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의 명리命理사상과 그 논설의 실제』 6장 ① - 陳大齊

이 번역은 『孟子的命理思想及其辨說實况』의 6장입니다. 전에 어떤 분이 중국철학(특히 성리학 분야)을 분석적으로 접근하고 싶다고 하신 것을 봤는데요. 마침 이 글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업계의 동향을 잘 모르지만 대만이나 홍콩 쪽에서는 분석적 경향을 가진 학자들이 조금 있는 것 같더군요. 陳大齊 선생은 돌아가신지 오래된 분이지만 나름 논리적으로 글을 쓰려고 하신 것 같고, 馮曜明의 논문 역시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글은 맹자와 고자의 논쟁을 깔끔하게 정리한 것 같습니다. 총 두 개의 절로 이뤄져 있는데 3~4차례에 걸쳐 번역이 올라갈 것 같네요.

6장. 맹자와 고자의 논쟁​

1절. 인성人性에 관한 논쟁​

맹자의 논적 중 직접 토론하였으며 토론의 횟수가 가장 많았던 사람은 고자告子를 첫 손으로 꼽는다. 고자 사상의 연원이 무엇인지, 사승 관계는 어떠한지는 확실히 고증할만한 것이 없다. 조기의 『맹자주』에서는 “고자는 ‘고告’가 성이며 ‘자子’는 남자에 대한 일반적 호칭이고 이름은 ‘불해不害’이다. 그는 유가와 묵가의 도리를 함께 다루었던 사람인데 과거에 맹자에게 수학하였지만 성명性命에 관한 이치에 순수하게 투철하지 못했다. … 고자는 제자로서 질문하는 입장을 견지하였기 때문에 이를 장의 제목으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조기의 주에서는 고자가 “과거에 맹자에게 수학하였으며 … 제자로서 질문하는 입장을 견지했다”[1]고 말했는데 비록 고자가 맹자의 제자인지 명백하게 단언하진 않았으나 단언한 것과 실상 큰 차이가 없다.

후세에는 조기주에 근거하여 결국 고자가 맹자의 제자라고 인정해버리기도 했지만, 근대의 학자들은 대부분 조기주에서 말한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간주한다. 『맹자』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맹자와 고자의 논쟁은 모두 고자가 먼저 주장을 개진한 다음에 맹자가 비판하는 방식이지, 결코 고자가 질문한 다음에 맹자가 답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러므로 “제자로서 질문하는 입장을 견지했다”의 ‘질문’은 실상과 부합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맹자』에 기재된 바에 따르면, 맹자의 여러 제자들은 맹자에게 질문을 청하였을 때 질문하는 말에 모두 의문을 표시하는 어휘를 통해 전해오는 어떤 말이 믿을만한지 여부를 묻거나, 혹은 어떤 일에 담긴 의미[義理]가 무엇인지 묻거나, 어떤 행위는 어떠한 경로를 거쳐야 하는지 묻곤 하였다. 고자의 말은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는 것이거나 혹 맹자의 이론을 공격한 것이었는데 어조가 확고하여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제자가 스승에게 질문을 청하는 태도와는 전혀 무관하다. 고자는 질문하지도 않았으며 또 제자가 질문할 때 취해야 할 예의를 보이지도 않았으니 조기주에서 “제자로서 질문하는 입장을 견지했다”고 한 말은 『맹자』 내에서 근거를 찾아볼 수가 없다. 고자가 필시 맹자의 제자가 될 수 없는 것 역시 여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자는 “사람의 본성은 선이나 불선으로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공자가 “사람의 본성은 서로 근사하지만 후천적 습관에 따라 서로 멀어진다”고 말한 것과 매우 밀접하다. 그는 “의義는 외부적인 것이지 내부적인 것이 아니다”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공자가 의義의 작용[功用]을 설명한 것과 상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조기주에서 ‘고자는 유가와 묵가의 도리를 함께 다루었다’고 말한 것은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맹자』에 기재된 맹자와 고자의 논쟁은 모두 네 차례이다. 앞의 세 차례는 인간의 본성[人性]이 논쟁의 주제였고, 네 번째는 고자가 본성에 대한 주장 및 ‘인내의외仁內義外’의 논리를 말하였는데 맹자가 논변한 것은 고작 의외義外의 문제일 뿐 나머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단락을 나누어 기술하되 먼저 인성과 관련이 있는 논쟁의 정황을 기술하고, 다음으로 의외와 관련이 있는 논쟁의 정황을 기술한 뒤 이에 대하여 각각 간략하게 평가함으로써 맹자가 견지했던 논증이 정밀하고 정당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고자 한다.

