정한다.) 특히 저자는 해당 시기 민주정이 '다수의 폭정'이라는 비판에 맞서, 아테네는 ①공적 발언과 결사의 자유, ②투표와 공직 수임 기회의 평등 ③시민적 존엄이라는 민주정의 세 가지 근본 조건들을 견지하기 위해 규칙과 이에 상응하는 행동 양식상의 규범을 공식화하여 유지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리고 늘 규칙과 규범에 따라 의사 결정을 해왔다는 아테네 민주 정부의 특성이 그들이 역사적으로 풍요를 누렸고 안전을 누리게 된 기반을 마련했다고 말한다.
- dēmokratía의 본래적 의미와 성숙한 의미
오버는 고대 그리스어 dēmokratía를 분석함으로써 당대 민주정의 본래적 의미를 밝히려한다. 저자는 dēmokratía가 각각 '인민'과 '권력[힘, 능력]'을 뜻하는 'dêmos'와 'krátos'의 합성어임을 밝힌다. 그러면서 민주정 비판가들의 생각에 맞서 본래 'dêmos'는 비판가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의 것을 지칭하며, 'krátos' 또한 결코 다른 이들에 대한 군림과 종속과 관련된 냉소적 의미를 갖기 보다는 인민이 가진 집단적 힘에 대한 긍정적인 확신을 담은 말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이러한 어원 분석은 '-archē'를 접미사로 하는 정치체제 유형을 의미하는 단어와 '-krátos'를 접미사로 하는 단어 구분에 근거한다.
2-1. 'dêmos'의 의미
저자는 '인민'을 의미하는 명사 dêmos가 '소수'를 의미하는 복수 명사 hoi oligoi와 달리 항상 집단성과 대중을 의미했으므로, 항상 dêmos는 '대규모의 다양성을 지닌 시민 집단 전체'를 의미했다고 말한다. 즉, dêmos는 애초에 일부만이 아니라 잠재적 지배자 모두를 가르키는 포괄적인 단어로, 결코 민주정 비판자들의 생각처럼 '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2-2. '-archē' 계열과 '-krátos' 계열 단어의 차이
'-archē' 계열의 단어는 모두 '공직의 독점(적 소유)'와 관련되어 있는 반면, '-krátos' 계열의 단어는 공직 혹은 공직자와 관련이 없고, '~을 할 수 있는 힘/권력', '억제', 군림/~위에 있는 권력' 등 넓은 스펙트럼에 걸쳐 사용되었다. 또한 전자가 활용된 단어(ex. monarchia, oligarchia, anarchia)는 '몇 명인지' 그 숫자를 명시하는 단어들과 결합한 반면, 후자가 활용된 단어(ex. aristokratia, dēmokratía, isokratia)는 공직을 수임함으로써 군림/지배하는 집단의 크기도와 무관하다. 그럼에도 '-krátos' 계열의 단어들은 권력을 갖고 지배하는 자들이 피지배자들과 구별되어 갖는 특징을 명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krátos' 계열의 단어는 '능력으로서의 정치적 권력을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행사하고 있는 상태인 정체' 혹은 '그런 능력있는 사람들이 그런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열망'으로 해석 가능하다.
2-3. dēmokratía의 본래적 의미
위의 내용을 종합하면 dēmokratía는 '이미 존재하는 정치적 권위를 dêmos가 독점적으로 통제하는 것' 혹은 '국가에서 dêmos가 같은 국가 내 잠재적 실권자들에 맞서 군림하거나 독점적인 권력을 소유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dēmokratía는 'dêmos가 공적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집단적 능력을 갖는 체제'를 의미한다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인들에게 민주정(dēmokratía)이란 '공적 영역에서 인민(dêmos)이 집단적인 통제권을 갖는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그 영역에서 인민이 효과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그리고 집단적 행동을 통해 공적 영역을 재구성할 수 있는 집단적 능력의 문제'**이다. 기술적으로 말하면 dēmokratía는 인민이 공적 영역에서 변화를 만들어 낼 능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닌 셈이고, 규범적으로는 인민이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한 규칙을 만들고 시행하는 능력을 가져야함을 주장하기 위해 쓰이기도 한 셈이다.
