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의 명리命理사상과 그 논설의 실제 6장 ② - 진대제

... (계속) ​

고자가 말했다. “본성은 마치 소용돌이치는 물과 같다. 동쪽으로 트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트면 서쪽으로 흐른다. 인간의 본성은 선과 불선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물이 동쪽이나 서쪽으로 나뉘지 않는 것과 같다.”
맹자가 말했다. “물에는 진정 동쪽이나 서쪽으로 나뉘지 않는다. 그러나 위·아래의 구분이 없겠는가? 인간 본성의 선함도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 사람에게 불선이 없는 것은 물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경우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지금 저 물을 탁 치면 뛰어 올라서 사람의 이마를 넘어서게 할 수 있고, 힘을 주어서 흐르게 하면 산 위에 머무르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 그 (외부) 환경(circumstance)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사람이 불선을 저지르게 되는 것은 그들의 본성 역시 물과 동일함을 [보여준다].”[1]​

이 논쟁 안에서 고자가 말한 것은 논증으로서 “인간 본성은 선과 불선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라는 자신의 주장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반면 맹자가 말한 것은 논증과 반론으로서 먼저 상대방의 주장을 논파하고 이어서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라는 자신의 이론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논증의 작용은 반론의 효과까지 겸한다. 왜냐하면 일단 자신의 이론이 깨뜨릴 수 없는 정당한 이론이 되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이 본래 견지하던 주장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면 상대 주장을 논파하는 효과를 거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논쟁 안에서 맹자가 말한 것은 비록 논증과 관련이 있으나 그의 주요 목적은 상대 주장의 논파에 있었다.

고자의 논증에서 사용한 논리는 일종의 비유이다. “물이 동쪽이나 서쪽으로 나뉘지 않는다”는 능비能譬이고, “인간의 본성은 선과 악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소비所譬이다.[2] 물의 흐름은 본래부터 일정한 방향이 없다. 동쪽으로 흐르느냐 혹은 서쪽으로 흐르느냐는 온전히 자기 밖에 있는 힘에 의하여 그렇게 되는 것이지, 물의 본성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본래부터 일정한 경향이 없다. 선으로 향하느냐 혹은 불선으로 향하느냐는 마치 물이 “동쪽으로 트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트면 서쪽으로 흐르는 것”과 같이 인간 본성의 본연으로부터 발생하지 않는다.

고자는 스스로 “인간의 본성은 선과 불선으로 구분되지 않는다”고만 말했을 뿐 그 이상 언급한 적이 없다. 즉 인간의 본성은 선하게 될 수도 있고 불선하게 될 수도 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동쪽으로 트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트면 서쪽으로 흐른다”는 비유를 봤을 때, 인간의 본성 역시 외부의 영향을 받는다면 당연히 선으로 향할 수 있으며 불선으로 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인간 본성 자체가 비록 선이나 불선으로 나뉘지 않더라도 인간 본성이 발현[發動]한 결과는 선이나 불선의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말해서 인간 본성이 선해질 수도 있고 악해질 수도 있다는 주장은 “인간의 본성은 선과 불선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주장으로부터 당연히 따라 나오는 결과이다.

이 논증에서 고자는 비유를 제외하고 “인간의 본성은 선과 불선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예증을 제기하지도 않았고, 또한 이 결론이 도출될 수 있는 기본적인 근거를 제시하지도 않았다. 논리학적으로 말해서 비유는 단지 유비추론일 뿐으로, 그 논증의 힘은 본래부터 강력하지 않다. 고작 비유의 내용이 혹 그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을 뿐 그렇게 되는 필연성을 증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고자의 논증은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다.

맹자가 말한 것은 비록 논증과 관련이 있으나 그의 주요 목적은 상대 주장의 논파에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단지 그의 반론이 과연 실효를 거두었는지에 대하여 평가하도록 하겠다. 맹자의 반론 역시 온전히 비유 위에 세워져 있다. 또 고자의 논증에서 사용한 비유를 채택하되 약간 바꿔서 자신이 논파할 때 비유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반론은 강력하지 못했기에 상대방의 논의를 꺾을 수 없었다. 이는 아래에서 열거할 세 가지 논점으로 나누어서 기술할 수 있다.

