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펭(Peng)과 니스벳은 경험적 데이터에 따라 중국인과 미국인 대학생들이 모순율에 대해 다른 태도를 가진다 주장했다. 중국인들은 대립되는 견해가 합치될 수 있다 여길 경향성이 높았다."
(2)
예전에도 불교 논리학에서 양진주의를 끌고오는 그레이엄 프리스트의 시도를 시큰둥하게 평가한 바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지고 오는 문장은 명백히 모순의 형태를 이루고 있지만, 그에 대한 해석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도교의추>의 번역에서 말했지만, 비유비무처럼 모순적으로 보이는 주장은 결국 유-무가 각기 현상의 다른 층위에 해당하는 주장이라는 해석으로 귀결된다.
예컨대 도가 비유비무라는 것은, (구체적인 개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말) 없는 것은 아니다. 라는 주장으로 이해하는 셈이다.
자이나교의 모순적인 주장 역시 이러한 방식으로 해결된다.
(3)
차라리 동양인이 모순율에 더 호의적인 것은,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를 겸허하게 인정하는 "인식론적 덕"을 더 강조하기 때문이 아닐까?
즉 문장이 모순의 형태로 표현되어있지만, 그건 어떠한 논리적 모순이 아닌, 세상을 문장으로 만들 때 "정확하게" 바꾸지 못한 인간(개별 인간이든 인간 종 차원이든)의 인식론적 한계 때문인 셈이다.
(다른 글에서 이와 같은 주장을 이미 한 바 있다.)
(4)
따라서 동북아-남아시아에 널리 퍼진 회의주의/상대주의가 과연 서양의 것과 같은지 우린 고민해 봐야할지도 모르겠다.
전자는 (소사가 말하는 인식론적 윤리학이라는 메타-인식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인식론적 한계에 대한 겸손함이라는 덕을 옹호하는 입장이라면, 후자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지식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입장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엥. 쓰다보니 논문감이 하나 나왔다. (난 안 쓸테니 누가 쓰셔도 됩니다. 다만 서문에 누굴 참조했는지만 밝혀주세요. 안 밝히시면 고나리질 할겁니다 쿠하하하.)
일전에 wildbunny님 덕에 알게 되었던 일본의 분석철학에 관한 아티클에서도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 게 생각났는데 확실히 흥미로운 부분인 것 같아요. 전 전공자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우는 또 어떤지 궁금하네요.
One recent noteworthy book on logic that was written by a philosopher is Onishi
Takuro’s Logic (2021), a textbook that consists of two parts, the second of which is
devoted to non-classical logic, particularly relevant logic. Since Graham Priest held
visiting positions at Kyoto University in 2004 and again in 2008, non-classical logic
has attracted a surprising number of young Japanese philosophers around Kyoto,
including Onishi. The reason for this may be the Japanese familiarity with Buddhist
thought, or at least Priest himself seems to believe so. Priest’s Toward Non-being
(2005/2011) was also translated and published by Keiso Shobo. (p. 9)
서양철학사에서는 모순율과 이에 기초한 논박, 그리고 인식론적 회의주의 연관이 이미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주류로 부상하고 이후 철학사를 관통하는 주제가 된 반면, 중국철학사에서는 고대그리스와 비슷한 시기에 모순율에 기반한 사유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적 지위에 머물렀다는 서술을 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그 이유에 대해서는 복합적인 설명이 필요하겠지요.) 그리고 이를 통해서 현대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모순에 대한 호의적 태도 (예컨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공존)를 설명하는 것이 일종의 클리셰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반면에 초기 불교철학은 동북아 쪽과 달리 모순율과 회의주의가 깊게 사유되었다는 점 역시 이색적입니다. 가령 이미 서양 고대의 회의주의 전통이 인도-불교전통과의 교류의 결과였음이 이미 지적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사실 굉장히 많은 조심성이 필요로 하는 주장인듯합니다. 최근 학계는 동서교류사와 혼합주의에 호의적인 편이라서, 말씀하신 주장을 긍정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지만, "그래서 정말인가?" 묻는다면 저흰 개연적이라 말할 수 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2)
초기 인도 철학자(불교든 자이나든 힌두든 아지위카든)와 고대 그리스 학자들이 서로를 알았다는 점은 명확합니다. 다만 어느정도 알았을까? 이건 물음표입니다.
(i) 통상 교류의 증거로 제시되는 것은 피론이 고대 인도 북부 (오늘날 카슈미르와 아프간) 지역에서 인도 수행자를 만나서 큰 영향을 받고 돌아왔다는 증언입니다. (아마 <위대한 어쩌고저쩌고> 책이 출전으로 기억합니다. 디오게네스 라이니투스인가가 쓴 책이요.)
문제는 당대 로마에서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철학의 기원이 이국의 현자라 주장하는 것이 일종의 클리셰였다는 점입니다. 자신은 조로아스터를 이었다, 예수를 이었다, 이집트의 현자인 헤르메스를 이었다는 주장을 흔하게 접합니다. (이 중 조로아스터의 경우는 실제 조로아스터교와 꽤 거리가 멀고, 헤르메스는 과연 어느정도 고대 이집트 종교와 연관성이 있는지 이견이 분분합니다.)
따라서 피론의 주장 역시 어떤 스캠이거나, 아니면 이상하게 굴절된 내용이거나, 실제로 보았지만 그냥 단편적으로 안 걸 자기 맘대로 해석한거이거나, 아니면 진짜 영향을 받은 것일수도 있죠.
아마 새로운 문헌이 나오지 않는 이상 이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겁니다.
(3)
여담이지만 카슈미르와 아프간 지역은 철학사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지역입니다. 고대 불교 철학의 중심지였던 곳이기도 하면서도, 힌두철학과 중요한 회의주의 철학자들이 나온 곳이기도 하죠.
동시에 이슬람의 정복 이후에는, 아비센나 같은 중요한 이슬람 철학자들이 나온 곳이기도 합니다.
어떤 학자는 아비센나가 중관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르죠. (정확히 말하면 사상이 아니라, 불교 승원 체계가 마드라스 체계로 이어지고, 불교 문헌 특유의 논리적 주석 방식을 아비센나가 계승했다 주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