고자가 말했다. “식욕과 색욕은 본성이다.”[2]

고자가 여기에서 말한 것에는 본성의 두 가지 주요 항목을 거론하여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고, 본성의 두 가지 기본적인 작용을 거론하여 보여준 것이라 할 수도 있다. 맹자는 고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아무런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기에 결국 찬성을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반대를 했다는 것인지 억측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는 평가의 대상에 속하지 않는다.

고자가 말했다. “타고난 것이 본성이다.”
맹자가 말했다. “타고난 것이 본성이라는 말은 하얀 것을 하얗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가?”
고자가 말했다. “그렇다.”
맹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하얀 깃털의 흼은 하얀 눈의 흼과 같으며, 하얀 눈의 흼이 하얀 옥의 흼과 같은가?”
고자가 말했다. “그렇다.”
맹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개의 본성이 소의 본성과 같으며, 소의 본성이 인간의 본성과 같은가?”[3]

이는 일면 본성의 적용 범위와 관련된 논쟁이고, 또한 한편 본성의 정의와 관련된 논쟁이라 말할 수도 있다. “타고난 것이 본성이다”는 고자가 본성에 대하여 내린 정의라고 말할 수 있는데, 맹자는 이 정의가 지나치게 넓어서 본성의 핵심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했다. “개의 본성은 소의 본성과 같으며, 소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과 같은가?”는 고자의 정의로부터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을 제시함으로써 고자가 내린 정의의 부당함을 비판한 것이다.

“타고난 것이 본성이다”는 일단 형식적으로 봤을 때 본성에 대한 고자의 정의라고 확언할 수 없으나 고자가 아래에서 말한 내용을 통해 추측해보면 본성의 정의가 되기에 충분하여 사실상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정의는 동일판단이여야 한다. 주어와 술어가 함축하고 있는 내용과 포괄하는 범위가 각각 완전히 동일해야지 약간의 불일치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전칭긍정판단은 주어가 비록 술어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을 모두 함축하고 있으나, 술어에서 말하는 내용 외에 다른 내용을 또 함축하고 있는지 여부는 표시할 수 없다. 또 주어가 지칭하는 사물은 비록 술어에서 지칭하는 사물 안에 완전히 포괄되지만, 주어가 지칭하는 사물 전부를 모두 포괄하는 것 이외에 술어에서 지칭하는 사물 안에 별도로 또 포괄하는 것이 있는지 여부는 표시할 수 없다.[4] 그러므로 “타고난 것이 본성이다”는 비록 전칭긍정판단이지만, 동일판단으로 볼 수 없으며 또한 어떤 것에 대한 정의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아래의 문장에서 맹자와 고자가 나눈 문답에 의거하여 추론해보자면, 고자는 확고하게 “타고난 것이 본성이다”를 본성에 대한 정의로 간주하고 있다. 고자는 맹자가 “타고난 것이 본성이라는 말은 하얀 것을 하얗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가?”라고 질문한 것에 대하여 약간의 주저함도 없이 긍정의 대답을 하였다. “하얀 것을 하얗다고 말한다”는 주어와 술어의 명칭과 의미가 동일하다. 그러므로 이 [명제가] 구성하고 있는 판단은 전형적인 동일판단이다. “타고난 것이 본성이다”는 고자가 “하얀 것을 하얗다고 말한다”와 동일한 유형이라고 간주하였으니 또한 동일판단에 속한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므로 고자의 입장에서 볼 때 生(타고난 것)과 性(본성)은 명칭이 다르지만 의미가 동일하였으며, 함축하고 있는 내용과 포괄하는 범위가 다름이 없다. “타고난 것이 본성이다”는 모든 선천적 심리 작용이 본성임을 나타내고 있으며, 또한 모든 본성은 선천적 심리 작용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맹자가 말한 본성은 고자가 말한 것과 다르다. 그 내용은 비교적 많고 그 범위는 비교적 좁다. 맹자는 ‘본성은 선천적이다’를 인정했지만 ‘선천적인 것이 본성이다’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 하나의 정황은 맹자 자신이 말한 것을 시험 삼아 인용하여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맹자가 말했다. “ ‥ 측은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은 인仁이고, 부끄럽고 미워하는 마음(수오지심)은 의義이며, 공경하는 마음(사양지심=공경지심)은 예禮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시비지심)은 지智이다. 인의예지는 밖에서부터 나에게 녹아든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부터 소유한 것인데 이를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5]