- 성숙한 그리스적 정의
오버는 'krátos'가 갖는 '~을 할 수 있는 힘'과 '제약'의 의미를 강조하며 민주정에 대한 성숙한 그리스적 정의를 살핀다. <2-2>의 내용을 염두에 둔다면 'krátos'는 규칙을 만들고 시행하는 행위와 연결됨을 알 수 있다. 이는 당대 아테네의 dêmos가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구속력을 지닌 규칙을 제공하고 시행한 데서 가장 잘 드러난다. 고전기 아테네에서 dêmos는 비폭정을 유지하기 위해 때맞춰서 도시를 위한 활동(civic activity)를 하게끔 기대를 받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는 아테네에는 법과 도시를 위한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행동 양식상의 규범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이 존재 덕분에 민주정의 조건인 정치적 자유와 평등, 그리고 시민적 존엄이 지속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민주정의 위 세 조건은 인민이 자신의 krátos(힘)을 행사할 때 제약하는 조건이 되기도 했다. 즉, 그리스 정치사에서 인민이 정치적 권력을 행사할 때 거기에는 항상 입법 절차를 준수하도록 하는 법률적 제한이 있어야 하고, 인민이 그런 제한을 잘 지킬 수 도 있다는 것은 민주정이 세워진 이래 잘 인지되어 왔다. 이는 곧 입법적 권위에 대한 법률적 제한이 자연법이나 자연권 이론의 여러 교의가 출현하기 훨씬 이전인 고대 그리스 민주정에서도 잘 시행 및 발달되어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저자는 'dêmos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권력'에 제약을 둔 구체적인 방식 두 가지를 보여준다. 첫째, 그들은 입법을 위해 개최된 민회에서 단순 다수결 투표로 만들어지는 일상적인 정책과 까다로운 여러 단계로 된 준사법적 과정을 거쳐 제정되는 헌정 질서 관련 법률을 형식상 구분한다. 둘째, 그들은 일상적인 민회 회의 때마다 통과되는 '입법적 명령'을 더 까다로운 준사법적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성문화된 헌정 질서 관련 '법률들'에 합치하도록 했다.
따라서 그리스에서 성숙하게 이루어진 민주정이란 사회적으로 다양성을 갖춘 시민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그러면서도 그 시민들 스스로가 만든 헌정 질서 관련 법률에 의해 제한되는 집단적 자기 통치라고 요약할 수 있다.
※memo.
- 민주정 비판자들은 dēmokratía를 'polloi(다수의)-archia(지배)', 즉 가난한 다수가 투표로 권력을 행사해 정부 기구를 독점해 군림하는 사실상의 폭정과 같은 정체라 낙인 찍으려했다. 그러나 isonomia(법 앞에서 평등한 자)나 isēgoria(평등하게 발언하는 자)와 달리 isopesphia(평등하게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자)는 실제 고전기 그리스 문헌에서 등장하지도 않고 dēmokratía와 동의어로 쓰이지도 않았다. 즉,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psephokratia(투표의 지배)란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 아테네의 헌정 질서는 혁신을 거쳐왔는데 주요 계기는 두 번의 과두정 쿠테타와 펠로폰세소스 전쟁에서의 패배이다. 아테네인들은 이러한 경험 후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반드시 정치적 안정이 확보되어야만 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는 다수의 보통 시민은 부유층의 인명과 재산을 보장하도록 기존의 법 질서를 따르고, 엘리트 시민들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재정적 지원(ex. 공무 참여에 대한 수당 지급)을 인정하는 식의 화해를 통해 가능했다.
출처: 조사이아 오버 2023, pp. 65-98.
※볼드체는 본 글 필자의 강조 처리.
어린이:석박사 과정 = 학원간다:논문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