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 철학에서 본질은 결국 무엇인가요?

얕은 질문 죄송합니다. 사르트르에게 있어서 사물의 본질이란 결국 무엇을 의미하나요?

여태까지는, 후설이 이야기했던 포착이 어려운, 그 사물이 자체로 존재함을 드러내는 근본적인 무언가 내지는 그냥 즉자성 그 자체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시중엔 창조자의 목적성 혹은 언어적 개념 그 자체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 내지는 지향적으로 밝혀낸 쓸모, 그 사물이 다가오는 방식으로까지 읽는 경우도 다분하더라고요.

그렇다면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를 위해 먼저 그 반대인 ‘본질이 사물에 앞선다’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자. 예를 들어 교실의 의자를 생각해보자. 의자는 교실에 존재하기에 앞서 그 책상을 제작한 사람의 머리 속에 그 본질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무엇 때문에 이 의자를 만들며, 의자의 재료는 무엇으로 할 것이며, 크기는 어느 정도로 할 것인가와 같은 의자에 대한 구상이 제작자의 머리 속에 먼저 그려진 다음 그에 따라 의자는 제작된다. 이 경우 의자가 실재로 존재하기에 앞서 의자의 본질이 먼저 존재했다는 점에서 볼 때, 의자에 있어서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고 말할 수 있다.​


같은 글도 보았는데, 이런 정의는 모순적인 부분이 너무 많지 않나요. 사물의 본질을 창조자가 규명한다는 것은 당연히 아닐 것임에 더해, 사르트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물의 본질이지 어떤 개념의 본질, 언어적 정의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문헌을 뒤져도 사르트르의 본질이란 용어는 정의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원래는 그냥 이 사람은 상세히 정의한 즉자성 자체를 직관적으로 본질의 존재라는 말로 환원시켜 생각하는 거라 받아들이고 있었고요. 본질이 물건을 자르고자 할 때의 칼처럼 지향에 의해 부여되는, 대자가 포착하는 본질을 의미하나요? 하이데거의 쓸모 개념처럼? 아니라면 저 글자를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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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철학 전통에서 본질은 'x를 x이게 하는 것'으로 정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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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x는 개념이 아닌 개별 사물인가요? 아니면 개념일까요. 저는 이제까지 후자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의 반대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일 뿐입니다. 의식과 사물이 반대개념이지 실존과 사물은 반대개념이 아닙니다. 이는 즉자와 대자의 개념적 정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즉자는 '사물의 존재'를, 대자는 '의식의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개념 정의에 근거하여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를 이해해야 합니다. 대자는 자신이 아닌 어떤것으로서, 또는 자신이 지금 무엇이라고 할 때 바로 그 무엇이 아닌 어떤 것으로서 정의되기 때문에 즉자와 반대됩니다. 그리고 인간이 이러한 대자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그가 지금 무엇이라고 할 때 바로 그 무엇과 일치하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대자의) 존재 방식을 보고 '실존'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의 실존은 선재하는 것으로 가정된 그 어떤 본질이나 가치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니며, 또 그런 것들에 의해서 정당화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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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사르트르의 언급 자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제목으로 한국에 출판된 1940년 후반 강의록에서 등장합니다. 그 스스로가 반대 주장(본질이 앞선다)의 사례로 책상 같은 수단적 도구를 제시하며 인간 실존과 대비시킵니다.

이를 그 이전 주저인 <존재와 무>와 연결시킬 때 즉자, 대자 대비가 확장적으로 도출되겠지요. 전부 실존주의 내지 현상학적 함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사르트르 후기 저작 <변증법적 이성비판>을 참고해보시면, 또 다를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서의 그는 사실상 마르크스주의자인데, 실존 문제와 관련하여 가장 문제되는 상황 '소외'가 너무 근본적이어서 본질이 실존에 앞서는, 즉 특정한 맥락과 조건이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들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물화'인데, 그는 이를 인간이 사물적인 물질적 조건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표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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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를 인간의 의지와 자유를 앞세우는 의지주의(voluntarism)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쉬울 것 같습니다. 인간의 실존이란 사전에 정해진 답 없이 '내던져진' 것이고 따라서 내가 의지적으로 의미 부여하기 나름이라는 거죠. 반면 모든 사물에 본질이 내재해 있다면 사물들은 이미 규정된 원리에 따라 행위하게 되는 것이고요. 그런데 전통적으로 본질이란 애초에 어떤 사물이 있게 하는 형이상학적 원리인 반면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본질'은 어떤 사회학적인 의미인 걸로 보입니다. 사람과 개를 구분시켜주는 종차로서의 본질과, 인생에 정해진 답이 있다/없다는 의미로서의 '본질'은 다른 차원에 있으니까요. 저에게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약간의 프랑스 철학적인 수사가 섞인 슬로건 같은 걸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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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료한 답 감사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는 대자, 즉자와는 다른 개념이겠죠? 글을 읽다가 떠오른 것이라서요. 그가 말한 형상,질료는 둘다 사르트르의 실존과는 다른 초월적인 힘에 의한 방향성이 있는데반해 사르트르의 실존은 그런 초월적인 의지(방향성)가 없이 인간 개인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인가요?

아마 별로 상관없는 개념쌍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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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 저도 글을 쓰면서 질문하고나니 상관이 없어보입니다. 답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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