이는 맹자가 성선설을 설명한 대목이다. 맹자는 측은지심 등 네 가지 마음을 본성으로 간주하였으며, 이 네 가지 마음은 사람이 본래부터 소유한 것이지 외부의 힘에 의하여 조성된 것이 아니다. 이 몇 구절의 말로부터 보건대 맹자 역시 본성은 선천적인 것이라고 여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선천적인 것에 대해서 맹자는 본성이라 통칭하지 않았고, 그 중의 일부분을 명命이라고 한정하였다.

맹자가 말했다. “입이 맛있는 것을 추구하고 눈이 아름다운 색을 추구하고 귀가 좋은 소리를 추구하고 코가 향기를 추구하고 사지가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은 본성이지만 그 안에는 명이 있기 때문에 군자는 본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인仁과 부자의 관계, 의義와 군신의 관계, 예와 주인-빈객의 관계, 지智와 현자의 관계, 성인과 천도天道의 관계는 명이지만 그 안에는 본성이 있기 때문에 군자는 명으로 인정하지 않는다.”[6]

맹자의 말에 따르면 귀와 눈의 지각과 기호는 선천적이지만 군자는 이를 본성으로 칭하지 않고 단지 명이라고만 칭한다. 그러므로 맹자는 선천적인 것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하나는 명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본성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측은지심 등 네 가지 마음만 독점하는 명칭으로서 본성을 사용하였다.

맹자가 말했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드물다. 보통 사람들은 이를 버렸고 군자는 이를 보존한다.”[7]

맹자가 사용한 본성은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드물다”고 했을 때의 ‘드문 것(이하 “약간의 차이”로 번역하겠음 - 역자주)’만 지칭하여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귀와 눈의 지각과 기호는 사람과 짐승이 공유하는 것이지만 약간의 차이에 속하지 않는다. 인의예지는 오직 인간만 지니고 있으며 짐승들과 공유하지 않으며 결코 약간의 차이에 속하지도 않는다. 맹자가 귀와 눈의 지각과 기호를 명이라고 칭할 뿐 본성이라 칭하지 않았기 때문에 맹자가 사용하는 본성을 만약 정의로 바꿔서 말한다면 ‘본성은 하늘로부터 얻었으나(선천적이지만 - 역자주) 짐승과 공유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맹자가 말한 본성은 선천적이라는 성질 이외에 또 사람만 갖추고 있다는 성질을 함축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내용이 고자가 말한 본성에 비하여 많은 것이다. 선천적인 것 중에 오직 일부분만이 본성이며 그 나머지 부분은 명이지 본성이 아니다. 그러므로 맹자가 사용한 본성이란 말의 범위는 고자가 말한 본성에 비하여 좁은 것이다. 맹자와 고자가 똑같이 본성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 정의는 같지 않기에 결국 본성의 의미에 관한 논쟁을 야기하였다.

맹자는 이 논변 안에서 명백하게 자신이 말하는 본성의 정의를 내보인 적이 없다. 단지 “개의 본성이 소의 본성과 같으며, 소의 본성이 인간의 본성과 같은가?”라고 말함으로써 고자가 사용하는 본성의 정의가 부당함을 드러내었을 뿐이다. 맹자의 주장에 의거하여 엄격하게 추론해보자면 개의 본성과 소의 본성이라는 두 명칭은 맹자의 입에서 나왔지만 자신의 주장과 위배된다는 문제를 피하지 못한다. 맹자는 단지 인의예지 등 네 가지 마음을 본성으로 간주하였을 뿐 귀와 눈의 지각과 기호는 명으로 간주하였다. 개와 소는 단지 귀와 눈의 지각과 기호만 갖추었을 뿐 인의예지 등 네 가지 마음을 갖추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개와 소는 당연히 명만 있을 뿐 본성은 없다고 해야 한다. 단지 개의 명과 소의 명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 개의 본성과 소의 본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맹자가 ‘개의 본성과 소의 본성’이라 말한 것은 혹 지금 당장 고자와 논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타고난 것이 본성이다”라고 한 고자의 말에 따르고, 자신이 명칭을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시시콜콜 따지지 않음으로써 쓸모없는 말싸움을 피한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맹자가 이 두 명칭을 사용한 것은 자신의 입장을 위배한 측면이 있으나 평가의 측면에서는 크게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

