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립키와 프레게(동일성에 관하여)

안녕하세요, 늘 좋은 글 잘 읽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크립키에 대해 처음으로 입문하고 공부하고 있는데, 그의 주장에 설득이 많이 되더라고요. 이름은 고정지시어고, 한정기술구는 비 고정 지시어라는 논박이 설득력이 있었는데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기술 이론을 폐지(?)했을 때, 애초에 프레게가 뜻과 지시체에 관하여에서 다루고자 했던 (a) 동일성, 특히 정보값의 문제를 적절히 해명할 수 있는가 의문이 듭니다.

(b) 그리고 다음과 같은 비 일관적일 수 있어 보이는 의문도 제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크립키의 의미론은 자연스레 (1)을 함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Hesperus 와 Phosphorous 가 동일한 것을 지시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1) "Hesperus is Phosphorous" and "Hesperus is Hesperus" express the same proposition
(2) The proposition expressed by the former is knowable only a posteriori and hence not knowable a priori.
(3) The proposition expressed by the latter is knowable a priori.
(4) Therefore, "Hesperus is Phosphorous" and "Hesperus is Hesperus" express distinct propositions.

(제가 정리한 부분이 틀리거나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세요)
이 비 일관성을 해명하기 위해, 어떻게 인식되는지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고 표현되는 명제의 범위를 지시체에만 한정하는 방식도 생각을 해보았는데, 그럴 경우 다른 모든 기획까지 무너지는 것 같아서,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 궁금하네요. 더군다나 이 문제는 앞서 (a)에서 제기했듯이, 애초에 프레게가 해명하고자 했던 문제인 것 같은데, 저 상황속에서 크립키가 정보값 혹은 인지적 가치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을까요?

정리하자면, (a) 기술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 야기되는 동일성과 관련된 정보값 문제 (b) 비일관성의 문제를 크립키가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아래는 엄밀하지 않은 그림에 불과한 상상인데, 혹시 한정기술구를 고유이름의 본질을 기술하는, 그래서 필연적으로 고정 지시하게 만들어서 여전히 기술이론을 가지고 정보값을 해명하는 학자가 있나요? 또는 정보값을 기술이론이 아닌, 후험성 자체에 두어서, 기술이론을 폐지하고 밀식 이름을 지지하면서 정보값을 해명하는 시도는 어떤가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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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크립키라면 이 말이 사실 다음과 같은 의미라고 설명하지 않을까요?

Hesperus is "Hesperus."

즉, 내가 지시하는 저 별(Hesperus)은 "Hesperus"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의미죠. 그렇다면 위의 문장은 후험적이고 우연적인 문장이 될 거예요. 저 별(Hesperus)이 필연적으로 "Hesperus"라고 불려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가령, "Hisperus"나 "Gesperus"라고 불릴 가능성도 있었겠죠.

(2)

더밋이 말씀하신 것과 비슷한 전략을 사용해서 한정기술구를 통해 고유명을 설명하는 걸로 기억해요. 그러니까, 더밋은 모든 양상 문맥을 포괄할 수 있는 아주 넓은 범위의 한정기술구가 있다면, 그 한정기술구는 고유명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거죠. (그런데 이런 더밋의 입장은 크립키에 의해 다시 비판을 받아요. 크립키가 『이름과 필연』 서문에 두 가지 요점으로 더밋을 비판하고 있죠. 자세한 건 아래 링크에서 “3. 고정성의 범위를 문제 삼는 입장에 대한 비판”을 보시면 됩니다.)

(3)

개인적으로는 로티의 크립키 비판이 설득력 있다고 생각해요. 요약하자면, (a) “플라톤의 가장 뛰어난 제자이지만 우리가 아는 그 ‘아리스토텔레스’로 지시되지는 않는 사람”과 (b) “플라톤의 가장 뛰어난 제자는 아니지만 우리가 아는 그 ‘아리스토텔레스’로 지시되는 사람”이 있을 경우, (a)와 (b) 중 누구를 진정한 ‘아리스토텔레스’로 불러야 할 지는 결국 사회적 선택의 문제라는 비판이에요. 크립키는 (b)가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 생각은 사실 크립키 본인의 직관을 강하게 전제한다는 게 로티의 지적이에요. (실제로, 성서비평에서 이런 상황이 자주 발생하잖아요. 가령, 요한복음의 실제 저자와 예수의 제자 요한 중에 누가 ‘요한’이라는 이름에 정말 걸맞을지 말이에요. 요한복음의 저자가 사도 요한이 아니라고 해서, 그 저자를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부르는 게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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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감사합니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정보값과 관련하여

이 경우에, 이런 식으로 적용이 되는 것일까요?

