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데거의 「휴머니즘 서간」에 윤리학과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래 내용은 꽤 길지만, 그 중 몇몇 부분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존재와 시간』이 출판된 직후, 한 젊은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선생님은 윤리학을 언제 쓰실 겁니까?" […]
존재론과 윤리학의 연관을 더 정확히 규정하려는 시도를 하기에 앞서, 우리는 존재론과 윤리학 자체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제 긴박하게 요청되는 것은, 이 두 표제 안에서 언급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보다 앞서 존재의 진리를 사유해야 하는 사유의 과제에 아직도 적합하고 가까이 남아 있는가의 여부를 숙고하는 것이다.
분과학문으로부터 비롯된 모든 사유와 더불어 존재론과 윤리학마저 물론 유약하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의 사유가 더 분과화되어야 한다면, 앞서 명명된 철학의 두 분과학문 사이의 연관에 관한 물음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
논리학 및 자연학과 더불어 윤리학은 플라톤 학파에서 처음 등장한다. 이 분과학문들은, 사유가 철학으로 되고 철학은 학문(에피스테메)이 되며 또한 학문 자체는 학파와 학파경영의 사태가 되었던 시대에 성립한다. 그렇게 이해된 철학을 시종일관하는 가운데, 학문은 성립하지만 사유는 소멸한다. 이런 시대 이전 사유가들은 논리학도 몰랐고, 윤리학도 몰랐으며, 자연학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유가들의 사유는 비논리적이거나 비도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모든 후대의 자연학이 결코 더 이상 도달할 수 없었던 심오한 깊이와 광범위한 폭 안에서 퓌시스를 사유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들은—만약 이러한 비교가 허용된다면—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 강의보다 에토스를 더 시원적으로 자신의 말함 안에 간직하고 있다. 단지 세 낱말로 구성된 헤라클레이토스의 격언은 너무나도 단순 소박한 것을 말하기에, 이 격언으로부터 에토스의 본질은 직접적으로 밝게 다가온다. […]
에토스의 근본적 낱말 의미에 맟게 윤리학이란 명칭이 인간의 체류지를 숙고한다는 의미를 지닌다면, 존재의 진리를 '탈존하는 자로서의 인간의 시원적 본령'으로서 사유하는 그러한 사유는 이미 그 자체가 근원적 윤리학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휴머니즘 서간」, 『이정표』, 제2권, 이선일 옮김, 한길사, 2005, 169-173 passim.)
핵심을 요약하자면,
(a) 하이데거는 사유가 분과학문의 형태로 이론화되고 제도화된 오늘날의 현실에 기본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b) 사유가가 '윤리학'이라는 학문을 명시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사유가 '비윤리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이데거는 '윤리학'이라는 학문이 등장하기 전이었던 플라톤 이전 고대 그리스 사상이 윤리학의 주제인 '에토스'에 대해 더 깊이 사유했다고 지적합니다.)
(c) 하이데거가 보기에, 존재의 진리에 대한 사유는 그 자체로 윤리학입니다.
말하자면, 존재하는 것들을 우리가 미리 전제하고 있는 이론적 선입견 속에 가두지 않으려는 사유,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 어떻게 다양한 모습으로 그 자신을 드러내는지에 주목하려는 사유에는, 그 자체로 일종의 '윤리적' 함의가 있다는 거죠. 「휴머니즘 서간」에서는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그게 바로 하이데거가 기술의 문제를 다루는 후기의 여러 작품들에서 강조하는 점이기도 하잖아요. 라인강을 '수력발전소'로 미리 규정하고 거기서 인간을 위한 자원과 에너지만을 끌어내고자 하는 근대 이후 문명에 반대하여, 하이데거는 라인강이 우리에게 어떻게 풍요로운 의미 속에서 주어지는지에 주목하니까요. 이런 사유는 우리 자신이 우리를 둘러싼 존재자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 이미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