이 논쟁에서 고자가 말한 것은 논증이고, 맹자가 말한 것은 반론이다. 여기에서는 맹자가 과연 논파의 실효를 거두었는지 논해보고자 한다. 맹자가 피력한 반론의 중점은 “소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과 같다”가 “타고난 것이 본성이다”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결론인지와 그에 따르는 함의의 부당함을 드러내는 것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맹자의 반론이 과연 효과를 거두었는지 여부는 “소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과 같다”의 성립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 만약 성립하지 못한다면 반론은 유효할 것이고, 성립할 수 있다면 반론은 무효할 것이다. “소의 본성은 인간과 같다”라고 한 맹자의 비판은 고자가 “하얀 깃털의 흼은 하얀 눈의 흼과 같으며, 하얀 눈의 흼이 하얀 옥의 흼과 같은가?”라는 말을 인정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소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과 같다”의 성립 여부를 평가하려면 당연히 “하얀 깃털의 흼 … 하얀 옥의 흼과 같은가?”라는 말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고자가 “하얀 깃털의 흼 … 하얀 옥의 흼과 같은가?”를 시인한 것은 객관적인 입장으로 봤을 때 타당하다 말할 수도 있고 오류를 범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하얀 깃털의 흼과 하얀 눈의 흼, 하얀 눈의 흼과 하얀 옥의 흼은 어떤 관점에서는 확실히 서로 유사하지만 다른 관점에서는 매우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얀 깃털의 흼”의 개념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흼은 일체 모든 흼에 대한 총칭이고, 일체 모든 흼 안에는 종류마다 다른 흼이 있다. 부류에 따라 말하자면 흼은 ‘대류(大類, 대분류 혹은 상위분류)’이고, 옅은 흰색(月白色)과 뿌연 흰색(乳白色) 등은 ‘소류(小類, 소분류 혹은 하위분류)’이다. 명칭에 따라 말하자면 흼은 순자가 말한 ‘공명共名’이고, 옅은 흰색과 뿌연 흰색 등은 순자가 말한 ‘별명別名’이다.[8] 여기서는 서술의 편리함을 위하여 일단 대류와 공명에 속하는 흼을 ‘공백共白’이라 하고, 소류와 별명에 속하는 흼을 ‘별백別白’으로 칭하기로 하자.

공백은 극도로 추상적이고, 별백은 비교적 구체적이다. 하얀 깃털은 흼과 깃털이라는 두 개념이 결합해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일종의 복합개념이다. “하얀 깃털의 흼”이라고 할 때의 흼은 깃털의 별백을 지칭할 수도 있고 깃털의 공백을 지칭할 수도 있다. 하얀 깃털을 한 가지로 봐서 쪼개지 않고 깃털에다가 흼을 붙여서 분리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의미의 흼은 별백이다. 이 별백은 “하얀 깃털의 흼”이라고 칭할 수 있다. 하얀 깃털을 흼과 깃털이라는 두 가지 성분으로 나눈다면 깃털에서 흼을 뽑아내고 흼과 깃털을 쪼개서 다시 합하지 않는다면 이 때 말하는 흼은 응당 공백일 것이다. 이 공백 역시 “흰 깃털의 흼”이라고 칭하지 않을 수 없다. 공백은 단지 하나이지만, 별백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므로 공백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각 사물의 흼은 똑같은 흼이니 ‘서로 같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별백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각 사물의 흼은 서로 일치하지 않으니 ‘동일하지 않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하얀 깃털의 흼, 하얀 눈의 흼, 하얀 옥의 흼 이 세 가지가 서로 동일한지 여부는 채택한 관점과 취하고 있는 의미에 의거하야 답변이 달라질 것이다.