(1) Hesperus is "Hesperus"
(2) Hesperus is Phosphorous
자연스레 다음과 같은 명제도 따라 나올 것 같아요.
(3) Phosphorous is "Phosphorous"


(4) "Hesperus" is "Phosphorous"

(4)의 경우에, 이 역시도 프레게가 처음에 비판하고자 했던, 동일성을 이름에 적용시키는 경우, 정보값이 사소해져서, 적절한 지식을 얻을 수 없는 그 경우에 속하지 않을까요? 또 한편으로는, 이름 동일성을 통해서 정보값을 확보할 수 있는 주장이 있다면, 크립키를 옹호할 수 있는 근거로 쓰일 수도 있겠네요.

아래 블로그 글은 잘 읽어보았습니다. :) 크립키가 자신의 직관을 강력하게 전제하고 있다는 비판은 납득이 되는데, 그러한 사실이 곧바로 고유명이 모든 세계에서 고정지시된다는 주장을 논박하는지는 조금 더 생각을 해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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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내용은 순전히 제가 크립키의 입장이라면 대답했을 법한 내용을 추측한 거라, 실제 크립키를 옹호하는 학자들이 뭐라고 할 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여기에는 뭔가 혼동이 있는 것 같네요. (1), (3), (4)에서는 "is"가 계사로 쓰이는 반면, (2)에서는 동일성 기호로 쓰이고 있어서요. (4)의 내용은 ""Hesperus"라고 불리는 것은 "Phosphorous"라고 불리는 것과 동일하다."라는 의미가 되어야 정확할 텐데, 이건 크립키에게 전혀 문제될 게 없는 후험적 필연적 문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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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네요. (4)는 크립키에게 문제될 게 전혀 없는 필연, 후험적 문장인데.

주된 관심사가 정보값에 대한 것이다보니, 여전히 크립키의 이론을 따랐을 때, 정보값, 즉 H=P와 H=H를 지시체로 이해했을 때, 정보값이 사소해지는 경우에서 어떻게 정보값을 확보할 수 있을지 시원치 않긴 하네요.

어떤 명제가 후험적이라는 점, 그렇기에 이 명제가 우리에게 일종의 관찰 혹은 경험을 요구한다는 점으로부터 정보값을 얻어낼 수는 없을지..ㅎㅎㅎ

별개로, 크립키의 주된 비판 타겟이 프레게는 아니겠지만, 프레게/러셀을 비판하고 있는 게 사실이고, 특히 프레게의 경우, 그가 '뜻'을 상정하면서 자신의 의미론을 전개했던 주된 동기가 동일성 해명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크립키가 그것을 적절하게 해명하지 않는 이상, 고유명이 한정기술구과 동의적이지 않다는 것에는 동의가 되면서도, 여전히 기술이론만큼 유용한 의미론을 전개하는지는 의문이 들긴 하네요. 실제 학계에서는 크립키의 기술이론 논박이 얼만큼 받아들여지는 편인지 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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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도넬란이나 카플란 이후의 아주 최근 언어철학적 논의들을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제가 본 한에서는, 크립키의 입장이 거의 언어철학의 정설처럼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요.

다만, 제 베이스가 현상학-해석학 전통이다 보니, “우리 프레게주의적 입장도 죽은 건 아니야! 니들이 관심이 없어서 잊혀졌을 뿐이야!”라고 외치고 싶네요;;

실제로, 프레게주의는 "의미가 지시를 결정한다(Meaning determines reference)."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크립키주의는 "지시가 의미를 결정한다(Reference determines meaning)"라는 구호를 내세우는데, 후설-하이데거-가다머 전통은 프레게주의로 같이 묶일 수 있거든요. 라폰트(C. Lafont)가 쓴 The Linguistic Turn in Hermeneutic Philosophy라는 책이 이 점을 아주 잘 설명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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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레퍼런스 추천 감사합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성서비평의 근간에도 철학적 해석학과 연결된 부분이 많다고 느껴서, 철학에 입문하게 된 케이스인데(티슬턴과 벤후저의 영향도 있겠지요), 언어철학을 접해보니 오스틴과 관련된 화용론, 화행, 언어게임등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접점도 찾기 어렵고, 응용할 부분도 많지 않다고 느끼고 있던 참이었거든요. 현상학-해석학과 언어철학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잘 공부해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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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래는 제가 번역 중에 있던 아티클 후반부인데, (자세한 내용이 없는 레퍼런스 덩어리이지만) 질문을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네요.