맹자가 “인간의 본성은 선과 불선으로 구분되지 않는다”는 고자의 주장을 논파하고자 했다면, 당연히 인간의 본성은 선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는 구체적 사실을 거론함으로써 예증했어야 했고, 인간의 본성이 필연적으로 선으로 향한다는 보다 상위의 원칙을 제시함으로써 근거를 보충해야 했다. 또한 거론한 사실과 원칙이 고자가 인정할 만큼 정확해서 반박할 도리가 없었어야 했다. 반드시 이렇게 해야만 고자를 신복시킬 수 있고 논파의 실효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맹자는 이러한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도리어 고작 비유를 가지고서 논증하였을 뿐이다. 비유가 갖고 있는 논증의 힘은 본래부터 미약해서 상대를 논파하는 역할을 담당하기 쉽지 않다. 이것이 바로 맹자의 반론이 강력하지 못했다고 평가한 첫 번째 논점이다.

게다가 맹자가 사용한 비유는 결점이 있다. 맹자는 고자가 사용한 비유를 채택하되 약간 바꿔서 자신이 논파할 때 비유로 활용하였다. 혹 자기 딴에는 상대방의 창을 사용해서 상대방의 방패를 공격해서 필시 상대방의 논의를 궁지로 몰아넣어 꺾어버렸다고 간주한 것 같다. 그렇지만 상대가 본래 사용한 비유를 채택하여 약간 바꾸었더라도 비유를 바꾸는 과정에서 큰 착오를 저질렀음을 몰랐다면, 이 역시 5장 3절에서 말한 ‘비유에 의거하여 엉뚱한 추론을 진행하는 오류’를 범하고 만 것이다. 고자가 “물이 동쪽이나 서쪽으로 나뉘지 않는다”고 말한 비유는 물에 방위상 일정한 방향이 없음을 의미한다. 맹자가 처음에 “물에는 진정 동쪽이나 서쪽으로 나뉘지 않는다”고 말한 것처럼 그 역시 물에는 방위상 일정한 방향이 없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위·아래의 구분이 없겠는가?”라고 말한 것은 위·아래의 일정한 방향이 있음을 의미한다. 방위상의 일정한 방향과 위·아래의 일정한 방향은 비록 똑같이 일정한 방향이라고 할 수 있으나,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일정한 방향이다. 방위상의 일정한 방향은 제쳐놓고 맹자가 위·아래의 일정한 방향만 취하여 논거로 삼은 것은, 비유에 의거하여 엉뚱한 추론을 진행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5장 3절에서는 이와 같은 맹자의 설명을 인명론因明論에서 말하는 분별상사分別相似에 속한다고 평가하였다. 분별상사는 사능파似能破로서 상대방의 논증을 논파한 것 같지만 실상 논파하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맹자의 반론이 강력하지 못했다고 평가한 두 번째 논점이다.

소용돌이치는 물에 위·아래의 일정한 방향이 있다는 비유는 참으로 사실이지만, 능비能譬와 소비所譬는 동일하지 않고 단지 유사할 뿐이다. 상호간에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상호간에 차이점도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능비能譬에 내재한 성질이 반드시 소비所譬에 내재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고자가 소용돌이치는 물로 인간 본성을 비유한 것은, 단지 인간 본성에 방위상의 정해진 방향이 없다는 점이 소용돌이치는 물과 서로 비슷하다는 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에 기초하여 인간 본성에도 소용돌이치는 물처럼 위·아래의 정해진 방향이 내재해 있음을 시인하라고 고자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고자가 견지한 주장은 “인간의 본성은 선과 불선으로 구분되지 않는다”이다. 그러므로 그의 심중에는 인간 본성에 방위상의 일정한 방향뿐 아니라 위·아래의 정해진 방향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즉 [방위와 고하를 막론하고] 어떠한 정해진 방향도 없다는 것이다. 맹자가 “인간 본성의 선함도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은, 고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단지 5장 3절에서 칭한 잘못된 비유의 일종으로서 근본적으로 비유가 되기에 부족하다. 그러므로 고자를 납득시키지 못한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바로 맹자의 반론이 강력하지 못했다고 평가한 세 번째 논점이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맹자와 고자의 이 논쟁은 결국 아무런 결과가 없는 한 바탕 논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고자가 말했다. “인간의 본성을 인의로 간주하는 것은 땅버들을 잔과 그릇으로 간주하는 것과 같다.”
맹자가 말했다. “그대는 땅버들의 본성에 따라서 잔과 그릇을 만드는가? 땅버들을 훼손하고서야 잔과 그릇을 만드는가? 만약 땅버들을 훼손하고서 잔과 그릇을 만든다면 또한 사람을 해치고서 인의를 만들겠구나! 천하의 사람들을 몰아서 인의를 해칠 것은 필시 그대의 말이겠구나!”[3]