종합의 관점을 채택하여 흼과 깃털·눈·옥 등을 결합해 그 별백을 논한다면 당연히 ‘같지 않다’고 답변해야 한다. 분석의 관점을 채택하여 흼과 깃털·눈·옥 등을 분리해 그 공백을 논한다면 당연히 ‘같다’고 답해야 한다. 맹자의 질문에 대한 고자의 대답은 분석의 관점에 의거하여 긍정의 답변을 하였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한쪽으로 치우친 관점을 면하지 못하고 있으나 그렇다고 절대적으로 착오를 범했다고 말할 순 없다. 개의 본성, 소의 본성, 인간의 본성 이 세 개념 역시 마찬가지로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개·소·인간의 본성을 쪼개서 보면 이 본성은 당연히 개·소·인간이 모두 공유하는 공통 본성을 지칭할 것이고, 개·소·인간과 본성을 종합해서 보면 개·소·인간의 공통 본성 외에 개·소·인간이 개별적으로 갖추고 있는 특성까지 함께 지칭하게 된다. 그러므로 개의 본성, 소의 본성, 인간의 본성이 유사한지 여부를 논하는 것 역시 채택하는 관점이 분석인가 종합인가에 따라서, 그리고 취하고 있는 의미가 공통 본성인가 특성인가에 따라서 상반된 답변을 내놓게 된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말하자면 “소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과 같다”는 절대적으로 성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또한 맹자가 논파할 수 있었는가 역시 절대적으로 유효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기껏해야 고자의 사상이 완전하게 주도면밀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계속해서 맹자와 고자의 입장에 의거하여 “소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과 같다”의 성립 여부를 분석해보겠다. 맹자의 입장에 따르면 이 구절은 결코 성립하기 어렵다. 반면 고자의 입장에 따르면 이 구절은 성립할 수 있다. 맹자가 바라본 인성은 인의예지만을 지니고 있을 뿐 지각과 기호에 관해서는 명일 뿐 본성이 아니다. 소의 본성은 그렇지 않다. 소는 고작 지각과 기호만을 갖추고 있을 뿐 인의예지를 갖추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성과 소의 본성은 그 내용상에서 현격차이 차이를 보이며 공통점이 있을 수 없다. 소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에 공통점이 없다면 자연스럽게 “소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과 같다”고 말할 수 없다.

고자가 말했다. “인간의 본성으로 인의를 만드는 것은 땅버들로 잔과 그릇을 만드는 것과 같다.”[9]