크립키의 반박에 대해, 프레게 기술주의의 중요한 옹호하는 Marcus로, 그녀는 이름이 대상에 대한 부가된 기술(abbreviated descriptions)이 아니라 일종의 꼬리표(tags)라 주장했다. 프레게 기술주의자들은 크립이의 양상적/다른 반박에 대해 다양한 답을 내놓았다. 특히 플랑팅카(1978), 더밋(1981), 소사(2001)을 살펴보라. 프레게주의 답변에 대한 재반박은 Soames (1998, 2002), 카플란 (2005)을 보라. 양상 반론을 해결하면서 기술주의를 옹호하는 관점은 Rothschild(2007)을 보라. 프레게 기술주의에 대한 크립키의 다른 반론들을 보려면, 명사(names) 아티클을 참고하라.

크립키의 주장은, 프레게주의자들에게 프레게 기술주의를 부정할 강한 근거를 제시해주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유 명사의 뜻이 화자가 그 이름와 연관시킨 어떠한 한정 기술구의 뜻이 아니라는 생각을 (프레게 기술주의) 대신 갖는다. 이러한 비-기술주의 프레게주의의 중요한 문제는, (이름의 뜻이 이름의 지칭을 만족시키는 고유한 조건이 아니라면) 이름의 지칭을 결정해줄 수 있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해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비-기술주의 프레게주의는 맥도웰(1977), 에반스(1981)에 의해 옹호되었다. 이러한 관점을 가장 복잡하고 잘 발전시킨 버전은 프레게 의미론과 가능 세계 의미론을 혼합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론에 대한 인식론적 두 세계 접근법은, 데이빗 차머스에 의해 발전되었다. 차머스(2004, 2006)을 보라.

여기서 프레게 기술주의에 대한 크립키의 양상 반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21) 만약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한다면, 필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22) 만약 아리스토텔레스가 존재한다면, 필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이다.

프레게 기술주의에 따르면 "고대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명사와 내가 연관시킨(associate) 기술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문장은 표현의 대체만 있지 같은 내용으로 봐야합니다. 따라서 (프레게 기술주의를 따르면) 이 두 문장은 같은 명제이고 같은 진리값을 가집니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무언가 문제가 있죠? 이게 크립키의 양상 반론입니다.)

정작 무슨 아티클인지 안 적었네요;;

sep의 theories of meaning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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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제가 크립키를 읽는 방식은 이렇습니다.
프레게는 동일성 문장의 정보성 문제를 의미론적 차원(즉, 뜻)에서의 차이로 설명하려 했고 크립키는 이를 인식론적 차원에서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샛별은 개밥바라기별이다"가 "샛별은 샛별이다"와 다른 뜻을 가지고 있고,
우리가 이 문장을 이해할 때 서로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오는 차이라는 게 프레게의 설명인 반면, 크립키는 선험성-후험성과 필연성-우연성이 항상 같이 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둘 다 필연적 문장이지만 하나는 선험적, 하나는 후험적이기 때문에 정보성의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b)
이 논증에서 핵심적인 전제는

두 명제가 동일하다면 두 명제가 알려지는 방식도 동일하다

인 것 같습니다.