​이 논쟁에서 고자가 말한 것은 반론에 중점을 두고 있으니, 인의를 인간 본성으로 간주하는 맹자의 이론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암묵적으로 자신의 입장, 즉 인의는 인위人爲에서 나오지 인간 본성에서 나오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다. 맹자가 말한 것 역시 반론에 중점을 두고 있으니, 고자가 인의와 인간 본성을 두 가지로 나누어버린 주장을 논파하고, 또한 암묵적으로 인의가 인간 본성에서 나온다는 자신의 이론을 옹호하고 있다.

고자의 반론은 완전히 비유로 이루어져 있다. 땅버들과 잔·그릇의 관계를 능비能譬로 삼고, 인간의 본성과 인의의 관계를 소비所譬로 삼았다. 땅버들은 잔과 그릇 등 그릇을 만드는 재료이고, 잔과 그릇은 땅버들을 재료로 사용해서 제작한 그릇이다. 그릇의 제작에는 한 방면에서 보자면 재료가 필요하긴 하지만 다른 방면에서 보자면 인위적인 공정[人工]이 필요하다. 만약 재료만 있고 인위적인 공정의 제작 과정이 없다면 재료는 줄곧 재료에 불과할 뿐 그릇으로 만들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그릇의 제작은 재료와 인위적인 공정의 배합으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단순하게 재료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재료와 그릇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없고 도리어 두 가지로 구분해서 봐야 한다. 고자는 이러한 구분을 활용하여 땅버들과 잔·그릇의 관계를 드러내었고, 또한 이로써 인간의 본성과 인의의 관계를 비유했다. “인간의 본성으로 인의를 만드는 것은 땅버들로 잔과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는 맹자가 이러한 구분을 무시하여 혼동에 빠져버렸다고 말한 것이다. 이 비유의 논증은 고자가 보기에 매우 합당하여 힘이 있겠지만, 맹자가 보기에는 비판 받아 마땅한 잘못된 비유이다. 왜냐하면 맹자는 “인간 본성의 선함도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 사람에게 불선이 없는 것은 물이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 경우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은 자연스러운 성장을 거쳐서 외부의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분명 인의로 발전할 수밖에 없으며, 불인不仁이나 불의不義로 발전할 수가 없다. 땅버들의 경우에는 자연스러운 성장을 거치더라도 줄곧 땅버들에 불과할 뿐 잔·그릇으로 성장할 수 없으며 잔·그릇이 아닌 것으로도 성장할 수 없다. 그래서 맹자의 이론에 의거하면 인간의 본성과 인의의 관계는 결코 땅버들과 잔·그릇의 관계와 유사하지 않다. 두 가지는 실로 비유로 성립할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 고자의 이 논증은 논파의 실효를 거둘 수 없다.

맹자의 반박 역시 약점이 있다. 맹자는 근본적으로 공자가 만든 비유가 비유로서 성립하지 못함을 드러내지 못하였기에 결국 그 비유에 따라 논쟁을 이어나갔다. 맹자의 이러한 태도는 이치에 따라 추측해보자면 고자가 만든 비유가 성립 가능성을 암묵적으로 승인한 것과 같고 또한 인성과 인의 간의 관계가 땅버들과 잔·그릇의 관계와 유사한 점이 있음을 암묵적으로 승인한 것과 같다. 땅버들을 잔·그릇으로 제작하는 것은 땅버들이 자연스럽게 생장한 결과가 아니라 인위적인 힘으로 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땅버들과 잔·그릇이 인성과 인의의 비유로서 충분하다면, 인성은 스스로 자연스럽게 인의로 발전하지 못하며 인위적인 힘으로 가공하는 과정이 있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맹자의 이러한 태도는 중대한 실책으로서, 자신의 입장을 무너뜨렸으며 게다가 상대의 기세를 조장하고 말았다. 이는 맹자의 반론에서 보이는 첫 번째 약점이다.