이는 맹자의 말에 반박한 것이다. 그 의미를 추측하자면 아마도 인의를 후천적인 교육으로부터 획득한 것으로 봐야지 선천적인 것으로부터 나오지 않았으며 또한 본성이 본래부터 소유한 것이 아니라는 것 같다. 이로부터 말하자면 고자가 바라본 인간 본성은 또한 지각과 기호만 포함할 뿐 인의예지를 포함하지 않고 있으니, 소의 본성 안에 인의예지를 포함하지 않는 것과 서로 동일하다. 인간이 지각하고 기호하는 내용은 소가 지각하고 기호하는 내용과 서로 완전히 동일하지 않으나, 지각과 기호가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인간의 본성과 소의 본성에 어떤 공통점이 존재한다면 자연스럽게 서로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으며, “소의 본성이 인간의 본성과 같다”는 명제는 이 점에서 성립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므로 “소의 본성은 인간의 본성과 같다”는 맹자의 입장에서 터무니없으며 불합리하겠지만, 고자의 입장에서는 사실에 부합하며 이치에 위배되는 것이 없다고 여길 것이다. 맹자의 입장에서 “타고난 것이 본성이다”라는 고자의 이론을 논파하려면, 반드시 고자가 선천적인 것으로 인정하였지만 본성에 속하지 않는 사례를 거론하여 보여줌으로써 예증을 해야만 비로소 고자가 자신의 모순을 보고는 고개를 숙여 신복하게 될 것이다. 지금 열거한 예증으로는 고자가 이치에 위배되는 것이 없다고 할 것이며 당연히 논파의 실효를 거둘 리 없다. 그러므로 이 논쟁은 결국 아무런 결과가 없는 한 바탕 논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1] 『맹자주소』권11, “告子者, 告, 姓也, 子, 男子之通稱也, 名不害. 兼治儒墨之道者, 嘗學於孟子, 而不能純徹性命之理. 論語曰: ‘子罕言命.’ 謂性命難言也. 以告子能執弟子之問, 故以題篇.”
[2] 『맹자』「고자상」4, 告子曰: “食色, 性也.”
[3] 『맹자』「고자상」3, 告子曰: “生之謂性.” 孟子曰: “生之謂性也, 猶白之謂白與?” 曰: “然.” “白羽之白也, 猶白雪之白, 白雪之白, 猶白玉之白與?” 曰: “然.” “然則犬之性, 猶牛之性, 牛之性, 猶人之性與?”
[4] “모든 호랑이는 동물이다.”라는 명제에서 모든 호랑이는 동물이라는 집합 안에 포함되지만, 동물이라는 집합 안에는 호랑이 외에도 다른 동물들(예컨대 사자, 사슴 등)이 요소가 존재하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5] 『맹자』「고자상」6, 惻隱之心, 仁也. 羞惡之心, 義也. 恭敬之心, 禮也. 是非之心, 智也. 仁義禮智, 非由外鑠我也, 我固有之也, 弗思耳矣.
[6] 『맹자』「진심하」24, 孟子曰: “口之於味也, 目之於色也, 耳之於聲也, 鼻之於臭也, 四肢之於安佚也, 性也, 有命焉, 君子不謂性也. 仁之於父子也, 義之於君臣也, 禮之於賓主也, 智之於賢者也, 聖人之於天道也, 命也, 有性焉, 君子不謂命也.”
[7] 『맹자』「이루하」19, 孟子曰: “人之所以異於禽於獸者幾希, 庶民去之, 君子存之.”
[8] 순자는 개념의 기본적인 종속 관계를 ‘공명’과 ‘별명’이라는 두 단계로 나누었다. ‘공명’은 속개념이고 ‘별명’은 종개념이다. ‘공명’은 ‘별명’과 상대를 이루는데 한 유형에 속한 사물이 공유하고 있는 명칭이 ‘공명’이다. 예를 들어 ‘동물’은 공명이고 ‘말’은 별명이다.
[9] 『맹자』「고자상」1, 告子曰: “性, 猶杞柳也. 義, 猶桮棬也. 以人性為仁義, 猶以杞柳為桮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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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대제 선생님 글이네요. 중화권 철학계에서 "분석적인 글"을 쓰시는 분들은 꽤 있지만, 그 중 분석철학적 스타일에 가장 가깝고 좋은 글을 쓰시는 분들은 항상 대만에 계신듯합니다. 모종삼이라던가 채인후라던가.

(본토쪽에서 분석적인 글은 아무래도, 영미권 분석철학보다는 청대 고증학 전통을 계승한 글 같다는 생각을 자주합니다. 이론에 대한 논증보다는 문헌적-문자적-사학적 타당성을 논증한다고 할까요? 펑유란이라던가 리쩌허우 등도 그렇고요. 상대적으로 일본도 이렇다는 느낌을 자주 받습니다.)

(2)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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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이지만, "성"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전 잘못된 전제 위에서 성립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채인후-모종삼-진대제 모두 암묵적으로 성이 "형이상학적" nature에 가깝다고 보는듯하는데, 무언가 이게 논의를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당대 영미권 분석철학에서도 행동주의자 대세였고, 마음을 곧 disposition으로 치환하려했으니 개인적 문제가 아닌 시대적 한계라 볼 수도 있겠죠.)

그레이엄이 성을 nature-disposition이 아닌, 무언가 계속 성장하는 방향성이라는 논문으로 큰 줄기는 바꾸었지만 여전히 무언가 이상한 지점도 있고...

차라리 오늘날 시점에서는 (형이상학적 정의가 아닌) 인간 본성과 (생물학의 철학에서 말하는) innateness에 가깝게 해석하는게 가장 정확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정상적인" 인간이 태어나 "정상적인" 환경 속에서 발달한다면 가질 특성 정도로요.

저는 이 두 가지 "정상적인"의 조건이 무엇인지 맹자나 순자, 고자, 장자 등이 모두 이견을 달리했다 여깁니다.

어떤 의미에서 과거 경험과학과 철학이 구분되지 않던 시절의 논의를, 개별 과학의 용어가 아닌 형이상학-인식론 등의 용어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가진 한계가 아니였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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