이 전제가 맞다고 생각하면 위와 같은 논증을 통해 무언가 주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논증은 잘못된 전제를 갖고 있습니다.
후자를 지지할만한 근거를 하나 찾자면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들에 대해 우리는 분명히 어떤 것은 알고 어떤 것은 모른다는 점입니다. 예컨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수학적 명제들의 참/거짓 같은 것 말이죠.
모든 수학적 명제가 필연적 참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수학의 참인 진술들은 모두 같은 명제를 표현할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들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습니다.
이는 표현하는 명제가 동일하다고 해서 그것이 알려지는 방식도 같으리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물론 정합적인 다른 설명도 가능할 것입니다)

--

Hesperus is "Hesperus"

는 문장만 놓고 보면 어떤 천체와 어떤 언어적 대상이 동일하다고 말하는 문장입니다.
조금 해석해서 읽어도 크립키가 "Hesperus"라는 고유명의 의미를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고 했을리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인과적 지칭이론을 설명하면서 순환적이라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크립키의 논의가 '저 별이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샛별은 개밥바라기별이 아닐 수도 있었다'는 것은 샛별이 '개밥바라기별'로 불리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저 별이 우리 세계에서 '개밥바라기별'이라고 부르는 별과 다른 별일 수도 있었던 경우를 따져보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독일에서 크립키 수업 들을 때도 이걸로 질문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때도 비슷한 답을 들었던 것 같구요.)


로티의 비판이 크립키가 주장하는 바를 정확히 어떻게 비판하는지는 잘 들어오지 않네요.
오히려 크립키가 괴델과 슈미트 사례에서 보이는 바는 기술이론에 따르면 괴델이 사실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한 것이 아니라 한 번도 들어본적 없는 슈미트라는 사람이 증명한 것이라면 '괴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사실 슈미트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건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로티가 지적하는 '사회적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진 잘 모르겠습니다만, 크립키는 '괴델'이라는 이름이 무엇을 지칭하는지는 언어 사회 안에서 어떻게 지칭이 이루어졌는지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크립키에 대한 다른 비판은 이런 것이 있습니다.
크립키는 확정기술구를 비고정지시어로 보았는데 이게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쳤던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크립키는 후자가 거짓이라고 했는데 사실 읽어보면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세계에서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쳤던 사람이 다른 가능세계에서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치지 않았을 수도 있죠. 만약 이 주장이 맞는다면 양상 논증은 성공적이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크립키가 가정법(subjunctive mood)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가장 최근에 나온 논문에서는 이런 논의들을 정리해서 "모든 지시어는 고정적이다"(All Designators are Rigid)라는 짧은 논문이 나오기도 했죠. (Harold Noonan의 논문입니다. 그 이전에 비판은 Kai Wehmeier의 "Mood, Modality, and Description"이라는 논문에도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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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게 맞는 것 같네요. 저 별이 저 별이 아닐 수도 있었다(다른 별일 수도 있었다)고 해야 크립키의 논의의 전체 맥락을 더 잘 담아내겠네요. 저처럼 단순히 “다른 이름으로 불릴 수도 있었다.”라고 하는 건, 상당히 제한적인 맥락에서만 크립키적 아이디어겠네요.

(2)

로티는 이 점을 비판하고 있어요. 한 마디로, ”’괴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사실 슈미트를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해서, 그게 별로 이상할 게 없다는 게 로티의 생각이에요. 이름이 무엇을 지칭하는지가 정말 사회 안에서 결정되는 거라면, 저 상황이 이상하지 않은 사회를 상상해 보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거죠. ‘아리스토텔레스’가 사실 필경사를 가리킬 수도 있다는 예시에서처럼, 실제로 고문헌을 분석하는 분야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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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라쿤님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이건 "is"를 동일성 기호로 받아들이기로 암묵적으로 전제한 게 아닌가 해서요. 제가 알기로, be 동사는 계사, 존재사, 동일성 기호 이렇게 세 가지로 쓰일 수 있거든요. 저 문장의 be 동사는 일상적으로는 계사로 읽는 게 가장 자연스럽지 않은가 해요. ”저 개는 ‘초코’이다.“처럼요. (그런데 이런 구분은 정말 오래 전에 파르메니데스 공부하면서 배운 거라, 이게 얼마나 일반적인 구분인지 확신하기가 어려워서 질문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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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티는 이 점을 비판하고 있어요. 한 마디로, ”’괴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사실 슈미트를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해서, 그게 별로 이상할 게 없다는 게 로티의 생각이에요.

