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ㅎㅎ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읽다
궁금한 점이 생겨 질문드리게 되었습니다!
먼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의 '보편적인 모랄은 있을 수 없다' 내용 중 한 부분입니다.
"절망으로 말하면 이 표현의 뜻은 극히 단순하다. 그 표현은 우리가 우리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에만 기대를 가질 뿐이라는 것, 우리의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가능성 전부에 기대를 가질 뿐이라는 것, 우리의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가능성 전부에 기대를 가질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이 그 무엇을 원할 때에 거기에는 늘 가능의 요소가 개재한다. 나는 어떤 친구가 오는 것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논리철학논고』의 2.012~2.0124 부분인데요!
2.012 논리에서는 아무 것도 우연적이지 않다: 사물이 사태 속에 나타날 수 있다면, 그 사태의 가능성은 사물 속에 이미 선결되어 있어야 한다.
2.0121 만일 그 자체로 홀로 존립할 수 있을 터인 어떤 하나의 사물에 어떤 하나의 상황이 나중에 가서 들어맞게 된다면, 그건 말하자면 우연으로 보일 것이다.
사물들이 사태들 속에 나타날 수 있다면, 이 점은 이미 그 사물들 속에 놓여 있어야 한다.
(논리적인 어떤 것은 단지-가능한-것일 수 없다. 논리는 모든 가능성 각각을 다루며, 모든 가능성들은 논리의 사실들이다.)
우리가 공간적 대상들을 결코 공간 바깥에서, 시간적 대상들을 시간 바깥에서 생각할 수 없듯이, 우리는 어떠한 대상도 그것과 다른 대상들과의 결합 가능성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만일 내가 대상을 사태라는 연합 속에서 생각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이러한 연합의 가능성 바깥에서 생각할 수 없다.
2.0122 사물은 그것이 모든 가능한 상황들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한 자립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립의 형식은 사태와의 연관 방식, 즉 비자립의 형식이다. (낱말들이 서로 다른 두 방식으로-단독으로, 그리고 명제 속에서-등장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0123 만일 내가 대상을 안다면, 나는 그것이 사태들 속에서 나타날 가능성들도 전부 안다.
(이러한 가능성 각각은 모두 대상의 본성 속에 놓여 있어야 한다.)
나중에 가서 새로운 가능성이 발견될 수는 없다.
2.01231 어떤 하나의 대상을 알기 위해 내가 그 대상의 외적 속성들을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는 그 대상의 내적 속성들은 모두 알아야 한다.
2.0124 모든 대상들이 주어진다면, 그와 더불어 모든 가능한 사태들도 또한 주어진다.
<질문>
- 위의 두 내용을 읽으며 공통적으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다고 느꼈는데요. 사르트르가 비트겐슈타인의 가능성에 대한 내용에 영향을 받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1-2. 제가 잘못 짚은 것이 아니고, 실제로 사르트르가 비트겐슈타인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어떤 영향을 받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1-3. 만약 제가 잘못 이해해서 두 내용이 비슷하다고 느낀 거라면, 위의 사르트르와 비트겐슈타인의 가능성 이야기에서 어떤 점이 다른 것인지 궁금합니다! -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그런 가능성이(?) 사르트르의 실천적인? 그런 측면의 가능성(?)으로 이어져서 실존주의까지 왔을 수도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비트겐슈타인과 사르트르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기도 하고,
서치 능력이 아직 많이 부족해서 찾아보았는데도 잘 모르겠더라고요ㅠㅠ
아는 게 거의 없어서 이런 질문밖에 하지 못함에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