맹자는 고자의 비유를 암묵적으로 승인해버린 태도 아래에서 “그대는 땅버들의 본성에 따라서 잔과 그릇을 만드는가? 아니면 땅버들을 훼손하고서야 잔과 그릇을 만드는가?”라고 질문했다. 또 맹자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곧장 자신의 생각에 기대어 고자의 주장을 “장차 땅버들을 훼손하고서야 잔과 그릇을 만들 것이다”로 가정한 상태에서, 계속 논의를 진전하여 “만약 땅버들을 훼손하고서 잔과 그릇을 만든다면 또한 사람을 해치고서 인의를 만들겠구나!”라고 비판했다. 맹자의 질문은 고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쓸모없는 말이 덧붙여진 것이며 문제가 될 수가 없다. 땅버들은 잔과 그릇으로 만들어질 수 있지만 또한 잔과 그릇이 아닌 것으로도 만들어질 수 있다. 잔과 그릇으로 만들어진다고 제한을 두지 않았으며, 잔과 그릇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진다고 제한을 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땅버들이 잔과 그릇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본성에 따른다’ 혹은 ‘본성을 해친다’고 말할 것이 없다. 인간의 본성은 선이나 불선으로 나뉨이 없어서 선이 될 수도 있고 불선이 될 수도 있다. 선이 된다고 제한하지 않았고 불선이 된다고 제한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고자가 말한 인성은 외부적인 힘의 영향을 받아서 인의로 드러나며, 본성을 따른다거나 본성을 해친다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고자가 봤을 때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고자에게 질문을 하였으니 고자도 [맹자의 비판을] 실상과 부합하지 않는 질문으로 간주하고 말았을 것이다. 고자가 봤을 때 실상과 부합하지 않는 문제에 의거하였고, 게다가 그 안의 특정 부분을 사실로 가정한 상태에서 고자를 비판하였으니 고자도 [맹자의 비판을] 과녁 없이 화살을 쏘는 비판으로 간주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래서 맹자의 이 비판 역시 고자 이론의 핵심을 찔렀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이는 맹자의 반론에서 보이는 두 번째 약점이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맹자와 고자의 논쟁은 다른 두 차례의 논쟁과 똑같이 아무런 결과도 없는 논쟁이 되고 말았다.

[1] 『맹자』「고자상」2, 告子曰: “性猶湍水也, 決諸東方則東流, 袂諸西方則西流. 人性之無分於善不善也, 猶水之無分於東西也.” 孟子曰: “水信無分於東西. 無分於上下乎? 人性之善也, 猶水之就下也. 人無有不善, 水無有不下, 今夫水, 搏而躍之, 可使過顙, 激而行之, 可使在山. 是豈水之性哉? 其勢則然也. 人之可使為不善, 其性亦猶是也.” (여기에서 勢를 외부 환경으로 번역한 것은 lau의 견해를 참조한 것이다.)
[2] 진대제는 불교논리학인 인명론의 용어를 자주 사용한다. 앞선 번역어에서는 이를 의식하지 않아서 몇 가지 중요한 오역을 범하고 말았다. 예를 들어 能立, 能破같은 것이 그렇다. 뒷 부분에 가서야 이를 알게 되었고, 이에 맞춰서 번역을 수정하였다. 能立은 '논증'으로 번역했고, 能破는 '반론' 혹은 '논파'로 번역했다. 能譬와 所譬도 마찬가지인데 수사학의 용어로 보면 能譬는 '보조관념'이고 所譬는 '원관념'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내 마음은 불처럼 타고 있어"라고 할 때 불은 能譬이고 마음은 所譬에 해당한다. 무슨 용어로 번역할지 고민하다가 원어를 음차하기로 하였다.
[3] 『맹자』「고자상」1, 告子曰: “以人性為仁義, 猶以杞柳為桮棬.” 孟子曰: “子能順杞柳之性而以為桮棬乎? 將戕賊杞柳而後以為桮棬也? 如將戕賊杞柳而以為桮棬, 則亦將戕賊人以為仁義與? 率天下之人而禍仁義者, 必子之言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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