아하, 그렇다면 로티의 비판은 우리의 언어 활동에 대한 크립키의 직관이 받아들일 만한가 하는 것이겠군요. 이해가 갑니다. 저도 크립키가 강력한 논증을 제시하면서도 직관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곤 했습니다. 그렇지만 크립키의 입장에서 로티의 비판은 아주 치명적인 것은 아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크립키는 그런 언어가 가능할 수는 있어도 우리 세계의 언어 활동을 포착하는 직관인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고, 필경사 사례를 인정하더라도 모든 이론이 어느정도는 다 갖고 있는 anomaly로 취급하지 않을까 싶네요. 크립키는 어디까지나 "그림"을 제시하고 있으니까요 껄껄


네 저도 영어의 'is'가 철학적으로 그렇게 세 가지 용법이 있는 것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프레게가 동일성 문제를 제시하는 맥락에서 'is'가 동일성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해석 가능성을 배제하고 말씀 드린 것입니다. 그렇지만 계사로 쓰인 경우라 하더라도 "문장만 놓고 보면" 올바른 형식은 아니긴 합니다.

일단 적어도

(ㄱ) Hesperus is "Hesperus"

라는 문장에서 'is'가 존재사로 쓰인 것은 아닐 겁니다. 제가 이해하는 게 맞다면 뭐 'there is Hesperus'이런 문장에서 'is'가 갖는 의미가 존재사이겠죠? 논리적으로는 "(∃x)(x=h)"가 됩니다.
계사로 보게 되면 어떤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Hersperus is bright'에서 'is'는 계사의 의미를 갖겠죠. 논리적으로는 "Bh"가 됩니다.
동일성 기호로 보면 두 대상이 수적으로 동일하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Hesperus is Phosphorus'에서 'is'는 동일성을 표현하고, 논리적으로는 'h=p'가 될 것입니다.

다시 원래 문장을 보면, 저는 이 문장이 어느 쪽에 속하지도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문장만 놓고 보면"요. 'is' 오른쪽에 오는 것이 인용이라면

(ㄱ') Hesperus is called "Hesperus"

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is'를 계사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멍멍이 초코도 마찬가지일 것이구요.

(ㄴ-1) 저 멍멍이가 초코야.
(ㄴ-2) 저 멍멍이는 "초코"라고 불려.

두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전자는 동일성, 후자는 계사의 의미를 표현하겠군요.

일상적인 맥락에서는 계사로 쓰이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왜 그런가에 대해선 딱히 할 말이 없지만, 적어도 일상적인 맥락에서 어떤 사람이 "저 개는 '초코'이다"와 같은 문장을 동일성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말할 리는 없다는(왜냐하면 천체와 언어적 대상을 동일시하는 사람으로 간주하게 되기 때문) 해석에 의해 (ㄴ-2) 같은 방식으로 말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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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의견 감사합니다.

이 부분에서 조금 의아한 부분이 있는데요, 모든 수학적 명제가 필연적 참이라고 할 때, 수학의 참인 진술들이 모두 같은 명제를 표현한다는 의미가 제게 잘 와 닿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는 프레게식 해석으로, 문장의 지시체가 참/거짓을 지시하고, 참 값을 지시하는 모든 명제가 같다는 The True의 의미로 말씀하신 것인가요?

모든 수학적 명제가 필연적 참일 때, 수학의 참인 진술이 모두 같은 명제를 표현한다는 것에 해당하는 예시가 있을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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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퍼런스 감사합니다! 올려주신 것 중에서 관심 가는 주제들에 대해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정확히 프레게식으로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의도한 의미는 이렇습니다.
내포가 외연을 결정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입니다.
통상적으로 문장의 내포는 명제, 외연은 진릿값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가능세계 의미론에 따르면 (적어도 한 버전에 따르면) 명제는 그 명제를 표현하는 문장이 참이 되는 가능세계들의 집합으로 규정됩니다.
그런데 필연적으로 참인 명제는 모든 가능세계들의 집합입니다. 모든 가능세계들의 집합은 하나뿐이죠. 그러니 필연적 명제를 표현하는 모든 문장은 동일한 명제를 표현한다는 귀결이 나옵니다.

물론, 이는 명제의 본성을 다르게 파악하면 발생하지 않는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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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명의 내포와 지시체의 본질’

작년에 publish한 논문인데 크립키의 고정지시어 개념의 한계점과 그에 대한 해결법을 적어보았습니다. 고유명에는 의미가 없다는 최근 학계의 주류견해와는 다른 노선(고유명이 내포를 가짐을 주장)을 탐색하는 글입니다.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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